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8월 자민당 총재선거 출마를 표명하시면서 10년 이상 국민의 목소리를 노트에 적어왔다고 하면서 작은 노트를 들어 보이는 모습은 참으로 인상적이었습니다. 국민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폭넓은 대안을 제시하겠다고 말씀하시고 총리가 되신 지 벌써 1년 4개월이 지났습니다. 그동안 많은 일이 있었습니다만,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략을 빼놓을 수 없을 것 같습니다.
미·중이 대립하는 가운데 발생한 우크라이나전쟁을 통해 미국을 중심으로 한 서방과 중·러의 대립 구도가 더욱 명확해져 일부에서는 ‘신냉전’이 고착화하고 있다고 우려하고 있습니다. 전후 오랜 기간 국제사회가 축적해온 규범과 질서가 러시아에 의해 너무도 쉽게 파괴되고 인간의 생명과 인권이 유린당하는 모습은 국제사회에 커다란 충격을 주었습니다. 요즘 총리께서 자주 사용하시는 표현을 빌리자면 국제사회는 역사적 전환기에 직면해 있으며,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략에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에 국제사회의 미래가 달려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2022년 12월 일본은 ‘국가안전보장전략’ 등 중요한 세 가지 안보 정책 문서를 개정했으며, 지난 1월 9일부터 프랑스, 이탈리아, 영국, 캐나다 및 미국을 방문한 총리께서는 ‘전후 안전보장정책의 대전환’을 결단한 배경과 필요성을 설명하셨을 것입니다. 또한, 오는 5월 19일부터 21일까지 히로시마에서 열리는 G7 정상회의의 성공적 개최를 위한 사전 조율도 이뤄졌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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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년 전인 2016년 5월 27일 일본에서 열린 G7 정상회의를 마친 오바마 미국 대통령은 아베 총리와 함께 피폭지 히로시마를 방문했습니다. 미국 현직 대통령이 피폭지를 방문한 것은 처음이었으며, 원폭 투하에 대한 책임과 사죄에 대한 언급은 없었으나 오바마 대통령은 평화기념자료관을 시찰하고 원폭사몰자위령비(原爆死沒者慰靈碑)에도 헌화했습니다.
특히, 위령비 앞에 선 오바마 대통령은 원폭에 의해 일본인만이 아니라 한국인과 미국인 포로도 희생이 되었다고 언급했으며, “히로시마와 나가사키는 핵전쟁의 여명이 아니라 우리 자신의 도덕적 각성의 시작으로 알려진 미래”라면서 ‘핵무기 없는 세계’를 위한 용기를 강조했습니다. 연설을 마친 오바마 대통령이 8살 때 피폭된 모리 시게아키씨를 껴안고 등을 두드리며 위로하던 모습은 감동적이었습니다.
7개월 뒤인 12월 27일(일본시간 28일) 아베 총리는 오바마 대통령과 함께 하와이의 진주만을 방문했습니다. 75년 전인 1941년 12월 일본군의 기습공격을 받아 침몰한 전함 애리조나 위에 건립된 기념관을 방문하고 헌화했습니다. 사죄와 반성의 말은 없었으나 아베 총리는 두 번 다시 전쟁을 반복하지 않겠다는 결의를 표명하면서 세계가 “진주만을 화해의 상징으로 계속 기억해줄 것을 바란다”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오바마 대통령은 적대국이었던 미국과 일본이 동맹국이 될 수 있었던 것이야말로 진주만이 보여준 ‘화해의 힘’이라고 아베 총리의 진주만 방문의 의미를 높이 평가했습니다.
오바마 대통령의 히로시마 방문이 당시 외상이었던 기시다 총리님의 노력으로 실현되었다는 점은 잘 알려져 있고, 외상으로서 아베 총리의 하와이방문 시에도 수행하셨던 만큼 미·일 간 역사 화해의 의미를 누구보다 잘 아실 것으로 생각됩니다.
