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정부가 새로운 반도체 지원 계획으로 정부 보유 주식 배당금을 담보로 하는 국채 발행을 추진한다. 최첨단 반도체 양산을 목표로 하는 일본 반도체 기업 라피더스 등을 대상으로 2030년경까지 지원할 방침이다.
2일 니혼게이자이신문(닛케이)과 요미우리신문 등 보도에 따르면 일본 정부는 이달 안으로 내놓을 경제 대책에 이 같은 내용을 담기로 했다. 구체적으로는 NTT 주식 등 정부 보유 자산을 담보로 새로운 국채를 발행해 조달한 자금을 기업 보조금으로 사용한다.
중점 지원 대상은 라피더스다. 라피더스는 2027년을 목표로 하는 최첨단 2나노(㎚·10억분의 1m) 반도체 제품 양산을 목표로 하고 있다. 라피더스에는 도요타, 키옥시아, 소니, NTT, 소프트뱅크, NEC, 덴소, 미쓰비시UFJ은행 등 일본 대기업 8곳이 출자했지만 출자액은 73억엔(약 660억원)에 불과하다.
라피더스는 미국 IBM과 협력해 최첨단 제품 양산을 목표로 하고 있지만 여러 크고 작은 리스크를 안고 있다. 일본 재무상 자문기관인 재정제도 등 심의회에서는 “정부 지원이 국민 부담으로 이어져선 안 된다”는 경고가 나오고 있다. 실패할 위험이 있는 사업인 만큼 국민의 세금 부담으로 되돌아오는 상황을 피하고 싶은 것이다.
실제 일본 정부 지원을 등에 업고 출발한 라피더스를 둘러싸고 일본 안팎에서는 의구심이 고개를 들고 있다. 현재 일본에서 생산되는 반도체는 대부분 28나노급 레거시 반도체인데, 2나노 이하 최첨단 회로로 단계를 훌쩍 뛰어넘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와 함께 라피더스 경영이 변화무쌍한 반도체 시장에 발 빠르게 대처하지 못할 수 있다는 우려도 나온다. 일본 매체인 현대비즈니스는 라피더스 최고경영진의 고령화 문제를 지적하기도 했다. 히가시 데쓰로 라피더스 회장과 고이케 아쓰요시 사장은 모두 70대로 현업에서 물러난 지 오래된 인사들이다.
현대비즈니스는 “라피더스가 2나노 생산에 성공한다 해도 양산 실적이 없어 글로벌 고객사 확보가 쉽지 않을 것”이라고 우려했다. 이와 함께 “경영진은 ‘퇴역병’인 70대인 데다 현장 경험도 부족하다”고 지적했다.
이 같은 상황에서 일본 정부는 반도체 지원 방식에 변화를 꾀하고 있다. 새로운 대책은 기존과 같이 보조금을 잇따라 투입하던 방식에서 벗어나 수년에 걸쳐 단계별로 지원한다는 것이 특징이다.
지금까지는 중장기적인 자금 지원 계획 없이 추가경정예산 등을 통해 필요한 자금을 임기응변식으로 조달해왔다. 변화된 지원책은 반도체 양산 전에는 보조금을 지급하고, 양산 체제에 들어가면 정부 기관을 통한 출자나 민간 융자에 대한 채무 보증으로 축을 옮기는 방식이다.
보조금은 금전적 수익이 없는 ‘퍼주기’식 지원인 반면 출자금은 이자 지급이나 상환, 배당 등 형태로 자금 회수가 가능하다는 면에서 정부로서도 부담을 덜 수 있다는 계산이다.
닛케이는 새 지원 방침에 대해 “다년간에 걸친 계획적인 지원으로 민간의 예측 가능성을 확보한다는 계획”이라며 “라피더스의 사업은 리스크가 큰 만큼 일반회계 이외 재원을 활용해 국민 부담을 줄이려 하는 것”이라고 짚었다.
한편 일본 정부는 라피더스 설립과 별도로 세계 파운드리(반도체 수탁생산) 1위 업체인 대만 TSMC 공장을 구마모토에 유치하는 등 다양한 정책으로 반도체 산업 육성을 추진하고 있다. 닛케이는 일본 정부의 새 지원책에 대해 “구마모토에 진출해 있는 TSMC도 지원 대상으로 염두에 두고 있다”고 보도했다.
일본 반도체 세계 시장 점유율은 1980년대 한때 50%에 달했으나 한국과 대만 등에 밀려 2017년에는 10% 아래로 떨어졌다. 일본 경제산업성은 일본산 반도체 관련 매출액을 2030년에 15조엔(약 136조원)까지 달성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