영국의 경제학자 존 메이너드 케인스는 통화팽창책이나 재정지출 확대에도 실업률이 증가하는 등 실물경기 회복이 뒤따르지 않는 유동성 함정의 뒤에는 경기침체가 고착화되는 디플레이션이 바짝 따라붙는다고 지적한바 있다.
한국 경제가 시중에 돈은 넘쳐나는데 실물경제는 꿈쩍도 하지 않는 이른바 '유동성 함정'에 빠져들고 있다.
금융감독원이 지난 2월 말 784조7000억원으로 집계했던 단기부동자금은 3월 말 800조원을 넘어선 것으로 추정된다.
단기부동자금 800조원은 현재 국회에서 논의 중인 추경예산을 제외한 올해 정부 연간 예산(일반회계+특별회계+기금) 284조5000억원의 2.8배에 해당한다. 단기부동자금은 정부의 추경예산이 집행되면 더 늘어날 것으로 예상된다.
문제는 경기부양을 위한 과잉유동성은 어느 정도 예상됐던 것이지만 시중자금이 실물경제와는 직접적 관련이 없는 증권이나 부동산 등의 사이를 수시로 옮겨 다니면서 금융시장의 혼란과 과열을 부추기고 있다는 점이다.
그나마 주식시장으로 자금이 흘러들어간다면 주가 상승을 통해 실물경제를 회복시키는 힘이 나타나겠지만 최근 일부 지역에서 나타났듯이 부동산 투기 쪽으로 돈이 몰릴 경우 경제의 불안정성은 커질 수밖에 없다.
바람직한 것은 시중자금이 장기 대출이나 회사채 등으로 집중돼 기업의 자금조달을 용이하게 해주거나 설비투자 등 유형자산쪽으로 몰리도록 하는 일이다.
그러나 최근 우리 상황은 그렇지 못하다는 데 문제의 본질이 있다.
과거 일본이 겪은 잃어버린 10년의 근본적 이유는 유동성 함정이었다. 파격적인 금리인하를 중심으로 한 엄청난 규모의 유동성 공급으로 경기를 살려보려 했으나 이에 실패했다.
현재 우리나라의 상황이 그 때와 다르다고 누가 장담할 수 있을지 궁금하다. 실업자 100만명 시대가 도래했다. 기업들은 일자리를 감소시키고 월급마저도 줄이고 있는 판국이다.
이에 가계소득은 감소하고 소비는 위축되고 유동성 공급을 해준들 은행에서는 스스로의 위험도를 낮추기 위해 중소기업 및 서민들에게는 장벽을 더더욱 높게만 쌓고 있다.
또한 공급되는 유동성도 부채탕감에 쓰일 뿐 소비로 이어지지 않고 있다. 경기회복을 부르짖을 자리가 아니라는 것이다.
최근 국제 금융불안 때문에 시장이 지나치게 민감한 반응을 보이고 있다는 게 전문가들의 대체적인 의견이다.
하지만 문제는 돈줄이 막히고 금리가 오르면 그렇지 않아도 고전하고 있는 가계와 기업의 어려움을 가중시킨다는 것이다. 금융시장의 중개기능이 회복되지 않는다면 기업과 은행의 부실은 눈덩이처럼 커질 수밖에 없다.
특히 과잉유동성을 해소하기 위해 정부가 섣불리 금리 인상 등 통화긴축에 나설 경우 경기회복은 요원해질 수밖에 없다.
따라서 정부와 금융당국은 실물경제 쪽으로 여유자금이 흐를 수 있게 하는 데 총력을 기울여야 한다.
은행권의 자세 전환도 절실하다. 지금처럼 리스크 회피에만 매달리다간 기업부도가 더욱 늘어나고 그리 되면 결국 은행에도 부메랑이 되어 돌아온다는 점을 명심하고 대출확대에 적극 나서야 할 것이다.
실제 800조원의 돈이 풀려 회사채시장이 살아나고 있다고 하지만 이는 AA등급 이상의 우량등급에 국한된다. 등급이 낮은 회사채는 여전이 외면 받고 있는 실정이다.
시중자금이 투기용으로 떠돌며 거품만 키운다면 경제는 결코 살아날 수 없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서영백 기자 inche@ajnew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