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정부가 안보 상황 악화를 이유로 레바논에 있는 자국민에게 현지를 떠날 것을 권고했다. 레바논에서 무선호출기(삐삐)의 동시다발 폭발이 연이어 발생한 뒤 이스라엘과 친(親)이란 무장단체 헤즈볼라의 무력 충돌이 격화하자 이 같은 권고가 나온 것이다.
21일(현지시간) 타임스오브이스라엘에 따르면 미 국무부는 이날 “이스라엘과 헤즈볼라 간 지속적인 분쟁과 레바논 전역의 최근 폭발 사건으로 인해 미국 시민들에게 상업적 선택지가 남아 있는 동안 레바논을 떠날 것을 촉구한다”고 밝혔다. 이어 “현재로서는 상업용 항공편 이용이 가능하지만 수용 인원이 줄어들고 있다”며 “안보 상황이 악화할 경우 민간 항공기를 이용해 출국하는 것이 불가능할 수도 있다”고 덧붙였다.
앞서 미국은 지난 7월 말 이스라엘이 베이루트 남부를 공습해 헤즈볼라의 고위 지휘관을 사살한 뒤 레바논에 대한 여행 권고를 가장 높은 등급인 ‘여행 금지’로 상향 조정한 바 있다.
미국의 이번 권고는 레바논 곳곳에서 동시다발로 수천대에 달하는 삐삐와 무전기가 폭발한 사건 이후 나왔다.
지난 17일 레바논 각지에서 삐삐 수천대가 한꺼번에 터지고 다음 날인 18일 무전기가 연쇄 폭발했다. 이 일로 37명이 숨지고 약 3000여명이 다쳤다. 헤즈볼라는 폭발 사건의 배후로 이스라엘을 지목하고 보복을 천명한 뒤 19일 로켓 140발을 동원해 이스라엘 북부를 공격했다.
이스라엘도 20~21일 레바논 남부와 동부에 공습을 가하며 압박 수위를 높였다. 레바논 보건부는 21일 성명에서 전날 이스라엘군의 베이루트 남부 외곽 주거 지역 공습으로 39명의 사망자가 발생했다고 밝혔다. 사망자 중에는 어린이 3명과 여성 7명이 포함된 것으로 전해졌다.
삐삐 폭발 사건으로 인한 부상자 약 2950명 가운데 777명이 아직 입원 중이고 152명은 위독한 상태라고 레바논 보건부는 설명했다.
뉴욕타임스(NYT)에 따르면 이스라엘군은 이날 오후 전투기 수십 대를 동원해 레바논 남부의 헤즈볼라 목표물을 타격했다.
이스라엘군은 성명에서 레바논 남부와 동부에서 헤즈볼라 시설 등을 겨냥한 공습을 이어갔으며 전날 베이루트 남부 표적 공습으로 숨진 헤즈볼라 지휘관이 16명에 달한다고 밝혔다. 공습으로 사망한 지휘관 중에는 헤즈볼라 특수작전 부대 라드완의 이브라힘 아킬 사령관도 포함됐다고 이스라엘군은 설명했다.
헤즈볼라는 레바논에 대한 이스라엘의 반복적인 공격에 대응해 미사일 수십기를 이스라엘 라맛 다비드 공군기지로 발사했다고 22일 텔레그램을 통해 밝혔다.
한편 바이든 행정부는 이스라엘과 헤즈볼라 간 전면전에 대해 우려하면서도 이스라엘의 군사적 압박으로 인해 헤즈볼라가 협상 테이블로 나오길 기대하는 것으로 전해졌다.
악시오스는 이날 복수의 미 당국자를 인용해 “바이든 행정부는 이스라엘과 레바논의 전면전 위험에 대해 매우 우려하고 있다”면서도 “하지만 헤즈볼라에 대한 이스라엘의 군사적 압박을 외교적 해결책으로 활용해 양측 간 합의를 도출되기를 희망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한편, 제이크 설리번 미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은 21일 언론 온라인 브리핑에서 전날 이스라엘의 공습에 따른 아킬 사령관 사망에 대해 “언제든 미국인들을 살해한 테러리스트에게 정의가 구현되는 것은 좋은 결과라고 우리는 믿는다”고 말했다.
아킬 사령관은 1983년 레바논 베이루트에서 발생한 트럭 폭탄 테러로 미 대사관과 미군 해병대 막사에 있던 300명 이상을 살해한 혐의로 미국의 추적을 받아온 인물이다. 미국 정부는 그에게 700만 달러(약 94억원)의 현상금을 걸었다.
설리번 보좌관은 이스라엘·하마스 전쟁 휴전 협상에 대해 휴전에 도달할 길은 여전히 있지만 지금으로서는 미국이 양측이 합의할 수 있는 안을 제시할 상황은 아니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