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치용의 비욘드 ESG] 미국 역차별 반발에 뒷걸음질? 시험대 오른 소수자 포용 정책

2024-02-23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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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치용 아주대 융합ESG학과 특임교수
[안치용 아주대 융합ESG학과 특임교수]



미국에서 다양성·형평성·포용성(DEI) 정책이 뒷걸음하고 있다. 소수자 우대 정책에 백인 역차별 논란이 제기되면서 DEI 정책에 대한 미국 보수층의 반발이 실제 법제화로 이어지는 분위기다.
뉴욕타임스(NYT)는 스펜서 콕스 미국 유타주(州) 주지사가 지난 2월 1일 주의회가 송부한 DEI 정책 금지법에 서명했다고 이날 보도했다. 콕스 주지사가 서명한 법안은 공립 교육기관과 주 공공기관에서 DEI 정책을 없애는 것을 골자로 한다. 당장 공공기관의 각종 프로그램에 다양성, 형평성, 포용성이라는 단어를 사용할 수 없게 된다. 능력 중심으로 사람을 평가하는 것을 인종차별이나 성차별로 매도하는 것도 금지된다. 교육기관이 일부 소수인종 학생을 선별적으로 지원하는 대신 모든 학생을 대상으로 관련 서비스를 제공해야 한다.
이러한 반(反)DEI 움직임이 유타주에서만 있는 건 아니다. NYT는 지난해부터 미국 내에서 DEI 정책을 금지하려는 움직임이 확산하고 있다고 전했다. 유타를 포함해 텍사스, 노스다코타, 노스캐롤라이나 등 8개 주에서 DEI 금지법이 제정됐다.
텍사스주에서는 올해 들어 DEI 금지법이 발효됐다. 이에 따라 텍사스 내 공공기관은 소수인종을 우대하거나 다양성을 촉진하는 방향으로 인력을 채용하거나 특혜를 줄 수 없게 됐다. 텍사스주립대는 교내에 설치된 ‘다문화촉진센터’를 폐쇄하고, 졸업식 행사에서 흑인·히스패닉·아시아계 학생을 위한 별도의 이벤트에 자금을 대는 것도 중단했다. 테네시주의 DEI 금지법에는 공립대학이 교직원에게 편견 해소를 위한 의무교육을 실시하는 것을 금지하는 내용이 담겼다.
미국 보수층이 DEI를 백인에 대한 역차별로 판단해 대놓고 조직적인 반대 운동을 벌이면서 보수색이 짙은 지역을 중심으로 DEI를 폐기하는 법제화가 실제로 이뤄지고 있다고 NYT는 분석했다. 미국에서 8번째로 DEI 금지법이 발효된 유타주는 대표적인 보수 우세 지역이다.


 
사진게티이미지뱅크
사진=게티이미지뱅크



▲DEI란?=DEI는 서로 밀접하게 연결된 다양성(Diversity), 형평성(Equity), 포용성(Inclusion)이란 세 가치를 한꺼번에 부르는 말이다. 다양성은 인구학적 다양성을 포함해 다양한 배경을 가진 구성원이 공존하게 하는 것이다. 다양한 배경이란 인종, 성, 종교, 성적 취향, 사회경제적 지위, 언어, 장애, 종교적 신념, 정치적 관점에 이르기까지 매우 다양하다. 구성원 사이의 관계와 상호작용에 영향을 미치는 실재하거나 인식된 차이이다. AT&T, 구글, 3M, 러쉬 등 주요 글로벌 기업이 매년 다양성 보고서를 발표하여 조직원 다양성 비율을 공개한다. 미국에서는 인종이 상대적으로 중요한 다양한 가치로 받아들여진다. 그만큼 인종차별이 여전하다는 뜻이기도 하다.
공정성으로도 번역하는 형평성은 제도나 시스템을 통한 절차나 분배가 공정하게 이루어져야 한다는 뜻으로 존 롤즈의 ‘공정으로서의 정의’를 연상시킨다. 평등(Equality)이 구성원에게 자원을 균등하게 배분하자는 이념인 반면 공정은 구성원 사이에 격차가 있음을 인정하고 장애인, 고졸채용자, 비정규직노동자 등 비주류 구성원도 균등한 기회를 얻을 수 있도록 적절한 발판을 마련해야 한다는 개념이다. 불가피하게 불평등을 용인해야 한다면 어떤 기준을 따라야 하는지에 관한 원칙으로, 가장 불우한 사람의 편익을 최대화해야 한다는 롤즈의 ‘최소극대화(maximin) 원칙’에 맞닿아 있다.
포용성은 다양한 특성을 가진 개인이 조직에서 ‘다름’을 존중받고, ‘심리적 안전감’을 느끼며 일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용어 자체로는 배제(exclusion)의 반대말로, ‘조직 내에서 자신의 생각을 솔직하게 말해도 피해가 생기지 않을 것이라고 느끼는’ 심리적 안전감을 토대로 구성원이 가진 ‘다름’을 솔직하게 드러낼 수 있도록 하고, 서로 존중하고 배려하여, 예컨대 기업이라면 생산성을 높이는 게 포용성의 핵심이 된다. 소극적 의미로는 일상생활에서 흑인, 동양인, 동성애자 등 소수자를 차별하는 마이크로어그레션(microaggression)이 원천 배제된 상황이 출발점일 수 있다. 마이크로어그레션은 ‘아주 작은’이라는 뜻의 마이크로(micro)와 ‘공격’이라는 뜻의 어그레션(aggression)의 합성어로, 예를 들어 식당에서 같이 앉는 것을 피하는 행동과 같은 일상 속의 차별을 통해 상대에게 모욕감이나 적대감을 표현하는 것이 마이크로어그레션에 해당한다.

