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업가로부터 10억원대 금품을 수수하고 대가로 각종 청탁을 받은 혐의로 재판에 넘겨진 이정근 전 더불어민주당 사무부총장의 항소심에서 최근 검찰이 재판부에 감형해 줄 것을 요청했다. 이례적인 상황에 이 전 부총장이 검찰과 유죄협상(플리바게닝, Plea bargaining)을 한 게 아니냐는 의혹이 일고 있다. 다만 수사 효율성을 위해선 '한국형 플리바게닝'을 도입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커지고 있어 논란은 재점화되는 양상이다.
13일 법조계에 따르면 서울고법 형사6-2부(박원철 이의영 원종찬 부장판사)에서 지난 8일 정치자금법, 특정경제범죄 가중처벌 등에 관한 법률 위반(알선수재) 등 혐의로 기소된 이 전 부총장의 항소심 결심공판이 열렸다. 앞서 1심이 이 전 부총장에게 징역 4년6월을 선고하고 9억8680만원의 추징 명령을 내렸는데, 검찰은 이날 이보다 가벼운 징역 3년을 구형했다.
10년째 도입 추진에도 '범죄와의 거래' 비판에 무산
플리바게닝은 피고인이 유죄를 인정하거나 다른 사람에 대해 증언을 하는 대가로 검찰 측이 가벼운 범죄 구성요건을 적용해주거나 형을 낮추는 것으로 유죄협상제, 사전형량조정제도라고도 한다. 미국, 유럽, 일본 등에서 활발히 이용되고 있다.국내에서도 플리바게닝을 도입해야 한다는 목소리는 10년째 이어지고 있지만 번번이 '범죄와의 거래'라는 비판에 부딪혀 무산됐다. 법무부는 2011년 사법협조자에 대해 형사면책을 해주는 내용을 담은 형법·형사소송법 개정안을 발의했지만 제18대 국회 임기만료로 폐기됐다. 이후에도 대검이 꾸준히 정책연구를 진행하고 2018년에는 검찰개혁위원회가 권고안을 검찰총장에게 전달했지만 법제화 되지 못했다.
판사 출신의 A변호사는 "법원이 아닌 검찰이 피고인과 사법거래를 통해 형량을 좌우하겠다는 플리바게닝은 우리나라 형사사법체계에 맞지 않고 정의의 관념에도 부합하지 않을 수 있다"며 "실체적 진실 발견을 위한 노력을 등한시 하고 밀실에서 피의자와 협상하는 것은 부적절하다는 비판도 있다"고 우려했다.
新유형·조직범죄 기승…"한국형 플리바게닝 도입을"
하지만 검찰과 형사법 전문가들은 증거 확보가 어려운 새로운 유형의 범죄들이 계속 등장하는데다 조직 범죄가 기승을 부리는 상황에서 '거악 척결'을 위해선 '플리바게닝' 도입이 시급하다는 입장이다.
이경렬 성균관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내부가담자로부터 협조를 이끌어 내기 위해서는 공범의 회유·협박을 견뎌낼 정도의 법률상 혜택을 보장해 줄 필요가 있다"며 "대상 범죄와 감면 요건 등을 엄밀하게 규정하고 사후적 통제 수단을 마련한다면 남용 우려도 불식시킬 수 있다"고 밝혔다.
검사 출신 B변호사는 "우리나라는 검사가 공소권을 독점하고 있는 기소독점주의와 형사소송법상 공소 제기에 관해 검사의 재량을 허락하고 기소유예를 인정하는 기소편의주의에 따라 암묵적으로 유죄협상이 이뤄질 수 있다"며 "수면 아래에서 이뤄지는 것들을 피의자의 자의적 인정, 거래된 사항의 문서화, 법원의 통제 등 일정한 요건에 따라 철저하게 이뤄질 수 있도록 제도화 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