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9년 3월 25일 오후 광주광역시 북구 유동 YWCA강당은 많은 사람들로 가득 찼다. 조아라 여사(1912~2003) 희수(77세) 생일축하회 자리였다. 개회사에 이어 고정희 시인의 ‘무등에 팔 벌린 민주의 어머니여’라는 시(詩)가 조용히 낭송된다.
“........ 왜정치하에서는 항일투사로,
무명베 두 필 팔아 풀죽을 쑤어놓고
하느님, 이 아이들을 어찌하란 말입니까
수복 후에는 홍등가에 버려진 딸들을 위하여
살 길을 찾아주자 시작하신 계명여사,
별을 보며 살아가는 딸들에게
배워야 살 길 있다 시작하신 별빛학원,
뜻이 있는 곳에 길이 있다 열어주신 호남여숙,
아 아 그리고 당신은
우리시대 칠십년대나 팔십년대
어두운 역사의 벼랑을 오르며
인권운동의 선봉장이 되어
광주항쟁의 총받이 되어
탱크 앞에 한일자로 누우셨습니다.
부정부패 제방 앞에
내 한 몸 던져 무등의 꿈 펼치셨으니,
백발이 성성한 당신 칠십 평생에
아직 풀지 못한 한 있다면
그것은 한반도의 한입니다.
아직 이루지 못한 기다림 있다면
그것은 한반도의 기다림입니다.
아직 넘지 못한 장벽 있다면
그것은 한반도의 장벽입니다.
눈물 있다면
그것은 세계인민의 눈물입니다.
무등에 팔 벌린 민주의 어머니여”
조아라의 일생이 고스란히 담겨있다. 이어 조아라가 복받치는 감정을 눌러 참고 무대에 올라가 답사를 한다.
“감사합니다. 그리고 부끄럽습니다. 저는 그동안 ‘어떻게 하면 조금이라도 예수님을 닮을까’라는 심정으로 평생 노력했을 뿐입니다. 나 자신이나, 우리들 믿음의 진정성에 대해서 자성해 볼 때가 많답니다. 요사이 우후죽순처럼 생겨나는 게 교회요, 늘어가는 기독교 신자수가 천만을 헤아린다는데 어찌하여 우리나라는 점점 살얼음을 딛고 사는 듯 불안하고 살벌해지는지 모르겠습니다.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 나, 내 가족, 내 교회만의 이익과 평안, 행복을 추구하는 신앙, 가족 이기주의와 기복신앙으로 변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뼈아픈 지적이다. 그래서 조아라는 맘먹은 대로 실천했다.
잃은 자, 소외된 자들에게 희망을
조아라는 ‘광주의 어머니’니 ‘민주화의 대모’니 자신을 향한 호칭에 손사래를 쳤다. 그저 심부름꾼으로 불러 달라고 했다.
이희호 여사의 회고다. “조아라 회장은 언제 어느 곳에서나 자비와 봉사를 위해 뛰어다녔고 사랑할 가치가 없어 보이는 사람들까지 포용해 주었다. 고통 받는 사람들의 울부짖음을 들어주는 어진 어머니가 되고 잃은 자와 소외된 자를 찾아다니며 힘이 되고 희망을 불어 넣어주었다.”
오병문 전 전남대 총장(1938~2010)은 “조아라 여사의 업적을 생각하면 형식과 가식을 엿볼 수 없다. 더욱이 말이나 글로 표현할 수가 없다. 그분은 오직 하느님 뜻에 따라 양심에 따라 행동하고 말하고 일을 했기 때문이다. 특히 YWCA를 떠나서 생각할 수가 없다”고 말했다.
그랬다. 조아라는 1947년부터 1983년까지 광주YWCA 총무, 회장을 지냈다. 명예회장으로 임기를 2번 채웠다. YWCA를 여성운동과 민주, 인권, 사회정의 운동의 보루로 기반을 굳게 다졌다.
