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석유화학 업체 관계자는 1일 아주경제신문과 통화에서 정부가 최근 검토 중인 산업 재편 안과 관련해 "정부가 내부적으로 할 수 있는 부분을 찾고 있는 것 같은데 아직까지 구체적인 내용이 공유된 것은 없다"며 이같이 토로했다.
세계 5위 원유 정제 능력과 4위 에틸렌 생산 능력을 갖춘 우리나라 석유화학 산업이 구조적 불황에 시달리고 있지만 정부는 뚜렷한 해법을 내놓지 못하는 상황이다. 부처와 업계 간 애로 사항 청취도 원활하지 않다.
또 다른 석유화학 업계 관계자는 "정부도 움직이려고는 하는데 업황이 너무 안 좋다"며 "연구개발(R&D)에 대한 세제 혜택 등 도움을 준다면 업계가 부담을 덜고 새로운 먹거리를 찾는 데 도움이 될 것으로 본다"고 말했다.
최대 수출 시장이던 중국이 최대 경쟁국으로 변모한 게 국내 석유화학 산업이 근본적인 위험에 처한 요인이다. 중국이 에틸렌 자급률을 높이면서 공급과잉이 발생하고 결국 가격 하락으로 이어지는 악순환 고리가 형성됐다.
익명을 요구한 업계 관계자는 "국내 기업이 수출한 석유화학 제품을 중국이 재가공하는 구조였으나 2010년대 후반부터 중국 내 설비투자가 확대되고 자급률이 높아지면서 우리 기업의 수출 물량이 현저히 줄었다"고 말했다.
한국신용평가 보고서를 살펴보면 2020~2023년 중국의 연평균 에틸렌 생산 능력은 2500만t 규모로 국내 전체 에틸렌 생산량 1300만t 대비 2배에 달한다.
중국 정부가 2030년까지 8387만t을 목표로 생산 능력을 추가 확대할 계획이어서 글로벌 석유화학 산업 업황 개선이 쉽지 않아 보인다.
여기에 최근 극성을 부리는 중국의 수출 물량 밀어내기가 국내 석유화학 기업들을 더욱 벼랑으로 내몰고 있다. 내수 부진에 시달리는 중국은 자국산 제품을 전 세계에 저가로 수출하는 전략을 강화하는 추세다.
정부는 산업통상자원부를 중심으로 정책금융 지원, 중장기 사업 재편에 따른 인센티브 제공 등 지원책 마련에 한창이다. 산업부 관계자는 "기업 간 사업 재편을 촉진하기 위한 방안들을 준비 중이며 관계 부처와 논의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기업들의 자발적 사업 재편을 돕기 위해 공정거래법 규제를 완화하는 방안도 검토 중이다. 세 부담 완화, 세제 개선 등도 검토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다만 미국 등 주요국이 기존 산업 보호와 첨단 산업 육성을 위해 보조금 지급을 포함해 광범위한 정책 카드를 동원 중인 걸 감안하면 우리 정부 대응이 미온적이라는 비판도 제기된다. 업계가 원하는 핀셋 지원 방안을 발굴하고 정부 주도로 구조조정에 나서는 등 선택지를 넓혀야 한다는 것이다.
정부가 오히려 업계 발목을 잡는 현상도 곳곳에서 확인된다. 이덕환 서강대 화학과 명예교수는 "정부가 올해 R&D 예산을 대폭 삭감했는데 상당 부분이 소재 산업에 투입되던 예산"이라며 "석유화학 산업을 범용 소재에서 고부가가치 정밀화학 산업으로 전환하기 위한 R&D 투자에 제동이 걸린 것"이라고 지적했다.
이 교수는 "정부 입맛대로 정책을 만드는 행태를 바꾸지 않으면 (신규 지원책도) 결국 '속 빈 강정'에 불과할 것"이라며 "정유·화학 산업 생태계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산업을 보호하기 위한 정책을 마련해야 한다"고 덧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