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트남이 본격적으로 외국인 투자를 유치하기 시작한 지 35년이 흘렀다. 이제 베트남은 그간 노동집약적 산업 중심의 외국인 투자에서 한 발 더 나아가 반도체 등 첨단 산업으로 투자 유치 영역을 확대하고 있다. 베트남이 세계 4차 산업 혁명에 동참할 수 있는 역사적 기회를 맞고 있다.
작년 12월 미국 인공지능(AI) 반도체 선두업체인 엔비디아의 젠슨 황 사장이 베트남을 찾았다.
황 사장은 응우옌 찌 중 베트남 계획투자부 장관 및 베트남 기술 기업들과 함께한 간담회에서 “팜 민 찐 총리를 만나 베트남을 엔비디아의 제2의 고향으로 만드는 데 최선을 다하겠다고 말했다”며 “베트남에 법인을 설립하겠다”고 밝혔다.
이번 간담회는 지역과 세계의 연구·개발(R&D) 센터이자 베트남 반도체 산업의 중심지가 될 것으로 기대되는 베트남 국가혁신센터(NIC)에서 열렸다. 중 장관은 엔비디아가 NIC에 기지를 설립하기를 희망한다고 밝히며 베트남에서의 반도체 및 AI 투자 프로젝트의 연구를 요청했다. 동시에 베트남의 NIC 및 하이테크단지에서 반도체 제품 설계 및 개발을 위한 엔비디아의 R&D 센터 건설도 요청했다.
황 사장의 베트남 방문은 작년 9월 있었던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의 베트남 국빈 방문의 연장선상에서 볼 수 있다. 당시 미국은 베트남과 반도체 부문 협력에 합의하면서, 베트남의 반도체 산업 발전을 집중 지원하기로 했다.
바이든 대통령의 베트남 방문 이후 불과 며칠 뒤, 찐 총리가 유엔 총회 고위급 주간 참석 차 미국을 방문했다. 당시 찐 총리는 엔비디아 본사를 방문해 황 사장을 베트남으로 초청했고, 이후 3개월도 채 되지 않아 황 사장이 베트남을 찾아 AI와 반도체 분야에서 베트남과 협력하는 새로운 장을 연 것이다.
이외에도 지난 달 초, 중 장관은 미국반도체산업협회(SIA) 존 노이퍼(John Neuffer) 회장을 비롯해 인텔, 퀄컴에서 앙페르(Ampere), ARM, 시놉시스, 인피니언, 마벨 등에 이르기까지 미국 반도체 및 하이테크 유수 기업들과 만남을 가졌다. 여기서 주요 글로벌 반도체업체들은 너나 할 것 없이 베트남에 대한 관심과 투자 의지를 표명했다.
존 노이퍼 회장은 "베트남이 글로벌 반도체 공급망에서 입지를 넓힐 수 있는 엄청난 기회를 보고 있다"며 미국 현지 기업들과 SIA 회원들이 베트남에 많은 투자를 했다고 말했다. 가까운 미래에는 베트남에 투자를 두 배로 늘리는 기업도 나올 것이라고 설명했다.
미국 반도체 설계기업 마벨 베트남 법인의 레 꽝 담(Le Quang Dam) 대표는 "멀리 가려면 함께 가야 하며, 마벨의 소망은 베트남의 반도체 산업과 회로 설계 발전을 위해 협력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마벨은 최근 호찌민시에 IC 디자인 센터 설립을 발표했다. 호찌민시와 향후 3~5년 내에 베트남의 인적 자원 양성을 위해 적극적으로 노력하고 있다.
한국 기업들 역시 일찌감치 베트남에 발을 들여놓기 시작했다. 현재까지 베트남에 200억 달러를 투자한 삼성을 비롯해 현대, LG, SK, 롯데 등 주요 대기업들이 속속 베트남으로 향했다.
글로벌 부동산 서비스 기업 세빌스의 크리스토퍼 메리어트 동남아시아 총책임자는 선도적인 기술 기업들이 베트남에 투자하는 것을 좋아하며 베트남이 국제 투자자들의 기대에 부응하는 높은 생산 능력을 갖춘 뛰어난 목적지 중 하나로 간주되고 있다고 설명했다.
