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과학기술정보통신부 주최로 한국과학기술회관에서 열린 제1회 세계 한인 과학기술인 대회에 참석하였다. 한국과학기술단체 총연합회와 세계 19개국에 결성된 재외 한인 과학기술자 협회가 공동 주관한 행사로, 전 세계에 흩어져 활약하고 있는 재외 한인 과학기술인들과 국내 연구자들이 한자리에 모여 각자의 성과를 공유하고 협력을 강화할 기회였다는 점에서 그 의의가 크다. 전 세계 손꼽히는 명문 대학에서 교수로 재직하며 활약하고 있는 한인 과학기술인들의 우수한 연구 성과 발표를 들으면서 존경스럽고 자랑스러운 마음이 들었다. 그 자리에 참석한 재외 과학기술인 개개인은 모국에서 자신을 알아주어 불러주고 다양한 연구자들과 교류할 기회를 주었다는 점에서 큰 자부심을 느낄 것 같았다.
교수님의 수상 소감을 들으면서 비단 젊은 연구자나 학생들뿐 아니라 우리 사회 전반에 조급함과 조바심, 불안감이 자리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부동산 가격 폭등에 따른 소외감, 대기업 임원이나 연예계 스타들의 소득에서 느껴지는 위화감, 인스타그램을 비롯한 SNS를 통해 과장되고 과시되는 일상 등은 사람들로 하여금 조바심과 불안감을 부추기고 그러한 의도로 노출된 타인의 모습에서 자신의 현실을 초라하게 느끼고 더 나아가 자신이 불행하다고까지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 영혼까지 끌어모아 집을 산다는 ‘영끌’, 빚을 내어 주식에 투자한다는 ‘빚투’, 비트코인을 비롯한 ‘가상화폐 광풍’ 등은 모두 우리 사회 구성원들이 가진 조급함과 불안감의 발로이자 그것들이 현 상황을 역전시키거나 크게 변화시켜줄 뜀틀 역할을 해 줄 것이라는 잘못된 기대감을 나타내는 것이 아닐까.
통계청에서 발표한 '사망원인통계'에 따르면 인구 10만명당 자살한 대한민국 국민 수는 1990년에는 7.6명이었으나 2000년에 23.7명으로 급격하게 증가한 후 2010년 31.2명, 2020년 25.7명을 기록했다. 대한민국 국민의 자살률은 외환위기가 있었던 1998년에 OECD 국가 평균을 넘어선 후 계속 증가하여 2010년에는 OECD 평균 대비 2.67배, 2020년에는 2.14배를 기록했다. 2003년 이후 지금까지 일관되게 대한민국은 OECD 국가 중 자살률이 가장 높은 나라다.
자살률은 대체로 삶의 만족도와 밀접한 관련이 있으며 사회의 구조적 특성과 사회 통합의 정도를 보여주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특히 사회적으로 급격한 변동이나 불안정성이 증가하면 자살률이 높아지는 것으로 보고된다. 통계청 통계개발원에서 발표한 ‘국민 삶의 질 2022’ 보고서 중 관련 지표를 몇 개 살펴보면 2020년 기준으로 우리나라는 ‘삶의 만족도’ ‘사회지원관계망의 질’ ‘일과 삶의 균형’ 지표에 있어 세계 41개 국가 중 각각 38위, 38위, 35위로 모두 최하위권에 속해 있다.
