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낭과 한국의 인연
올여름 한국인들의 해외 여행지 가운데 높은 순위를 차지한 곳이 베트남 다낭이었다. ‘경기도 다낭시’라는 농담이 있을 만큼 많은 한국인이 다낭에 다녀왔다. 한 조사는 한국인들이 가고 싶은 곳으로 하노이 다음으로 다낭을 꼽았다고 했다. 한국인들은 왜 이리 다낭을 좋아할까? 어느 베트남인 친구가 나에게 한 질문이다. 다낭은 베트남 중부의 주요 도시로 인구가 아주 많지 않고 거리도 깨끗해 쾌적한 느낌을 준다. 남으로 호이안, 북으로는 후에(Hue)로 연결돼, 각각 과거 번성했던 무역항과 마지막 왕조의 수도에 발을 딛고 그 분위기를 느껴볼 수 있다. 다낭의 서쪽에는 미선 유적지가 있어, 이 지역이 15세기 북부의 베트남에 복속되기 전까지 힌두교 문명을 일궜던 참파의 문화를 접해볼 수 있다. 1960년대 베트남전쟁 때 다낭은 남베트남 제2의 도시였다. 미국이 1965년 해병대를 상륙시킨 곳도 다낭이었다. 황석영이 베트남전쟁 소설 <무기의 그늘>을 쓰며 다낭을 배경으로 삼았다. 그의 소설에 등장하는 다낭의 여러 지역이 지금 실재하는지는 모르겠으나 찾아가 보고 싶기도 하다. 자, 이제 다낭과 호이안으로 들어가보자.
상인과 표류민이 거쳐 간 베트남
오래전 왕조시대에 동남아를 방문한 우리 선조들 가운데는 경전을 구하러 인도로 가는 구법승들이 있었다. 신라 승려 혜초가 723년 중국 남부 광저우를 떠나 바닷길로 인도에 도착했다. 오늘날 남중국해와 동남아 바다를 거쳐 갔을 것으로 추정한다. 당시 배가 그리 크지 않아 주로 연안으로 항행하다가 주변 항구에 기항했을 터인데, 그가 간 곳이 베트남 중부 어느 곳, 인도네시아 수마트라 섬 남부 팔렘방 등지였을 것이다. 혜초가 베트남 땅에 발을 디뎠는지는 알 수 없다.
현재 알려진 바로 한국인으로서 베트남을 방문한 첫 기록은 조완벽이 세웠다. 이수광이 '지봉집'에서 그가 다녀온 사정을 남겼다. 조완벽은 1597년 정유재란 때 일본의 포로가 돼 1604년부터 세 차례나 일본 상인들과 함께 베트남에 다녀왔다. 당시에 호이안이 국제무역항으로서 번성했지만, 그가 간 곳은 그보다 북쪽에 있는 응에안이었다고 한다. 조완벽이 방문한 시기는 베트남의 레 왕조 때였다. 당시 왕은 있었으나 실질적으로는 북부의 찐 씨와 남부의 응우옌 씨 두 가문이 나눠 실권을 갖고 통치했을 때다. 한국인들은 베트남 전국을 안남이라고 했지만, 일본인들은 북부를 안남, 남부를 광남국으로 구분해 부르기도 했다. 안남은 중국이 베트남을 부르던 용어고 광남은 현재 다낭 인근 지역인 꽝남과 같은 뜻이다.
17세기 말에는 조선인들이 표류해 호이안에 살다가 귀환한 일도 있었다. 옛날 한국인 표류민들 가운데 여러 사람이 일본이나 류큐에 표류했고 동남아까지 표류한 사람은 드물었다. 1801년 전남 신안군 우이도 출신 홍어 장수 문순득이 표류해 류큐에서 살다가 중국을 거쳐 돌아오는 길에 또 표류해 필리핀 루손 섬에 다녀온 적이 있었다. 베트남 호이안에 표착한 이들은 제주도민들이었다. 1687년 김태황(또는 김대황), 고상영 등 제주도 사람 24명이 임금께 진상하는 말을 싣고 가다가 추자도 앞바다에서 풍랑을 만나 표류했다. 이들 24명은 30일가량 표류한 끝에 안남의 어느 섬에 다다랐다. 그들이 섬 이름을 남기지 않아 확인할 수 없지만 다다른 곳은 호이안 앞바다에 있는 꾸라오짬(Cu Lao Cham 짬섬)이거나 호이안 앞바다 어느 작은 섬이었을 것이다. 그 앞 바다는 참파해(Champa Sea)라고 불리기도 했다. 이 지역이 베트남의 영토에 속하기 전 참파 왕국에 속했기에 붙여진 이름일 것이다.