이처럼 세계 첨단 기업들이 베트남에 관심을 갖고 투자를 하고 있는 것은 35년 전에는 전혀 상상하지 못했던 모습이다. 전 세계가 산업 시설, 그중에서도 반도체 등 첨단 산업 시설 유치에 사활을 걸고 있는 가운데 베트남은 그 경쟁에서 두각을 나타내면서 세계적인 성공 사례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이는 1987년 12월 베트남이 '도이머이(Đổi mới, 혁신)'라고 불리는 외국인 투자에 관한 법률을 공포한 역사적인 결정에서 비롯되었다. 베트남 전쟁 이후 경제적 어려움에 처해 있던 베트남은 경제 측면에서 공산주의 일변도 정책을 탈피, 시장경제 요소를 받아들이기로 하면서 대외 개방 및 개혁을 강력 추진했고, 외자 유치에 적극적으로 나섰다.
대내적으로도 토지법, 기업법 등 각종 제도를 정비해 민간 경제 부문의 성장 환경을 조성했다. 그 결과 베트남으로 외국 기업들의 자본이 점차 몰려들기 시작했고, 이는 경제 고속 성장이라는 결과로 나타났다.
이후 베트남은 2010년대 들어 외국인 투자 유치에 있어 새로운 접근 방법을 시도했다. 이는 섬유, 의류 등 노동집약적 산업에 집중되어 있던 베트남의 산업 구조를 한층 업그레이드시키기 위함이었다.
2018년 10월, 응우옌 쑤언 푹 당시 총리는 외국인 투자 유치 30년을 요약하면서 외국인 투자 유치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언급했다. 단순한 자본 유치를 넘어 외국인 투자자와 ‘협력’한다는 내용이었다. 베트남은 투자자와 기업이 가져온 자본원의 수혜자가 될 뿐만 아니라 평등과 선택의 원칙에 따라 적극적으로 협력하여 생산 수준을 높이고 국가 경제의 자율성을 향상시켜 외국인 투자 자원이 경제적, 사회적, 환경적 관점에서 투자자, 국가 및 경제 모두에게 이익이 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는 2030년까지 외국인 투자 협력의 품질과 효율성을 향상시키기 위한 완벽한 제도와 정책 방향에 관한 베트남 정치국 50호 결의안을 통해 그 방향이 구체화되었다. 첨단 기술, 원천 기술, 4차 산업 분야에 대한 투자 유치가 명확하게 명시되어 있다. 이는 2018년 이후 베트남이 외국인 투자 유치에 큰 성공을 거둔 중요한 전환점이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자본의 양뿐만 아니라 베트남의 외국인 투자 자원이 첨단 기술 분야를 대상으로 큰 변화를 이루어 베트남을 가치 사슬의 더 높은 수준으로 끌어올렸다는 것이다.
물론 미·중 경쟁 국면 속에서 베트남의 지정학적 위치가 부각되며 수혜를 받고 있는 부분도 있지만 이미 그 전부터 외자 유치를 위해 꾸준히 노력해온 점이 빛을 보고 있는 것이다.
SIA의 존 노이퍼 회장은 “베트남은 글로벌 공급망에서 중요한 연결고리가 될 수 있는 능력을 입증했다”고 강조했다.
베트남의 외국인 투자 유치 노력은 제도적 측면에서만 그치지 않았다. 베트남은 투자 유치를 위해 '호랑이 굴'로 직접 들어가는 용기를 보여줬다.
최근 몇 년 동안 중 계획투자부 장관은 계속해서 ‘호랑이 굴’을 방문했다. 장관은 “국가들은 매우 치열한 경쟁을 벌이고 있어 변화하는 투자 자본 흐름을 잡기 위해 베트남은 각 투자자, 각 프로젝트와 '싸움'을 하고, 투자 촉진 방식을 바꾸고, 그들이 조기 투자 결정을 내리도록 촉구하고 동기를 부여해야 한다”며 “그렇지 않으면 기회를 잃게 된다”고 말했다.
중 장관뿐만 아니라 베트남 지도자들은 해외 출장에서 항상 외국 투자자들에게 베트남에 투자하도록 회의, 간담회 등 각종 행사를 개최했다. 응우옌 딘 꿍(Nguyen Dinh Cung) 전 베트남 중앙경제관리연구소(CIEM) 소장은 "현재 투자 유치 경쟁이 벌어지고 있는 상황에서 투자자 유치를 위해서는 투자자들의 '본부'로 가야 한다"고 말했다.