마이클 샌델의 저서 <공정하다는 착각>에는 ‘절망 끝의 죽음’이라는 문구가 등장한다. 노동시장에서 자신이 종사하는 일에 대해 존중받지 못하고 이 사회가 더 이상 자신이 가진 지식이나 경험, 기술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고 생각하게 된 사람들이 마음에 상처를 입고 구직을 포기할 뿐 아니라 장기적으로 삶의 방향을 상실하고 알코올, 약물 과용, 자살 등 방법으로 죽음을 스스로 불러들인다는 것이다. 이어서 ‘일은 개인을 공동체와 연결되게 만드는 사회적 통합 활동이며 인정의 장이고, 공동선에 기여해야 할 우리의 책임을 명예롭게 수행하는 방식’이라고 언급한다. 샌델은 모든 시민이 갖는 소비자와 생산자의 역할 중 경제적으로 중요한 역할은 생산자의 역할이며, 생산자로서 시민은 동료 시민들에게 필요한 재화와 용역을 만들면서 사회적 인정과 명망을 얻는다고 말한다. 경제활동에서 갖는 어떤 역할이 사회적으로 어떤 평가를 받느냐, 어떤 역할이 공동선에 기여한다는 명예와 인정을 받느냐는 논의는 매우 중요한 문제이며, 일의 존엄을 살리기 위해서는 실물경제에는 도움이 되지 않는 금융 활동이나 투기자본을 억제하고 생산적인 노동을 칭찬해야 함을 역설한다.
우리는 코로나19 팬데믹의 경험을 통해 우리 사회 공동체가 생존하고 운영되는 데 필수적인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을 배웠다. 의사, 간호사, 구급대원 등을 비롯한 의료계 종사자, 방역 담당자, 탁아시설, 요양시설 등 돌봄 노동자, 식료와 마스크를 비롯한 필수품 생산 근로자, 식품과 필수품을 운송하고 배달하는 유통 근로자, 사회기반시설 청소자 등이다. 이들이 하는 업무들이 꼭 필요한 일인데 반하여 이들 대부분이 받는 사회적 인정이나 처우가 대체로 그리 좋지 않다는 것은 상당한 모순이 아닐 수 없다.
일의 존엄성 회복을 정책 의제의 중심에 놓고 국민 한 사람 한 사람의 생산자 정체성과 소비자 정체성을 조화시키고 삶의 질을 높이는 일은 정부 몫이다. 일하기를 원하는 모든 시민이 직업을 통하여 노동의 자긍심을 체감하도록 해야 하며 일상생활에서 기본적인 삶의 질을 누릴 수 있는 안정적 소득 확보로 이어지도록 해야 한다. 질병, 산업 재해, 실업 등 인생의 위기 상황에서도 사회안전망을 통하여 보호받는 신뢰 사회로 나아갈 수 있도록 제도적으로 뒷받침하여야 한다.
고규영 교수님의 ‘헝그리 정신을 가지고 바닥부터 올라가야 한다’는 말씀은 일에 대한 우리의 관점과 인식을 되돌아보게 한다. 조급한 마음을 버리고, 조바심 내지 않고, 오랜 기간 땀 흘려서 수고하고 노력하여 이루어낸 성취가 정직하고, 정직한 성취가 소중하다. 성취를 이루는 과정에서 맞닥뜨린 다양한 어려움이나 고난을 극복한 경험이 우리를 성장시키고 성취에 대한 자부심을 느끼게 하며, 더 크고 중요한 일에 도전할 자신감을 가지게 할 것이다. 작고 사소한 것일지라도 하나씩 이루어나가는 과정이 바로 삶이다.
세상에는 소중한 것을 소중하게 지키며 살아가는 평범한 사람들이 많이 있다. 가족과 친구, 동료와 이웃과 같은 소중한 존재들을 소중히 여기고, 인간에 대한 존중, 친절과 배려, 공감과 소통, 정직함, 근면함, 책임감 등과 같은 소중한 가치들을 소중히 지키면서 살아가는 시민들이다. 그들이 절망하지 않도록, 그들의 삶을 지탱하는 그들의 일을 존중하고 보호하여 일상을 지켜주는 것은 이 시대 능력주의가 끊어버린 사회적 연대의 띠를 다시 공고히 하고 어우러져 살아가는 공존의 지혜와 공동체 의식을 되살리기 위한 첫걸음이다.
필자 주요 이력
△이화여대 전자전기공학전공 교수 △전 과학기술정보통신부 장관 △ 전 국가과학기술연구회 이사장 △ 제50대 대한전자공학회 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