호이안에 도착하다
17세기 말에 호이안에 표착한 제주도민들은 처음에 베트남인들로부터 살해 위협을 받았다. 조선인들이 안남 태자를 죽였기에 복수해야 한다고 했다는 것이다. 실제 이 일이 있었는지는 불확실하다. 오사카대학 박사 후보 조호연 선생은 조선인들이 이 이야기를 만들었을 것이라고 했다. 표류민들은 어느 부인의 도움으로 이로부터 벗어난 후 베트남인들로부터 환대를 받았다고 한다. 한국인 표류민들은 타고 갔던 배가 암초에 부딪혀 부서지자 호이안(Hoi An, 會安) 관청으로 이송돼 거기서 잠시 지내게 된다. 왕도인 푸쑤언(현 후에)을 다녀온 후에는 관우를 모신 사당 관왕묘에 머물게 된다. 이 지역은 이전에 참파의 영역에 속했는데 15세기 레 왕조 시기에 베트남에 복속된 후 16세기 중반 이래 응우옌 씨가 통치하고 있었다.
호이안은 중국과 동남아 간 무역로의 길목에 있었기에, 16세기 말부터 발전해 외국 상인들이 일찍부터 들락거리던 곳이다. 이곳은 17~18세기에 번성했다가 19세기에 쇠락의 길을 걸었다. 유럽인 가운데 동남아에 일찍 진출한 포르투갈 사람들은 호이안을 ‘파이포(Faifo)’라고 불렀다. 여러 설이 있지만, 호이안 중심에 ‘두 거리’가 있어 이를 베트남어로 ‘하이 포(hai pho)’라고 했는데 비슷하게 ‘파이포’로 적었다고 한다. 서양 상인들이 오기 오래 전부터 중국, 일본 상인들이 호이안에 자리잡았다. 17세기에 세워진 내원교를 중심으로 서쪽 거리는 일본인 상인들이 차지했고 동쪽 거리는 중국인 상인들로 가득 찼다. 이 다리는 일본인들이 세워서 일본교라고 불리기도 한다. 다리 가운데 절이 있어 ‘다리 절(Chua Cau, 교량 사원)’이라고도 불린다. 1636년 이래 일본이 해금정책을 펴면서 일본인 거리는 쇠락해갔다. 조선인 김태황 일행이 표류민이었기에 자유롭게 행동할 수 없어서, 호이안 거리 모습을 상세히 묘사하지는 못했다. 중심가인 현재의 쩐푸 거리를 걸었다는 기록은 없다. 오늘날 쩐푸 거리는 ‘쭈어꺼우 거리’였다가 프랑스 식민지 때 ‘일본교 거리(Rue de Pont Japonnais)’로 불렸고, 1975년 통일 이후에는 쩐푸 거리로 바뀌었다. 쩐푸는 베트남공산당 초대 총비서(서기장)였다.
호이안의 중국인 거리였던 쩐푸 거리를 걸으면 지금도 중국인의 숨결이 느껴지는 듯하다. 여기에 광조회관, 중화회관, 복건회관, 조주회관, 해남회관 등이 있다. 중국 출신지별 상인조합이 큰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다는 얘기다. 17세기 조선인 표류민들이 머물던 관왕묘는 지금도 쩐푸 거리 동편에 있다. 오래전에는 현 쩐푸 거리가 투본 강으로부터 첫 번째 거리였다. 쩐푸 거리 남쪽에 있는 응우옌타이혹 거리와 바익당 거리는 19세기에 진흙땅 위에 새롭게 만든 것이다.
