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쁜 엔저'에 이어 '비정상적 엔저'라는 말이 일본 산업계에서 나오고 있다. 엔화 가치 하락으로 인한 유리한 점은 대기업이 가져가는 반면 불이익은 중소기업이 떠안는 모습을 일컫는 말이다. 엔화 가치가 속절없이 하락할수록 일본 중소기업들의 불만이 커지고 있다.
엔화 가치 하락에 日 중소기업 제조업 경기 '암울'…수입 가격 증대 탓
엔화 가치 하락이 본격화되면서 일본 중소 기업 생태계에 불만이 고조되고 있다. 일본 정부의 의도적 엔화 약세와 대책 부재로 피해를 보고 있다는 주장이다.
최근 달러 대비 엔화 가치가 145엔 선까지 밀리면서 불만이 커졌다. 달러 대비 엔화 환율이 145엔을 기록한 것은 지난해 11월 이후 7개월 반 만이다. 5일 도쿄 외환시장에서 달러 대비 엔화 환율이 144.5엔을 오르내리고 있다. 올해 초 127엔 부근이었던 점을 고려하면 엔화 가치 하락이 매우 빠른 속도로 진행되고 있는 것이다.
엔화 가치가 급속하게 하락하자, 중소기업 단체 위주로 거센 반발이 나왔다. 지난 3일 TBS 뉴스·산케이신문 등에 따르면 코바야시 켄 미츠비스상사 회장 겸 일본 상공회의소 회장은 엔저로 인한 혜택이 대기업에 편중되는 것을 우려했다. 코바야시 회장은 기자회견에서 "현 환율은 피부로 체감되는 비정상적인 엔화 약세"라고 말했다.
코바야시 회장은 엔저로 인한 혜택은 대기업이 독식한다고 꼬집었다. 코바야시 회장은 "엔저로 윤택한 곳이 매우 많지만 (이득을 보는 곳은) 대기업에 집중되고 있다"며 "대기업은 수출이나 달러 환차익으로 혜택을 보고 있지만, 이 부분이 논의조차 되지 않은 것은 문제가 있다"고 지적했다. 이어 대기업은 중소기업과의 거래에서도 가격 정상화에 응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중소기업 경영을 지원하는 최대 이익단체인 일본 상공회의소가 엔화 약세로 인한 부작용을 꼬집은 것이다.
엔화가 하락하면 수출 기업은 유리한 측면이 있다. 엔화 하락으로 더 저렴한 가격에 팔 수 있어 국제 시장에서 가격 경쟁력이 생긴다. 매출 역시 증가하는 효과가 생긴다. 일반적으로 대기업이 중소기업보다 수출을 담당해 엔저 현상은 곧 대기업에 유리한 조건을 조성한다.
실제 엔저 상황에서 기업들의 체감 경기는 대기업과 중소기업의 차이를 분명하게 보여줬다. 일본은행(BOJ)이 지난 3일 발표한 6월 전국기업단기경제관측조사(단칸)에서 대기업 경기는 개선된 반면 중소기업의 경기는 여전히 암울했다. 4월 말부터 달러 대비 엔화 환율이 135엔을 넘은 점을 고려하면 엔저가 크게 작용한 것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단칸 업황판단지수는 BOJ가 전국 기업 9100여곳을 상대로 체감 경기를 조사하는 지표로 대기업과 중견기업, 중소기업으로 분류하고 제조업과 비제조업으로 나눠서 조사를 진행한다. 숫자가 클수록 경기 전망을 낙관하는 기업이, 작을수록 경기 전망을 비관한다는 기업이 많다는 것을 시사한다.
제조업 분야 대기업 전망이 가장 큰 폭으로 바뀌었다. 제조업 분야 대기업 응답은 지난 3월 조사와 비교해 4포인트 상승한 5를 기록했다. 2021년 9월 이후 1년 9개월 만에 개선된 것이다.
반면 제조업 분야 중소기업에서는 여전히 경제 전망을 어둡게 본 응답이 많았다. 이 역시 엔저 때문으로 풀이된다. 중소기업일수록 엔저로 인한 수입 가격 증대의 직격탄을 받기 때문이다.