수피아여학교에서 스승 김필례 만나
조아라는 광주 수피아여학교를 졸업하고 ‘이일학교’ 교사가 된다. 과부나 이혼녀 같이 소외되고 차별 받는 여성들을 가르쳤다. 하지만 2년 후 1933년 일본경찰에 의해 비밀조직 ‘백청단’ 주모자로 지목받아 해직된다. ‘백청단’은 광주 수피아여학교 재학생 10여 명이 만든 독서모임으로 1929년 광주학생독립운동에 참여했다. 조아라는 당시 모금운동을 벌였다. 일자리를 잃은 조아라는 청년회 활동을 하며 결혼해 아들을 낳고 잠시 행복한 시간을 지낸다.
일제는 1937년 중일전쟁을 벌이고 우리에게는 민족말살정책을 강화해 신사참배와 창씨개명을 강요했다. 수피아여학교는 이 두 가지를 모두 거부하고 자진해서 폐교한다. 이 사건으로 스승인 김필례가 수감되고 조아라도 한 달간 옥고를 치른다. 이후 해방되기까지 경찰의 감시와 조사를 받으며 고통스런 나날을 보낸다.
광주YWCA와 모교 재건
광주YWCA는 1922년 창립돼 활발하게 운영되다 1938년 일제 탄압으로 강제 폐쇄됐다. 조아라는 해방 후 광주YWCA 재건에 참여하면서 인연을 맺게 된다. 30 초반 젊은 시절 선배들 틈에 끼여 이사를 맡는다. 조아라의 당시 회고다. “스승이며 당시 총무이신 김필례 선생님의 보좌역으로 이런저런 장부와 회의록을 보따리에 싸서 이 집 저 집으로 옮겨 다니며 회의를 열었다. 그러면서 Y 안에 나의 책임적 위치를 굳히게 됐다. 이것이 나를 평생 Y의 머슴자리로 연결시켰다.” 결국 광주YWCA를 재건했다. 조아라가 해야 할 일이 또 생겼다. 이번에는 수피아여학교 재건이다. 폐교 당시 동창회장으로 신사참배 반대세력에 가담했던 터라 빚을 졌다고 생각했다. 동창과 선후배 동문을 찾아가 소집장을 내고 모임을 가졌다. 그 자리에서 모교재건을 결의하고 필요한 자금을 먼저 모으기로 한다. 광주와 목포, 순천에서 음악회, 연극회를 열고 모금했다. 소식을 들은 광주시민들과 전라남도도 성금을 냈다. 마침내 1945년 12월 5일 양림교회당에서 눈물어린 복교식을 하게 된다. 교원 7명, 학생 100여 명. 교실 3칸으로 다시 시작한 것이다. 외부 지원이 전혀 없었다. 조아라는 교사로 일하면서 학교 수업이 끝나면 동창들과 학교운영비를 충당하려고 동분서주해야만 했다. 여수에 있는 고무신공장에서 고무신을 가져와 머리에 이고 다니며 팔아 수익금을 학교 운영비로 보탰다.
불우한 여성과 고아들을 위한 사업
6·25 전쟁이 끝나자 광주YWCA에 복지사업기관인 ‘성빈여사’를 세워 생계가 어려운 여성과 고아들을 돌본다. 갓난아이와 고아들의 보호자가 돼 품어주고 아이들에게 자부심과 긍지를 심어주고자 교육했다. 불우한 소녀가장을 도우려고 3년제 야간 중학교 ‘호남여숙’을 설립해 가르쳤다. 1962년 청소년 야학인 별빛학원을 열어 10년 동안 운영했다. 여성 청소년들이 1년 6개월 과정으로 밤에만 공부했다. 졸업식장은 늘 눈물바다가 됐다. 윤락여성들에게 직업훈련을 하는 ‘계명여사’에서는 기술을 가르치고 선도해 사회진출을 도왔다.
박정희 군사독재정권 시절 민청학련 사건으로 민주인사들이 구속되자 구속자 석방을 위한 목요기도회를 광주 YWCA에서 매주 열었고, 대중강좌 ‘민중논단’을 통해 시민의식 운동을 벌였다.