1960년대 베트남전쟁 때 호이안은 한국군의 작전지역이었기에, 참전 군인들의 회고록에 가끔 등장하기도 한다. 격렬한 전투지역이었기에 한국군이 베트남 민간인을 학살했다고 여겨지는 곳이 여러 군데 있다. 그중 하미와 퐁니·퐁녓이 가장 잘 알려져 있다. 호이안 시내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이다. 하미 학살 사건은 권헌익 교수가 <학살 그 이후>에서 나쁜 죽음의 사례로 설명한다. 퐁니·퐁녓 학살 사건은 한겨레신문 고경태 기자가 수년간 추적해 <베트남전쟁 1968년 2월 12일>에 상세히 기록했다. 어두운 역사적 장소를 찾아가는 다크 투어리즘의 현장들이다.
호이안에서 다낭으로
역사적 비극의 장소를 뒤로 하고 북으로 향하면 다낭에 닿게 된다. 17세기 조선인 표류민들은 호이안에서 다낭을 거쳐 푸쑤언(현 후에) 궁성을 방문했다. 표류민들은 호이안으로부터 사흘을 걸어 푸쑤언에 당도했다. 호이안에서 후에로 가는 길은 다낭을 지나 하이번(Hai Van 海雲) 고개를 넘어야 한다. 당시 다낭은 발전된 도시가 아니었을 테니, 그들이 지나쳤을 수도 있다. 하이번 고개 정상에 오르면 언덕 위 ‘해운관(海雲關)’이라는 이름을 단 문을 올려다보게 된다. 지금도 몇 개의 벙커가 있는 걸 보면 군사적 요충지였음을 바로 알 수 있다.
호이안이 투본 강 하구에 토사가 쌓이며 교역항으로서 기능이 약화된 이후 다낭은 외국과의 교류 지점이었다. 다낭은 1954년 베트남이 남북으로 분단된 후 남베트남 제2의 도시였다. 분단 이후 곧이어 베트남전이 격화되면서 다낭은 외국군의 베트남 출입구가 됐다. 한국과의 인연도 만들어졌다. 황석영이 소설 <무기의 그늘>에서 안영규 상병을 다낭 합동수사대로 보내며 자본주의 시장이 지배하는 베트남전쟁의 본질을 드러내기 시작한다. 미군 PX에서 흘러나온 각종 물건들이 넘쳐나던 곳이 ‘도끄랍(Doc Lap 독럽)’ 거리와 ‘르 로이(Le Loi 레러이)’ 거리 사이의 뒷골목이었다. 현재 독럽 거리는 다른 이름으로 바뀌었지만, 레러이 거리는 그대로 있다. 이외에도 그때와 지금의 거리 모습은 많은 차이가 있을 것이다. 이처럼 다낭과 호이안이 역사적으로 한국과 인연이 있어 한국인들이 자신도 모르게 이 도시들에 친근감을 갖는지도 모르겠다. 한국인들은 옛 인연을 좇아 다낭과 호이안으로 달려간다.
필자 주요 약력
서강대 정치학박사, 서강대 동아연구소 및 대학원 동남아시아학 협동과정 교수 역임, 한국-베트남 현인그룹 위원 역임. 현 단국대 아시아중동학부 베트남학전공 초빙교수
올여름 한국인들의 해외 여행지 가운데 높은 순위를 차지한 곳이 베트남 다낭이었다. ‘경기도 다낭시’라는 농담이 있을 만큼 많은 한국인이 다낭에 다녀왔다. 한 조사는 한국인들이 가고 싶은 곳으로 하노이 다음으로 다낭을 꼽았다고 했다. 한국인들은 왜 이리 다낭을 좋아할까? 어느 베트남인 친구가 나에게 한 질문이다. 다낭은 베트남 중부의 주요 도시로 인구가 아주 많지 않고 거리도 깨끗해 쾌적한 느낌을 준다. 남으로 호이안, 북으로는 후에(Hue)로 연결돼, 각각 과거 번성했던 무역항과 마지막 왕조의 수도에 발을 딛고 그 분위기를 느껴볼 수 있다. 다낭의 서쪽에는 미선 유적지가 있어, 이 지역이 15세기 북부의 베트남에 복속되기 전까지 힌두교 문명을 일궜던 참파의 문화를 접해볼 수 있다. 1960년대 베트남전쟁 때 다낭은 남베트남 제2의 도시였다. 미국이 1965년 해병대를 상륙시킨 곳도 다낭이었다. 황석영이 베트남전쟁 소설 <무기의 그늘>을 쓰며 다낭을 배경으로 삼았다. 그의 소설에 등장하는 다낭의 여러 지역이 지금 실재하는지는 모르겠으나 찾아가 보고 싶기도 하다. 자, 이제 다낭과 호이안으로 들어가보자.
