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는 이제 과학기술이 국가의 명운을 좌우하는 시대다. 기업의 성패가 기술에 달려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미국과 중국 간 세계 패권을 건 서로 물러설 수 없는 승부도 무역 전쟁에서 기술 전쟁으로 확대되고 있다. 세계의 관심이 몰렸던 지난달 샌프란시스코 미·중 정상회담에서도 기술 패권은 절대 양보할 수 없는 분야임을 재확인했다. 게다가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이스라엘‧하마스 전쟁 등 세계적 갈등이 격화되면서 수십년간 지속된 평화 시대가 끝나고 신냉전 시대가 가속되고 있다. 중국의 대만 침공 가능성이 공공연히 거론되고 북한의 핵도발이 지속되는 등 한반도와 동아시아의 불안도 커지고 있는 가운데 과학기술은 경제는 물론 국가 안보와도 직결되며 그 중요성이 어느 때보다 높아지고 있다. 대만이 중국의 무력접수 의지를 잘 차단하고 있는 것은 대만의 자체 군사적 방어능력도 있지만 세계 1위 반도체 파운드리 기업인 TSMC의 역할이 절대적이다. 대만이 중국의 영토가 되거나 침공 과정에서 TSMC에 문제가 생기면 미국 굴지의 반도체 기업들이 결정적 타격을 받게 되기 때문이다. 미국에게는 세계 패권의 아킬레스건인 셈이다. 따라서 미국은 중국에 공개적으로 대만 침공은 꿈도 꾸지 말라고 경고하며 대만 방어에 총력을 기울이고 있다. TSMC가 나라를 지키는 ‘호국신산(護國神山)’이라 불리는 이유다.
현재 내년 정부 R&D(연구개발) 예산을 둘러싼 많은 논란이 있다. 정부와 국회 간 원만한 합의점 도출을 기대하지만 이렇듯 중차대한 과학기술 혁신을 위한 우리 정책 방향에 대해 근본적 재점검과 국가적 공감대 형성의 계기가 되길 바란다. 우리 정부도 과학기술의 중요성은 당연히 공감하고 있으나 정부 부채 급증과 세수 감소 여파로 긴축 재정이 불가피함을 강조하며 확대일로에 있는 정부 R&D 예산의 효율화를 요구하고 있다. 반면에 미국, 일본, 독일 등 세계 선도국이 최근 정부 R&D 예산을 대폭 증가시키고 있는 상황에서 우리나라도 경쟁에 뒤떨어지지 않으려면 R&D 예산을 늘려야 한다는 의견도 팽팽히 맞서고 있다. 보는 관점에 따라 양측의 의견이 모두 일리가 있기 때문에 반목과 대결보다는 협의를 통해 최적의 대안을 찾아야 할 것이다.
우리가 이 과정에서 주목해야 할 대목은 세계적으로 미션(Mission) 중심의 R&D 패러다임이 크게 부각되고 있다는 점이다. 여기서 미션이란 원하는 기술을 개발하는 기술 관점의 미션이 아니라 사회 문제를 해결하거나 사회 및 인류의 비전을 실현하는 사회 관점, 더 나아가 ‘사회적 거대 도전과제(Grand Challenge)’ 관점의 미션을 의미한다. 임무 중심이라 불리기도 하는 미션 중심 R&D의 대표적 현재 사례로 미국, EU(유럽연합) 등 선도국이 추진하고 있는 기후위기 극복을 위한 탄소중립 실현, 플라스틱 없는 해양 실현, 암 정복을 위한 ‘Cancer Moonshot’, 구글의 ‘인간 500세’ 프로젝트 등이 있다. 이러한 ‘사회적 거대 도전과제’ 관점의 미션을 달성하려면 많은 다양한 기술 개발 및 혁신이 요구된다. 기술 혁신 그 자체보다 기술 혁신의 궁극적 목적을 중요시하면서 기술을 위한 기술 혁신이 아니라 사회와 인류를 위한 기술 혁신이어야 한다는 의미다.
