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바논에서 무장단체 헤즈볼라 대원들의 무선호출기가 동시 폭발하면서 수천명의 사상자가 발생했다. 헤즈볼라가 즉각 이스라엘을 배후로 지목하며 보복을 다짐한 가운데 양측 간 갈등이 전면전으로 확대될 가능성이 커졌다는 분석이 나온다.
17일(이하 현지시간) 뉴욕타임스(NYT), BBC 등 외신에 따르면 이날 오후 3시 30분경 레바논 전역에서 헤즈볼라 대원들이 주로 사용하는 무선호출기 수백 대가 동시에 폭발했다. 레바논 보건부는 이번 폭발로 최소 9명이 숨지고 2750명이 다쳤다고 발표했다. 부상자 중 약 200명은 위독한 상태인 것으로 전해졌다.
이 때문에 이스라엘이 헤즈볼라가 수입한 대만산 무선호출기에 소량의 폭발물을 투입했다는 주장도 나왔다. NYT는 미국과 서방 당국자들을 인용해 이스라엘이 헤즈볼라가 수입한 무선호출기에 사전에 소량의 폭발물과 원격 제어 스위치를 설치해 터뜨렸다고 보도했다.
다만 폭발한 무선호출기의 생산업체로 지목된 대만의 골드아폴로(Gold Apollo) 측은 해당 제품은 자신들이 직접 생산한 것이 아니라, 라이센스 생산 허가를 받은 BAC라는 유럽 소재 업체가 생산한 것이라고 해명했다.
소프트웨어 회사 위드시큐어의 전문가이자 유로폴의 사이버범죄 고문인 미코 히포넨은 “이 무선호출기는 폭발을 일으키기 위해 어떤 식으로든 개조됐을 가능성이 높다”며 “폭발의 크기와 강도를 보면 배터리만 폭발한 것이 아니다”라고 분석했다.
또한 텔아비브대 사이버보안 분석가이자 연구자인 케렌 엘라자리는 “이번 공격은 헤즈볼라의 중앙 통신 수단을 파괴한 것으로 아킬레스건을 강타했다고 볼 수 있다”고 평가했다.
이에 헤즈볼라와 팔레스타인 무장단체 하마스는 배후로 이스라엘을 지목하고 보복 의지를 드러냈다. 헤즈볼라는 성명에서 “이스라엘에 전적인 책임을 묻는다”며 “반드시 정당한 처벌을 받게 될 것”이라고 비난했다. 하마스는 “레바논 시민을 표적으로 삼은 시오니스트(유대 민족주의자)의 테러 공격을 강력히 규탄한다”고 밝혔다.
헤즈볼라와 하마스를 지원하는 이란은 이날 폭발 사건을 “테러 행위”로 규정했다. 레바논 정부는 내각회의 이후 “레바논의 주권을 노골적으로 침해하는 이스라엘의 범죄적 공격을 만장일치로 규탄한다”고 밝혔다.
첩보영화를 방불케 하는 이번 무선호출기 폭발 공격과 관련해 이스라엘 정부는 입장을 밝히지는 않았다.
한편 미국은 이번 폭발 사건과 관련이 없다는 입장이다.
매슈 밀러 국무부 대변인은 이날 브리핑에서 “미국은 이 사건을 사전에 알지 못했으며, 관여하지 않았다고 말할 수 있다”고 밝혔다. 이어 “우리는 전 세계 언론인들과 같은 방식으로 정보를 수집하고 있으며,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팩트들을 수집하고 있다”고 덧붙였다.
이번 폭발 사태로 소강 국면을 보이는 듯했던 이스라엘과 헤즈볼라 간 전면전 위기가 다시 고조될 전망이다. 이스라엘과 헤즈볼라는 지난해 10월 이스라엘-하마스 전쟁이 발발한 직후부터 국경을 사이에 두고 무력 공방을 이어왔다. 다만 이들은 중재와 협상 등으로 자제력을 발휘하며 전면전은 보류한 상태였다.
한편, 미 인터넷 매체 악시오스는 소식통 3명을 인용해 조 바이든 대통령의 특사인 아모스 호크스틴 백악관 선임고문이 지난 16일 베냐민 네타냐후 이스라엘 총리에게 레바논과 더 광범위한 전쟁을 시작하지 말라고 경고했다고 전했다.
그러나 네타냐후 총리는 호크스틴 고문에게 레바논 국경 안보 상황에 근본적인 변화 없이 이스라엘 피란민들을 집으로 돌려보내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입장을 전달한 것으로 알려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