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해가 시작될 무렵에는 정암(鼎巖·솥바위, 경남 의령)을 찾는 사람이 평소보다 많다. 솥바위를 중심으로 반경 20리 안에 나라에서 내로라하는 부자를 배출한다는 전설을 지닌 바위다. 그 전설 덕분인지 정암을 중심으로 한국 재벌가인 삼성, 효성, 금성(LG.GS 전신) 집안 본생가(本生家)가 삼각형을 이루면서 자리 잡았다. 전설이 전설이 아니라 눈앞의 현실로 나타난 것이다. 전설이 현실이 될 때는 설득력을 가진다. 설득력 있는 장소는 명소가 되고 명소는 사람을 부르게 마련이다.
심리적으로 잠재적 솥바위 신도인 현대인들을 불러 모으는 정암을 찾았다. 새해가 되면 꼭 참배해야 하는 ‘기(氣) 충전소’임을 이미 알 만한 사람은 모두 알고 있다. 지자체는 아예 ‘대한민국 부자일번지’를 표방하고 있다. 포토존 의자에는 ‘함께 부자가 되자’고 하면서 ‘富(부)’ ‘Rich(리치)’ 등 한문과 영어를 병기하여 구세대는 물론 신세대까지 동시에 불러 모으고 있다.
솥바위는 남강 가운데 우뚝하게 자리 잡았다. 풍수학자들은 물은 재물을 상징한다고 했다. 재물이 바위에 걸리면서 천천히 흐른다. 자연스럽게 재물이 쌓이는 구조다. 그런 바위를 나성(羅星)이라고 한다. 세 부자 집안 기업의 공통 상호인 ‘성(星)’자가 여기에서 비롯되었음을 짐작케 한다. 요즘만 그랬던 것이 아니다. 예부터 정암진 나루터는 남해와 낙동강을 따라 온 물자들이 서부경남 내륙으로 들어가는 물류의 거점이었다. 근대에도 철교가 놓일 만큼 교통요지로서 위상도 만만찮았다.
먼저 전경을 살피고자 언덕 위에 있는 정자인 정암루(鼎巖樓)에 올랐다. 안내문에는 빼어난 경치로 인해 많은 선비와 가객들이 찾아 학문을 논하고 자연을 노래했다고 적혀 있다. 함안 가산(家山) 기슭에 무덤이 있다는 어변갑(魚變甲·1381~1435) 선생이 누각에서 주변 풍광을 노래한 시가 남아 있다. 그는 집현전 직제학(直提學)을 지낸 조선 초기 문신이다.
춘수정암횡련벽(春水鼎巖橫練碧)이요
춘풍자굴전병신(春風闍堀展屛新)이라.
봄날 흐르는 솥바위의 강물은 비단을 펼친 듯 푸르고
가을바람 부는 자굴산은 병풍을 펼친 듯 새롭네.
그 시에 자굴산(闍堀山)이 나온다. 인도 마갈타국 수도 왕사성 동북쪽에 있는 기사굴산(耆闍崛山)에서 비롯된 이름이다. ‘闍’는 ‘사’ 혹은 ‘자’로 읽는다. 보통 사굴산(강릉 굴산사 당간지주가 있는 산)이라고 하는데 이 지역에서는 자굴산이라고 부른다. 어쨋거나 사굴이건 자굴이건 모두 인도말 ‘기자쿠타(gijjha-kuta)’의 소리번역이다. 원문 발음대로라면 ‘사’보다는 ‘자’로 읽는 게 맞겠다. 하지만 자굴산보다는 사굴산으로 읽는 것이 모두에게 익숙한 편이다. 결국 문법은 많이 쓰는 사람 편이 될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특정 지역사회에서 읽어왔던 관례는 존중되어야 한다.
기사굴산은 붓다께서 머물면서 설법하던 곳으로 세계적인 불교성지다. 법화경은 서두에 기사굴산에서 설했다는 말로 시작된다. 산봉우리가 독수리와 닮았다고 하여 영취산(靈鷲山·영축산)으로 부른다. 소리번역이 아니라 뜻번역이다. 전남 여수 등 전국 몇 곳에 영취산이 있다. 양산 통도사가 자리하고 있는 산은 한문으로 같은 표기를 함에도 불구하고 ‘영축산’으로 읽는다. 이 또한 지역사회의 읽기 관례는 마땅히 존중받아야 한다. 함안은 아라가야에 속하는 가야문화권이다. 고구려, 신라, 백제가 중국을 통해 불교를 받아들인 데 반하여 가야불교는 허황후와 장유화상에 의해 인도에서 직수입됐다. 남쪽 지방에 있는 산 이름에도 그런 흔적들이 남아 있다고 하겠다.
논어에는 ‘지자요수(智者樂水) 인자요산(仁者樂山)'이라고 했다. 지혜로운 사람은 물을 좋아하고 어진 사람은 산을 좋아한다는 말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산 따로 물 따로’는 아니다. 늘 함께한다. 그래서 묶어서 요산요수(樂山樂水)라고 한다. 산은 인물을 키워주고 물은 재물을 늘려준다고 했다. 솥바위에서 진주 방향으로 구씨(LG)와 허씨(GS) 집안이 대대로 함께 살고 있는 승산(勝山)마을이 있다. 행정구역은 ‘지수(智水)면 승산(勝山)리’다. 산이름과 물이름이 함께 어우러진 명당마을이라 하겠다.
승산마을 골목길을 찾는 사람들 사이에 끼여 마을길을 함께 걸었다. 600년 전통의 부자마을 허씨와 구씨 집성촌답게 숫자를 헤아릴 수 없는 번듯한 기와집이 동네 전체에 빼곡하다. 한양의 명문세도가들 사이에서도 ‘진주는 몰라도 승산은 안다’고 할 만큼 조선시대에도 큰 관심을 받은 동네라고 했다. 좋은 기운은 많이 받을수록 좋다고 하였으니 계속 동네 골목길을 어슬렁거리면서 거듭 두어 바퀴 걸었다.
원철 필자 주요 이력
▷조계종 불학연구소 소장 ▷조계종 포교연구실 실장 ▷해인사 승가대학 학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