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처럼 정치 논리가 경제 문제를 좌우하는 때는 별로 없었던 것 같다. 정치가 경제 문제에 영향을 미치는 것은 국내뿐만 아니라 국제적으로도 마찬가지다. 오히려 힘의 논리가 발휘되는 국제 경제에서 이러한 문제가 두드러진다.
아직도 무역이 규제되나 할지 모르지만 무역규제는 여러 형태로 이루어지고 있다. 세계 무역을 확대하기 위해서 만들어진 GATT, 그 제21조는 안보(security)를 위해서 무역을 제한할 수 있도록 규정하고 있다. 한편 안보를 위해서 무역을 규제하는 국제협력체로 전략물자수출통제체제가 운영되고 있다. UN 안보리 결의와 연계되는 이 체제는 1949년에 발족되어 1991년 공산 진영 붕괴 시점까지 존속한 이른바 대 공산권 수출통제위원회(COCOM)가 변형된 것으로 1996년부터 네덜란드 도시의 이름을 딴 바세나르 협정(Wassenaar Arrangement)을 중심으로 운영된다. 미국, 한국, 일본 등 세계 42개 국가들이 참여하고 있는 바세나르 협정은 재래식 무기와 전략 물자 및 기술을 비협정국에 수출/이전할 때 작동한다. 이 전략물자수출통제체제의 가상의 상대국은 중국, 이란, 북한 등이라고 할 수 있고 수출통제 대상은 군용(military use)을 비롯해서 군용·민간용 이중용도(dual use) 물품을 포함한다.
아이로니컬하게 전략물자수출통제의 전신인 COCOM에 크게 혼이 난 나라는 바로 일본이었다. 일본의 주요 산업용 기계 제조회사인 도시바기계가 1982년에 잠수함에 쓰일 수 있는 선반기계들을 구 소련에 불법으로 수출한 것이 적발되어 엄청난 국제적 파문을 일으켰다. 1987년 일본 총리(나카소네)가 대미 사과성명을 발표하고 도시바기계 회장은 사임하게 되었다. 발칵 뒤집힌 일본은 자국의 전략물자 수출통제 제도를 정비하여 오늘에 이르렀으니 격세지감마저 든다.
일본 이외에도 여러 나라가 안보를 중시하고 있지만 가장 명시적으로 안보를 국제무역에 적용하는 나라는 미국이다. 미국은 안보를 위해서 무역을 제한하는 것을 골자로 하는 1962년 무역확장법과 1974 통상법 등을 비롯해서 자국의 주요 국제무역관련 법령에 안보를 키워드로 명시하고 있다. 미국이 규제하는 품목들은 산업용을 넘어 군사적으로 중요한 품목들이다. 배터리(이차전지)는 잠수함, 어뢰 등과 같은 첨단무기뿐만 아니라 드론과 같은 무인 체계들에도 탑재되어 군사적 활용도가 높다. 반도체도 산업적 가치만 있는 것이 아니라 스텔스 전투기를 비롯한 첨단 군수물자의 핵심부품으로 군사안보적으로도 매우 중요하다.
미국은 2022년 8월 전기차 배터리 및 반도체 등 안보 핵심 물자가 미국 및 우방국에서 생산되어야 한다는 요지의 인플레이션 감축법(IRA) 및 반도체법(Chips Act)을 제정하였고 최근 공개된 가드레일 조항에서 구체화하였다. 미국의 보조금을 받은 기업(예: 삼성전자 등)은 특정 국가(예; 중국 등)에서 반도체는 5~10% 이내에서만 증설이 허용된다. 그뿐만 아니다. 군사용 반도체를 우선 미국에 공급하여야 하고 핵심공정에 대한 접근 제공(생산시설 공개)과 초과이익 공유 등의 조건을 이행하도록 요구하고 있다. 미국의 이러한 일련의 보조금 정책은 WTO의 핵심의 하나인 반(反) 보조금 협정을 사실상 사문화시키고 산업정책(industrial policy)의 부활을 공식화하였다. 또 미국은 WTO 분쟁해결기구의 상소심 재판관들의 임명을 중단시킴으로써 사실상 WTO 자체를 무력화시키고 있다. GATT 출범 당시 국제무역기구(ITO)의 출범을 반대한 미국은 이제 세계무역기구(WTO)를 표류하게 하고 있다.
정치적 갈등으로 촉발된 한·일 간의 상호 무역 견제. 그 비용은 결코 작지 않다. 품목에 따라 차이가 있지만 불화수소 등 일본의 규제 대상 품목들의 대 한국 수출은 감소하여 한국은 타격을 입었고 돈을 들여 소부장 정책을 추진하였다. 그러나 무역의 규제로 양국이 부담하고 있는 비용은 눈에 보이는 것보다 훨씬 크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경제에 정치적 계산을 하면 출구는 보이지 않는다. 청구권 소멸 논란을 비롯해서 양국 국민의 인식의 차이는 동해바다만큼이나 벌어져 있다. 우리 정부는 국제정치 및 경제 문제의 해결을 위해 국내 정치와 민심의 반발을 무릅쓰고 일본에 대해 선제적 결단을 내렸다. 이제 공은 일본에 넘어갔다. 한국의 대승적 차원의 결정에 이제 일본은 결자해지의 차원에서 답을 해야 한다. 이러한 과정에서 우리는 우리 정부보다는 일본 측에, 그리고 대외적인 요구에 목청을 높여야 한다. 미·중 간의 헤게모니 쟁탈과 일본과의 치열한 경제외교의 싸움에서 승리할 수 있도록 우리 기업과 정부를 응원해야 한다.
이학노 필진 주요 이력
△서울대 경제학과 △텍사스대 오스틴캠퍼스 경제학 박사 △통상교섭민간자문위원회 위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