▲정의 혹은 생산성=이 세 가지 가치는 서로 긴밀하게 연결되어 따로 떼어서 설명하기 어려울 수도 있다. 다양성이 형평성과 포용성이란 가치가 만들어낸 결과일 수 있지만, 다양성 없이 형평성과 포용성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다양성과 형평성이 개념상 구분이 있지만 현실에서 겹치는 측면이 존재하는 것이 사실이어서, DEI를 I&D(포용성과 다양성, Inclusion & Diversity)로 줄여 쓰기도 한다. 반대로 세부적으로 더 구분해 소속감(belonging)의 B를 추가한 DEIB, DEIB에 접근성(accessibility)의 A를 더하여 DEIAB라는 용어를 개발해 쓰기도 하나 결국 DEI를 더 잘 설명하기 위한 방법론이다.
경영학에서는 DEI와 기업 생산성에 관한 연구가 이루어져 DEI가 기업 생산성 향상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친다는 결과가 많이 보고돼 있다. 생산성을 논외로 하고, 공정으로서 정의처럼 DEI를 그 자체로 보편적 가치로 보아야 한다는 의견도 있다. 기업에서 대체로 정의를 다루지는 않을 것이니 말이다.
정의 대신 수익성에 신경을 쓰는 기업에서 지속가능경영과 ESG경영 흐름에 따라 지속가능성 임원 등 과거에 없던 직제가 생겨나는 가운데 SAP에서는 ‘Global Head of People Sustainability & Chief Diversity and Inclusion Officer’란 직함이 목격된다. I&D를 D&I로 바꿔서 다양성과 형평성을 다루는 임원인 CD&IO를 CEO나 CFO처럼 만든 것인데, 글로벌 기업인 만큼 여기에 ‘People Sustainability’를 추가해 포괄적으로 이 부문을 책임지게 했다. 글로벌 기업에는 이러한 기능을 수행하는 유사한 직제가 많이 생겼다.
미국과 유럽에서 DEI가 조금 더 복잡하고 섬세하다면 한국에서 DEI는 주로 여성에 초점이 맞춰진다. 인종 문제가 상대적으로 덜하다고 판단하거나 이 문제에 중요성을 부여하지 않기 때문일 수 있으며, 동성애나 다른 소수자 문제는 아직 대면할 여건이 안 됐다고 외면하는 상황인 것으로 보인다. 한국사회에서 젠더 의제는 비교적 공론화한 상태이고 성차별 해소에 관한 압력이나 공감대가 어느 정도 형성된 상태여서 일종의 여성할당제가 여러 분야에서 확산하고 있다.
ESG에 신경을 많이 쓰는 것으로 알려진 국내 유수 대기업에 근무하는 30대 중반의 여성 중간간부 박 아무개 과장은 “확실히 사내 분위기가 여성을 우대하는 쪽으로 자리를 잡은 것은 맞다”고 말했다. 이화여대 경영전문대학원에서는 ‘여성 사외이사 전문과정’을 만들어 지금 7기를 모집 중이다. 홍보문안에 “개정된 자본시장법에 따라 자산 총액 2조원 이상의 상장사는 여성 이사를 1명 이상 선임해야 한다”고 적시하며 “각계의 경륜 있는 여성리더를 위한 전문 교육이 그 어느 때보다 중요한 시점”이라고 밝혔다.
이화여대의 ‘여성 사외이사 전문과정’이 성공적으로 운영되는 모습을 두고 여성인 어느 교수는 양가적인 감정을 느낀다고 말했다. 그는 “물 들어올 때 노 저어라는 식의 대응이 오랫동안 사회적 약자로 차별받은 여성에게 나쁜 전략일 수는 없지만, 실력이 아니라 배려로 어떤 지위에 오르려는 여성이 있는 것이 사실이고 또 실제로 실력 있는 여성까지 도매금으로 묻어가기도 해 씁쓸할 때도 있다”고 말했다. 박 과장도 “사내에서 남성 입사 동기들이 대놓고 말은 안 하지만, 불이익을 당한다고 인식하는 듯하며, 여성으로 어느 정도 두각을 나타내면 비슷한 역량의 남성에 비해 유리한 것이 사실”이라고 말했다.
DEI가 자리잡은 지 오래인 미국에서는 인종·여성할당제에 대해 능력주의를 도태시켜 미국 사회를 자기해체의 길을 걷게 한다는 반발이 백인 보수층을 중심으로 터져 나온다. 특히 소수자 우대 정책을 펴는 미국 일부 명문대학을 두고는 학문적 자살을 감행한다는 비난 공세를 퍼붓는다. 유타주를 포함하여 8개주에서 DEI 금지법이 제정된 것은 이런 분위기에 힘입었다.
영국 런던에 본사를 둔 프라이스워터하우스쿠퍼스(PwC)는 지난 1월 미국 내 사무소들의 인턴십·장학금 관련 흑인 우대 정책을 폐기하고, 미국의 가난한 백인 학생들에게도 인턴십과 장학금 기회를 열어주었다. PwC 외에 화이자 등 일부 미국 기업들이 회사의 흑인 우대 제도를 손본 것으로 전해진다.