상인과 표류민이 거쳐 간 베트남
오래전 왕조시대에 동남아를 방문한 우리 선조들 가운데는 경전을 구하러 인도로 가는 구법승들이 있었다. 신라 승려 혜초가 723년 중국 남부 광저우를 떠나 바닷길로 인도에 도착했다. 오늘날 남중국해와 동남아 바다를 거쳐 갔을 것으로 추정한다. 당시 배가 그리 크지 않아 주로 연안으로 항행하다가 주변 항구에 기항했을 터인데, 그가 간 곳이 베트남 중부 어느 곳, 인도네시아 수마트라 섬 남부 팔렘방 등지였을 것이다. 혜초가 베트남 땅에 발을 디뎠는지는 알 수 없다.
17세기 말에는 조선인들이 표류해 호이안에 살다가 귀환한 일도 있었다. 옛날 한국인 표류민들 가운데 여러 사람이 일본이나 류큐에 표류했고 동남아까지 표류한 사람은 드물었다. 1801년 전남 신안군 우이도 출신 홍어 장수 문순득이 표류해 류큐에서 살다가 중국을 거쳐 돌아오는 길에 또 표류해 필리핀 루손 섬에 다녀온 적이 있었다. 베트남 호이안에 표착한 이들은 제주도민들이었다. 1687년 김태황(또는 김대황), 고상영 등 제주도 사람 24명이 임금께 진상하는 말을 싣고 가다가 추자도 앞바다에서 풍랑을 만나 표류했다. 이들 24명은 30일가량 표류한 끝에 안남의 어느 섬에 다다랐다. 그들이 섬 이름을 남기지 않아 확인할 수 없지만 다다른 곳은 호이안 앞바다에 있는 꾸라오짬(Cu Lao Cham 짬섬)이거나 호이안 앞바다 어느 작은 섬이었을 것이다. 그 앞 바다는 참파해(Champa Sea)라고 불리기도 했다. 이 지역이 베트남의 영토에 속하기 전 참파 왕국에 속했기에 붙여진 이름일 것이다.
호이안에 도착하다
17세기 말에 호이안에 표착한 제주도민들은 처음에 베트남인들로부터 살해 위협을 받았다. 조선인들이 안남 태자를 죽였기에 복수해야 한다고 했다는 것이다. 실제 이 일이 있었는지는 불확실하다. 오사카대학 박사 후보 조호연 선생은 조선인들이 이 이야기를 만들었을 것이라고 했다. 표류민들은 어느 부인의 도움으로 이로부터 벗어난 후 베트남인들로부터 환대를 받았다고 한다. 한국인 표류민들은 타고 갔던 배가 암초에 부딪혀 부서지자 호이안(Hoi An, 會安) 관청으로 이송돼 거기서 잠시 지내게 된다. 왕도인 푸쑤언(현 후에)을 다녀온 후에는 관우를 모신 사당 관왕묘에 머물게 된다. 이 지역은 이전에 참파의 영역에 속했는데 15세기 레 왕조 시기에 베트남에 복속된 후 16세기 중반 이래 응우옌 씨가 통치하고 있었다.