지난 1월 7일 요미우리신문은 일본 정부가 히로시마 G7 정상회의에 윤석열 대통령을 초청하는 문제를 검토하고 있으며, 강제징용 문제에 관한 한국 정부의 대응을 본 뒤 초청 여부를 최종적으로 결정할 것이라고 보도했습니다. 한편으로는 반가웠으나 한편으로는 실망스럽기까지 했습니다. 총리님의 ‘핵무기 없는 세계’라는 목표를 함께 추구해야 할 가장 좋은 파트너국은 한국이라고 생각합니다. 1945년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서 한국인 약 7만명이 피폭되어 4만명 정도가 사망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습니다. 당시 두 지역에는 강제로 동원된 한국인도 적지 않았던 것으로 보이지만, 그 실태는 아직도 규명되지 못하고 있습니다.
저는 윤석열 대통령의 히로시마 G7 정상회의 참가는 한·일 간 역사 화해의 좋은 계기가 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초청 검토가 아니라 가장 많은 원폭 피해를 받은 일본과 한국의 두 지도자가 인류를 파멸시킬 수 있는 핵무기의 참상을 알리고 ‘핵무기 없는 세계’ 실현을 주도해가는 것은 양국 관계에 새로운 획을 긋게 될 것입니다.
작년 8월 1일 뉴욕에서 열린 핵확산금지조약(NPT) 재검토 회의에 일본 총리로서는 처음 참석했던 기시다 총리께서는 ‘핵무기 없는 세계’라는 ‘이상’과 ‘엄중한 안전보장 환경’이라는 ‘현실’ 사이에 취할 수 있는 현실적인 로드맵의 첫 단계로서 ‘히로시마 액션 플랜’을 제창하셨습니다. 구체적으로 총리께서는 핵무기 불사용의 중요성 공유, 투명성 향상, 핵무기 감축 유지, 핵무기의 비확산과 원자력의 평화적 이용에 더해 각국 지도자들의 피폭지 방문 촉진을 통해 피폭의 실상에 대한 정확한 인식을 전 세계로 확산하겠다고 하셨습니다.
또한, 총리께서는 유엔에 1천만 달러를 거출해 ‘핵무기 없는 세계를 위한 청년 지도자 기금’을 설립하겠다고 제안하셨습니다. 히로시마 G7 정상회의를 계기로 한·일 정상이 전쟁과 핵무기의 비참함을 국제사회에 호소하고 핵무기의 완전한 폐기를 위해 한·일 양국 나아가 전 세계 청년들이 피폭지를 방문할 수 있는 프로그램을 만들고 이를 위한 공동의 기금을 설립하는 것도 의미가 크다고 생각합니다.
이를 위해서는 강제징용 문제의 해결을 피해 갈 수는 없습니다. 한·일 양국 사법부의 판단이 다른 상황에서 국제사법재판소의 판결이나 중재 등에 맡기지 않는 한 양국 정부는 외교를 통해 이 문제를 해결할 수밖에 없습니다. 지난 1월 12일 공개토론회에서 한국 정부는 정부 산하 공공재단이 일본 기업 대신에 한국인 피해자에게 판결금을 지급하는 제3자 대위변제 방안을 제시하고 일본 정부와 협의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제국주의 시대 열강에 의한 식민지 지배가 합법인가, 불법인가에 관해서는 아직도 불법이라는 국제적 합의가 존재하지는 않습니다. 그렇지만 국제사회에서 인권 의식이 높아지면서 지금까지 눈을 감아왔던 노예제도나 식민지 지배로 인한 비인도적 행위나 경제적 수탈에 관한 관심이 증가하고 재조명도 이뤄지고 있습니다. 과거의 어두운 역사를 직시하려는 움직임은 이제 돌이킬 수 없는 흐름입니다.
지난 1월 23일 국회 시정방침연설에서 총리께서는 국제사회의 다양한 과제 해결을 위해 협력해야 할 중요한 이웃 나라인 한국과의 관계를 건전한 관계로 되돌리고 더욱 발전시켜나가기 위해 긴밀하게 의사소통해 가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강제징용 문제를 해결하는 데 있어 일본 정부와 기업의 상응하는 조치가 있어야 우리 정부는 피해자와 유족, 나아가 국민을 설득하고 이해를 구할 수 있습니다. 할 수 없는 것을 지금 일본 측에 바라는 것이 아닙니다. 역사의 전환점에서 세계 평화와 번영, 자유롭고 개방된 국제질서를 능동적으로 구축하겠다는 총리님의 정치적 결단을 기대합니다.
조진구 필자 주요 이력
△고려대 사회학과 졸업 △도쿄대 법학박사(국제정치전공) △ 경남대 극동문제연구소 일본센터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