우리나라 정부 R&D는 대체로 기술 중심으로 편성되어 있는데 미션 중심의 R&D로 패러다임을 전환할 필요가 있다. 우리나라의 성공 비결인 ‘빠른 추격자(Fast Follower)’ 전략을 가능하게 했던 투입 노동 및 자본의 효율성이 약화되면서 ‘시장 선도자(First Mover)’ 전략으로의 전환이 시급히 요구되고 있다. 미션 중심의 R&D가 바로 이 전환의 핵심이다. ‘빠른 추격자’ 전략은 추격해야 할 목표가 존재하기에 기술 중심의 R&D로 가능하지만, ‘시장 선도자’ 전략은 인류와 사회가 나아가야 할 목표 및 목적을 새롭게 제시하는 미션 중심의 R&D가 필수적이다.
이를 위해서는 우리 R&D 정책의 전면적 개편이 시급하다. 기업은 환경이 바뀌면 전략을 바꾸고 새로운 전략에 맞게 조직과 사람을 바꾸는 것이 기본이다. 정부 정책도 마찬가지로 바뀌어야 한다. ‘시장 선도자’ 전략에 맞게 정책을 혁신하고 조직 및 사람을 혁신해야 한다.
정책 혁신에 있어서 ‘빠른 추격자’ 전략의 핵심인 투입 대비 성과를 여전히 중시하는 효율성 중심의 정책에서 속히 탈피해야 한다. 수행한 R&D 과제 중 ‘몇 개 과제가 성공하느냐’와 같은 효율성 중심 정책에서 단 한 개라도 ‘사회적 거대 도전과제’를 성공시키는 것을 중요시하는 효과성 및 혁신성 중심 정책으로 전환해야 한다.
조직 혁신에 있어서는 정부 출연 연구원과 같은 기존의 기술 중심 조직에 새로운 미션 중심 조직을 혼합하는 매트릭스 조직체계의 도입 및 확대를 추진할 필요가 있다. 국가과학기술연구회가 10년 가까이 추진해 오고 있는 융합연구단 등 융합연구사업이 좋은 미션 중심 R&D 사례로 지속 발전 및 고도화가 필요하다. R&D 조직의 혁신에는 연구개발 인력에 대한 인사평가 제도의 혁신도 중요한 성공요소이다. 기술과 미션이 혼합된 매트릭스 조직이 어려운 이유가 인사평가 제도의 미비에 기인하는 경우가 많다.
이 과정에서 정부 출연 연구원들 가운데 과학기술 부문과 경제‧인문‧사회 부문이 서로 지휘체계가 다르고 협력이 활발하지 않은 점은 시급히 해결되어야 할 과제이다. 미션 중심 R&D는 인간과 사회가 직면한 거대 문제나 지향해야 할 비전 및 방향을 설정하는 것이 시작이기 때문에 과학기술계만이 아니라 경제, 인문, 사회 등 다양한 분야의 참여와 협력이 활발하도록 조직 혁신이 이루어져야 한다. 세계적 대세인 융합의 걸림돌로 지적되어 왔던 문과‧이과 구분의 완전 폐지 등 교육체계 혁신도 중요하다.
사람, 즉 R&D 인적 자원의 혁신도 핵심이다. 우수 인력의 R&D 분야 유치와 R&D 인력의 역량 강화도 중요하나 근본적으로 한국인 일변도의 다양성 부족은 시급히 해결해야 할 과제다. ‘빠른 추격자’ 전략에서는 주어진 R&D 목표의 효율적 실행이 중요하므로 연구 인력의 다양성이 큰 이슈가 아닐 수 있지만 ‘시장 선도자’ 전략에서는 전혀 다르다. 세계 시장을 선도하려면 세계인과 사회의 거대 문제, 비전 및 지향점에 대한 이해가 필수적이어서 우리 인재만으로는 어렵고 R&D 생태계의 글로벌화가 대단히 중요하다. 해외 우수 인재의 유치는 물론이고 해외 산학연관 R&D 생태계와의 협력 및 공동 연구도 대폭 확대해야 한다.
시대의 변화가 R&D 패러다임의 변화를 요구한다. 그동안 잘해온 대한민국이지만 이에 안주할 여유가 없이 새로운 혁신이 시급하다. 이제 과학기술이 호국신산이다.
주영섭 필자 주요 이력
△미국 펜실베이니아주립대학 산업공학박사 △현대오토넷 대표이사 사장 △대통령 직속 국민경제자문회의 위원 △전 중소기업청장 △한국디지털혁신협회 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