제조업 분야 중소기업을 대상으로 한 조사 결과 1포인트만 상승한 -5로 집계됐다. 체감경기가 어렵다고 본 응답자가 많다는 의미다. 앞서 일본 상공회의소가 지난 4월 중소기업 경기조사를 했을 때도 "엔저로 인한 손실이 크다"는 응답이 53.3%로 절반을 넘은 바 있다.
미즈호 리서치&테크놀로지스의 나카노부 타츠히코 애널리스트는 "중소 제조업체 대부분은 비용 상승을 가격 상승으로 대응할 수 없어 수익이 악화되고 있다"고 지적했다. 나카지마 타카시 아사히신문 논설위원은 "일은 단칸 대상에도 포함되지 않은 제조업 분야 중소기업이 대부분이기 때문에 체감 경기 상황은 훨씬 심각할 것"이라고 진단했다.
기약없는 엔저 현상...출구는 어디에?
문제는 엔저 현상이 언제 끝날지 모른다는 점이다. BOJ가 올해 완화적 정책 기조를 이어가고 있기 때문이다.
우에다 가즈오 BOJ 총재는 지난달 28일 포르투갈 산트라에서 열린 유럽중앙은행(ECB) 연례 포럼에서 금융완화 정책 변경을 위한 조건으로 내년까지 고물가 가능성을 제시했다.
우에다 총재는 "수입 물가 상승이 한풀 꺾이며 물가 상승률이 연말을 거치면서 둔화할 것"이라며 "그 이후에는 물가 상승률이 확대될 것으로 보이는 데 (이 예상에) 별로 자신이 없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이 예상에 대해) 어느 정도 확신을 가지면 정책 변경의 충분한 이유가 될 수 있다"고 유보적 태도를 보였다.
다시 말해 현재의 완화적 통화정책 종료 시점을 예단하기 어렵다는 말이다. 우에다 총재는 과거부터 인플레이션보다 디플레이션이 중요하다는 취지의 언급을 수차례 해왔다. 구로다 하루히코 BOJ 총재의 양적완화를 계승하겠다는 입장도 밝힌 바 있다.
다만 시장 일각에서는 BOJ가 현재의 수익률통제곡선(Yield Curve Control·YCC) 정책을 수정할 가능성도 거론된다. 지난 3일 닛케이와 금융조사업체 QUICK이 공동으로 조사한 바에 따르면 7월 BOJ가 YCC를 수정할 것으로 내다본 응답자가 28%로 제일 많았다. 이어 10월(25%), 12월(13%)로 뒤를 이었다. 이들은 YCC 수정 가능성의 배경으로는 국내 물가 상승, 엔저 현상 등을 꼽았다.
현재 BOJ는 YCC 정책을 통해 10년물 국채 금리의 상한선을 0.5%로 유지하고 있다. 국채 금리가 이를 넘어서면 무제한 매입하는 방식으로 채권 시장에 개입하고 있다. BOJ는 YCC를 통해 엔저를 유지할 수 있는 배경을 만들지만 채권시장 불안정과 BOJ의 과도한 채권 매입 등 한계에 부딪히고 있다는 비판도 나오는 상황이다. BOJ는 오는 28일 통화정책회의를 앞두고 있다.
엔저 상황에서 새로운 중소기업 지원 정책이 등장할 가능성도 있다. 일본 언론에서 일본 정부가 중소기업이 요구하는 시책을 참고로 지원책을 강화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주장하고 있다.
앞서 지난해 11월 엔화 가치가 폭락하자 일본 경제산업부는 수출 경험이 없는 중소기업 지원에 나선 바 있다. 내수에 집중하는 중소기업에 부담을 고려한 조치로 내수 대신 수출 비중을 늘리려는 것이다. 경제산업부는 중소기업을 상대로 수출을 독려하기 위해 전문가 사전 상담을 시작했다. 또 회사 1만 곳에 상품 개발이나 매입에 드는 비용을 최대 3000만엔(약 3억원)까지 보조한다고 발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