5·18민주화운동 때 6개월 옥고
1980년 5‧18민주화운동 때는 광주YWCA를 개방, 시민항쟁의 근거지로 사용하게 했다. 수습대책위원으로 활동하다 계엄군에 끌려가 6개월간 옥고를 치른다. 당시 군사법정 최후 진술에서 조아라는 “모든 사건에는 저지른 사람, 만든 사람이 있다. 사실 우리는 아무런 죄가 없다. 누군가 불을 질러놨기에 그 불 끄러 들어간 사람이다. 그런데 이 나라의 법은 어떻게 된 법이길래 방화범은 안 잡고 불을 끄러 간 선의의 사람을 데려다가 죄인 취급하는지 그것이 의아스럽다”며 열변을 토했다. 그녀의 나이 68세 때 일이다.
출옥 후 조아라는 부상자와 사망자 처리, 피해 가족을 돕는 일에 전념한다. 이때부터 ‘민주화운동의 대모’ ‘광주의 어머니’로 불리게 된다.
결혼 4년 만에 남편 병사...두 아들 모두 의사
조아라는 일제강점기인 1912년 전남 나주군 반남면 대안리에서 아버지 조형률과 어머니 김성은의 둘째 딸로 태어났다.
고향에서 초등학교를 마치고 광주의 수피아여학교에 진학한다. 글쓰기와 오르간, 피아노를 배우며 합창대와 하모니카 밴드에서 활동했다. 성격이 밝고 다정했다.
27살이던 1939년 신학생 이택규와 결혼해 아들 학인, 학송을 낳았다. 이택규는 결혼 후 순면사립보통학교 교사로 근무하다 일제의 신사참배와 동방요배에 복종할 수 없어 교사직을 그만두고 평양신학교에 입학했다. 당시 조아라는 광주 수피아여학교가 문을 닫은 뒤 수감생활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택규는 결혼 4년 만에 지병으로 사망했다. 조아라는 홀로 두 아들을 의사로 잘 키웠다.
YWCA 건물 짓고 또 새로 지어
조아라는 한때 공직을 맡았다. 1947년부터 7년 동안 전남도청 부녀계장을 맡았다. 광주YWCA 업무와 겹치는 시절이다. 걸스카우트연맹과 어머니회, 여학사회를 설립하는 데 힘을 보탰다. 여성단체협의회를 조직해 여성운동의 든든한 울타리가 돼 줬다. 1968년부터는 ‘소비자 운동은 인권운동’이라는 기치를 내걸고 소비자보호운동을 벌이며 건강한 사회 만들기에 힘썼다.
조아라는 천신만고 끝에 1960년 광주 동구 대의동에 4층, 연건평 400평의 광주YWCA회관을 지었다. 공사비를 마련하려고 신발이 닳도록 뛰어다녔다. 하지만 20년 뒤 5·18민주화운동을 거치면서 YWCA 직원들이 희생되고 총탄자국으로 얼룩진 대의동의 YWCA 건물을 떠나기로 작정한다. 독일EZE, 스위스 WCC, 미국NCC를 순회하며 모금했다. 마침내 1983년 광주 북구 유동에 새로운 YWCA건물을 지어 옮겼다. 1992년 9월 분단 이후 처음으로 평양에서 열린 남북여성토론회에 한국여성계 대표로 참석했다.
한평생 여성운동과 민주화운동, 인권운동에 헌신한 조아라는 마지막 간절한 소망은 ‘조국의 평화통일’이라는 말을 남기고 2003년 91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국립 5·18 민주묘지에 안장됐다. 정부는 국민훈장 무궁화장을 추서했다. 광주 남구 양림동에 ‘소심당 조아라기념관’이 있다. 소심당(素心堂)은 의재 허백련 화백이 지어준 호(號)다. 속옷을 기워 입을 정도로 검소한 모습을 보고 ‘티 없이 깨끗하다’는 뜻을 담았다.
*참고서적 : ‘소심당 조아라 장로 희수기념문집’(도서출판 광주 1989), ‘낮은 땅의 어머니’(광주YWCA소심당조아라기념사업회 2013),‘오소서 지금 여기 오소서’(광주YWCA소심당조아라기념사업회 20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