베트남의 노력, 결단력, 선의는 투자자들의 신뢰를 얻었다. 2021년 베트남에 공장 건설을 발표한 세계적 완구업체 레고(LEGO)의 닐스 크리스티안센(Niels B. Christiansen) CEO는 "레고가 지속 가능한 발전에 대한 베트남 정부의 강력한 의지와 무역 관계, 국제 통합 때문에 베트남을 선택했다”며 “베트남이 매우 좋다”고 말했다.
베트남이 레고의 13억 달러 규모 프로젝트를 성공적으로 유치한 것은 베트남 총리와 부총리가 투자처 발굴에 직접 나선 것이 크게 작용했다고 현지 매체들은 전했다. 정부 지도자들과 레고 CEO 사이에 직접 전화 통화가 있었다. 영국에서 열린 유엔기후변화협약 당사국총회(COP26)에서 찐 총리는 레고 경영진들을 만나 투자를 요청하기도 했다.
모든 국가의 국경이 폐쇄되고 모든 항공편이 중단됐던 코로나19 기간 동안에도 베트남은 온라인으로 '호랑이들과의 게임'을 지속됐다. 애플, SK 등 대기업과 반도체업계 거물들과 함께 온라인 미팅이 지속적으로 이루어졌다.
미국 반도체 기업 앰코의 16억 달러 규모 반도체 프로젝트는 해당 기간 동안 만들어진 결과물이다. 2021년 8월, 앰코는 베트남 당국에 기업의 고위 전문가들이 와서 일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해 줄 것을 요청하는 서한을 보냈다. 당시 앰코 실무팀은 계획투자부의 지원으로 비자를 취득해 베트남으로 편리하게 입국해 투자 기회를 찾고, 베트남 북부지역 프로젝트 시행을 위한 협약을 논의 및 체결할 수 있었다. 그 결과, 2년 후 앰코 공장이 가동되기 시작했다.
지난 35년 동안 베트남의 외국인 투자 유치 정책이 성공을 거두었지만 그럼에도 과제는 남아 있다. 그중에서도 중요 과제로 꼽히는 것은 제조 시설을 넘어 연구 시설의 유치이다. 이는 여러 제반 환경의 질적 상승을 필요로 한다.
쩐 주이 동(Tran Duy Dong) 계획투자부 차관은 "많은 프로젝트의 기술이 평균 수준에 불과할 뿐만 아니라 더 중요한 것은 R&D에 투자하는 외국인 투자자의 비율이 여전히 제한적"이라고 밝혔다. 최근 베트남으로의 기술 이전 목표는 기대만큼 달성되지 못하고 있다. 외국인 투자 기업에서 국내 기업으로의 기술 확산은 아직 국가의 향후 발전 요구 사항을 충족시키지 못했다.
베트남 과학기술부 보고에 따르면, 2018년 7월부터 2022년 말까지 체결된 외국인투자기업 기술이전 계약 400건 중 대부분이 모기업과 자회사 간이며, 국내 기업과의 기술이전 계약은 없다. 또한 전 세계적으로 100개 이상의 대규모 다국적 기업이 베트남에 투자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하노이의 대규모 R&D 센터에 투자하는 기업은 삼성과 LG 두 기업뿐이다.
이러한 현실은 기회는 많지만 베트남이 AI, 반도체 등 분야에 투자를 유치하기 위해 ‘큰 물’에서 놀기는 쉽지 않다는 것을 보여준다.
꿍 전 소장은 외국인 투자가 베트남의 가치 사슬을 높일 수 있는 '만능 열쇠'가 아니라며, 외부 투자 유치와 함께 내부 사업을 육성해야 경제가 '날아오를 수' 있다고 강조했다.
중 장관은 NIC 개장 행사에서 "이것은 초기 결과일 뿐이며 앞으로의 혁신 여정에는 여전히 많은 어려움과 과제, 실제 상황에 따른 새로운 요구 사항이 존재한다”고 말했다.
따라서 베트남은 '호랑이'를 유인하고 유치하는 것을 넘어, 그들이 와서 머물고 집을 짓고 뿌리를 내리고 국내 산업과 함께 베트남의 발전을 가속화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베트남 매체들은 짚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