호이안은 중국과 동남아 간 무역로의 길목에 있었기에, 16세기 말부터 발전해 외국 상인들이 일찍부터 들락거리던 곳이다. 이곳은 17~18세기에 번성했다가 19세기에 쇠락의 길을 걸었다. 유럽인 가운데 동남아에 일찍 진출한 포르투갈 사람들은 호이안을 ‘파이포(Faifo)’라고 불렀다. 여러 설이 있지만, 호이안 중심에 ‘두 거리’가 있어 이를 베트남어로 ‘하이 포(hai pho)’라고 했는데 비슷하게 ‘파이포’로 적었다고 한다. 서양 상인들이 오기 오래 전부터 중국, 일본 상인들이 호이안에 자리잡았다. 17세기에 세워진 내원교를 중심으로 서쪽 거리는 일본인 상인들이 차지했고 동쪽 거리는 중국인 상인들로 가득 찼다. 이 다리는 일본인들이 세워서 일본교라고 불리기도 한다. 다리 가운데 절이 있어 ‘다리 절(Chua Cau, 교량 사원)’이라고도 불린다. 1636년 이래 일본이 해금정책을 펴면서 일본인 거리는 쇠락해갔다. 조선인 김태황 일행이 표류민이었기에 자유롭게 행동할 수 없어서, 호이안 거리 모습을 상세히 묘사하지는 못했다. 중심가인 현재의 쩐푸 거리를 걸었다는 기록은 없다. 오늘날 쩐푸 거리는 ‘쭈어꺼우 거리’였다가 프랑스 식민지 때 ‘일본교 거리(Rue de Pont Japonnais)’로 불렸고, 1975년 통일 이후에는 쩐푸 거리로 바뀌었다. 쩐푸는 베트남공산당 초대 총비서(서기장)였다.
1960년대 베트남전쟁 때 호이안은 한국군의 작전지역이었기에, 참전 군인들의 회고록에 가끔 등장하기도 한다. 격렬한 전투지역이었기에 한국군이 베트남 민간인을 학살했다고 여겨지는 곳이 여러 군데 있다. 그중 하미와 퐁니·퐁녓이 가장 잘 알려져 있다. 호이안 시내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이다. 하미 학살 사건은 권헌익 교수가 <학살 그 이후>에서 나쁜 죽음의 사례로 설명한다. 퐁니·퐁녓 학살 사건은 한겨레신문 고경태 기자가 수년간 추적해 <베트남전쟁 1968년 2월 12일>에 상세히 기록했다. 어두운 역사적 장소를 찾아가는 다크 투어리즘의 현장들이다.
호이안에서 다낭으로
역사적 비극의 장소를 뒤로 하고 북으로 향하면 다낭에 닿게 된다. 17세기 조선인 표류민들은 호이안에서 다낭을 거쳐 푸쑤언(현 후에) 궁성을 방문했다. 표류민들은 호이안으로부터 사흘을 걸어 푸쑤언에 당도했다. 호이안에서 후에로 가는 길은 다낭을 지나 하이번(Hai Van 海雲) 고개를 넘어야 한다. 당시 다낭은 발전된 도시가 아니었을 테니, 그들이 지나쳤을 수도 있다. 하이번 고개 정상에 오르면 언덕 위 ‘해운관(海雲關)’이라는 이름을 단 문을 올려다보게 된다. 지금도 몇 개의 벙커가 있는 걸 보면 군사적 요충지였음을 바로 알 수 있다.
호이안이 투본 강 하구에 토사가 쌓이며 교역항으로서 기능이 약화된 이후 다낭은 외국과의 교류 지점이었다. 다낭은 1954년 베트남이 남북으로 분단된 후 남베트남 제2의 도시였다. 분단 이후 곧이어 베트남전이 격화되면서 다낭은 외국군의 베트남 출입구가 됐다. 한국과의 인연도 만들어졌다. 황석영이 소설 <무기의 그늘>에서 안영규 상병을 다낭 합동수사대로 보내며 자본주의 시장이 지배하는 베트남전쟁의 본질을 드러내기 시작한다. 미군 PX에서 흘러나온 각종 물건들이 넘쳐나던 곳이 ‘도끄랍(Doc Lap 독럽)’ 거리와 ‘르 로이(Le Loi 레러이)’ 거리 사이의 뒷골목이었다. 현재 독럽 거리는 다른 이름으로 바뀌었지만, 레러이 거리는 그대로 있다. 이외에도 그때와 지금의 거리 모습은 많은 차이가 있을 것이다. 이처럼 다낭과 호이안이 역사적으로 한국과 인연이 있어 한국인들이 자신도 모르게 이 도시들에 친근감을 갖는지도 모르겠다. 한국인들은 옛 인연을 좇아 다낭과 호이안으로 달려간다.
필자 주요 약력
서강대 정치학박사, 서강대 동아연구소 및 대학원 동남아시아학 협동과정 교수 역임, 한국-베트남 현인그룹 위원 역임. 현 단국대 아시아중동학부 베트남학전공 초빙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