▲정의는 생산적이다=PwC의 정책변화는 유타주의 사례와는 결을 달리한다. DEI를 폐기한 것이 아니라 조정한 것이기 때문이다. 다양성과 포용의 기준으로 인종 대신 가난을 택한 것이므로 어느 정도 논리적 타당성을 갖고 공정으로서 정의에도 부합한다.
핵심은 DEI가 공시적 관점의 정책이 아니라는 점이다. 능력주의를 획일적 평등의 관점에서 적용하면 소수자는 주류사회에 진입할 기회를 잡지 못한다. 주류사회에 진입하여 성장하는 과정과 재생산을 통해 역량을 키울 수 있기에 역량을 키울 기회 자체가 없는 모습의 진입장벽 존재는, 능력주의를 인정하더라도 능력주의의 올바른 바탕이라고 할 수 없다. 따라서 DEI를 통시적 관점에서 파악하여 능력을 키울 여건이 평등하게 제공되었나를 보면서 능력주의를 적용해야 한다. 필요하다면 PwC처럼 DEI 정책 내에서 수혜 대상을 조정하는 것이 필요하다.
과도적으로 한때 역차별이 일어나고 반대로 과도한 특혜를 받는 계층이나 집단, 계급이 있을 수는 있다. 과거에 받은 차별이 현재에 해소되는 과정에서 일어나는 불가피한 현상으로, 어느 정도 강압적 조정 없이 새로운 노멀이 만들어지지는 않는다. ‘최소극대화(maximin) 원칙’은 인간 사회를 문명사회로 지탱하는 근간이라는 사실을 다시 확인해야 한다. 공시적 비효율을 감내하는 그런 통시적 조정 과정을 거쳐 사회는 전체의 역량과 생산성을 키운다. 정의는 장기적으로 생산적이다.



안치용 필자 주요 이력
 
△ESG연구소 소장 △아주대 융합ESG학과 특임교수 △전 경향신문 사회책임 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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