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재비 급등과 예산액 감축으로 내년 공공사업에 대한 발주 차질 우려가 커진 가운데, 최근 법원이 인명 사고 시 발주처의 형사책임 범위를 확대한 판결을 내놓으면서 시장 위축 우려가 더욱 확산되고 있다. 시장 혼란을 막기 위해 구체적이고 명확한 기준을 담은 법 개정에 나설 필요가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6일 업계에 따르면 대법원은 최근 인천항 갑문 정기보수공사 중 시공사 소속 근로자가 사망한 사건에 대해 인천항만공사 및 대표자에게 무죄를 선고한 원심을 유죄 취지로 파기·환송했다.
업계에서는 이번 판결에 따라 향후 시설에 대한 건설 및 보수공사 업무 발주 시, 해당 공사를 직접 실행할 자격을 갖추지 못한 발주처라도 시설, 장비, 장소 등을 실질적으로 지배·관리하는 주체로 인정된다면 안전보건조치의무를 부담할 가능성이 높아졌다고 보고 있다.
사망사고와 관련해 주로 시공사가 중대재해처벌법과 산안법의 규율 대상이 됐는데, 이제는 발주처 역시 사안에 따라 형사 책임의 주체가 될 가능성이 높아진 셈이다. 특히 사회간접자본(SOC)의 유지·보수 및 전력시설 등 핵심 공공 플랜트 발주 등의 분야에서 해당 판결이 영향을 미칠 가능성이 높다.
A 대형 로펌의 한 중대재해 전문 변호사는 “전력이나 항만 등 전문성이 필요한 공공시설의 정비성을 띤 보수공사나 산업 분야의 플랜트 발주 등에서 영향을 받을 가능성이 크다. 이미 판결 후 공공 발주에 대한 자문 요청이나 기존 자문 내용에 변동이 생긴 것인지를 묻는 사례가 늘고 있다”며 “현재 한국중부발전 등에서도 유사 소송이 진행 중인데 이와 유사한 소송의 판결 기준점으로 작용할 가능성이 상당하다”고 진단했다.
노후 기반시설의 유지 보수 및 발주 시장이 날로 확대되고 있다는 점을 감안하면, 공공발주 사업 여건이 악화된 상황에서 업계에 미칠 파장이 결코 적지 않다는 것이 관계자들의 지적이다. 앞서 정부는 내년도 SOC 분야의 예산을 3.6%가량 삭감한 바 있다.
국토교통부에 따르면 전국 도로·철도 등 15종 기반시설 38만2000여개 중 20년 이상 경과 시설물은 51.2%, 30년 이상 경과 시설물도 9만6753개로 25.2%에 달한다. 국토부가 일정 안전등급 이하 시설물은 보수보강·성능개선에 나서도록 시설 관리 주체에 통보하고 있기 때문에, 향후 공공 발주에서 유지·보수 공정의 비중도 꾸준히 확대될 것으로 점쳐진다.
B 대형 로펌에서 건설분야 자문업무를 맡고 있는 한 전문위원은 “전문건설의 경우 공사 발주자의 범위가 그나마 정해져 있다. 다만 그 외 분야에서는 발주자의 범위나 개념이 분명치 않아 판례에 기대야 하는데 그나마도 심급마다 같은 사안에 대해서 변동이 있어 시장 혼란이 빚어지는 상황”이라며 “산안법 등 관련 법령에서 발주 및 책임 있는 도급인의 범위를 보다 명확히 설정해야 한다”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