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호균 칼럼] 업무개시명령과 자유

2022-12-07 16: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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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호균 명지대 경영정보학과 명예교수]


 
화물연대의 집단운송거부 사태에 대한 해결의 실마리가 전혀 풀리지 않고 있다. 대통령이 직접 전면에 나서 화물연대를 국가경제에 손해를 끼치고 국민들에게 불편을 초래하는 불법세력으로 규정하면서 정부에 강경 대응할 것을 연일 독려하고 있다.
대다수 언론은 국토부가 발표하는 조 단위의 물류 감소를 중계하면서 여론을 화물연대에 대항하는 전선으로 끌어모으고 있다. 기업, 정부, 언론이 삼위일체가 되어 화력을 총집중하고 있는 모양새이다. 이런 상황에서 여론조사 결과가 화물연대에게 불리하게 나오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정부는 화물연대에 대해 노동자 논리와 자영업자 논리를 뒤섞어 사용하면서 몰아붙이고 있다. 그래서 정부가 펴는 많은 주장이 모순적일 뿐만 아니라 양날을 가진 칼이기 때문에 정부의 선택적 적용도 쉽지 않다. 화물차 운전자를 노동자로 규정할 경우 안전운임은 최저임금에 해당하기 때문에 그것의 폐지는 물론 일몰제의 계속 적용도 요구할 수 없다. 오히려 안전운임제는 상설되어야 한다. 반면에 화물차 운전자를 자영업자로 규정하면 이들에게는 영업의 ‘자유’가 보장되므로 업무개시 명령 대상이 아닐 뿐만 아니라 고객의 매출감소에 따른 손해배상 청구대상은 더더욱 아니다. 오히려 업무개시명령을 규정한 화물자동차운수사업법이 인류보편적 가치이자 헌법적 가치에 해당하는 자유를 제한하는 과잉입법으로 해석될 여지가 있다. 이 법 제14조에 따르면 업무개시명령을 발동하려면 “국가경제에 매우 심각한 위기를 초래하거나 초래할 우려가 있다고 인정할 만한 상당한 이유”(제14조)가 있어야 한다. 업무개시명령 자체가 선례가 없기 때문에 현 상황이 “상당한 이유”에 해당되는지에 대해서는 분명 다툼의 여지가 있을 것이다. 또한 화물연대의 운행중단이 이 법의 제1조에 규정된 목적인 “공공복리의 증진”에 위배되는지를 입증하기도 쉽지 않을 것이다. 이들 인과관계에 대한 최종적인 판단은 사법부의 몫이다. 대통령이 ‘불법’으로 단정하는 것도 추후 검찰수사에 가이드라인을 제시하는 것과 마찬가지이므로 부적절한 개입이다. ILO마저 한국 정부의 업무개시 명령 발동에 화물기사의 노동기본권을 보장할 것을 권고하고 나섰다. 생존권과 직결된 기본권 제한은 더더욱 최소한에 그쳐야 한다.

정부는 기업의 공정거래법 위반행위에 대해 형사 처벌을 면제하려던 당초 공약의 이행마저 연기하면서 화물연대를 압박하고 있다. 기업을 위한 규제완화가 의미하는 경제적 자유의 ‘확대’와 화물연대에 대한 압박 강화가 초래할 자유의 ‘제한’ 사이에서 스텝이 꼬였다. 기업에게 주고자 하는 규제완화의 혜택이 화물연대에게 ‘누수’될 우려가 있음도 감지한 것으로 보인다.

화물연대가 파업에까지 이르게 된 직접적인 배경에는 지속가능한 생계안정과 안전운행이라는 기본적인 요구가 자리하고 있다. 안전운임을 최저임금처럼 일몰제 없이 보장하는 것이 “근로조건의 기준은 인간의 존엄성을 보장하도록 법률로 정한다”는 헌법 제32조③항의 취지에 부합하는 길일 것이다. 더욱이 사실상 무제한의 자원동원력을 가진 공권력이 가장 취약한 사회계층을 상대로 ‘노사법치주의’를 강제하는 것 자체가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에 위배되고 국가가 보장할 의무를 지는 “불가침의 기본적 인권”(헌법 제10조)에 속하는 인격권과 생존권을 위협하는 행위가 될 수 있다. 드물게 공권력의 오남용이 사후적으로 법원에서 밝혀진다 해도 그때까지 피폐해진 민생은 원상회복이 어렵다.

성숙한 자본주의 경제는 강제노동을 거부하지만 자본주의의 시작은 강제노동과 함께했다. 1530년 영국의 헨리 8세는 입법을 통해 늙고 노동능력이 없는 거지에게는 구걸허가증을 발급해주되 허가증이 없는 부랑자는 채찍으로 때리고 감금했다. 그리고는 수레에 묶고 온몸에 피가 흐를 때까지 끌고 다니다가 노동하겠다는 서약을 받고 풀어주었다. 그래도 떠돌아다니다가 두 번째로 발각되면 채찍으로 때린 다음 귀를 잘라냈다. 세 번째로 발각될 경우에는 중범죄자로 간주되어 처형했다. 1547년 에드워드 6세도 유사한 노예노동 칙령을 시행했다. 경제사는 임노동이 강제노동이던 이 시기를 ‘자본의 시초축적’으로 기록하고 있다.

화물연대에 대한 윤석열 정부의 초강경대응은 1984년 광부파업에 일체의 타협을 거부했던 영국의 대처 총리를 떠올린다. 그에 의해 주도된 신자유주의 노선이 40년 동안 만들어낸 결실이 오늘날의 영국경제이다. 제조업 공동화는 한 단면일 뿐이다. 1990년대 한국보다 앞서 ‘지식주도경제’를 선포했지만 한국의 정보통신산업에 견줄 만한 산업발전과 성장동력을 확보하지 못하고 2008년 금융위기를 맞았다. 신자유주의의 ‘작은 정부론’은 영국을 세계시장에서 존재감이 왜소해진 ‘작은 나라’로 추락시켰다. 유럽에서도 외톨이를 자처하면서 미국의 주니어 파트너로서 존재감을 유지하고 있다.

영국과 다른 길을 걸어온 대륙국가가 독일이다. 공동결정제로 대표되는 협력적 노사관계의 전통은 독일을 제조업 강국으로 유지하는 든든한 밑바탕이 되어주고 있다. 자동차산업도 2018년 디젤 스캔들을 노조가 나서 주도적으로 극복하고 새로운 모빌리티 시대를 준비하고 있다. 포용적 발전이 지속가능하고 경쟁력 있는 발전이다.

갈등상황에 임하는 대통령의 성향에 비추어 볼 때 화물연대와의 갈등은 장기화할 공산이 크지만 물리력에서의 우열관계가 확연하기 때문에 예상 외로 조기에 종료될 가능성도 없지 않다. 어떤 경우든 화물연대의 일방적인 후퇴로 상황이 종료된다면 그 후유증은 한국경제의 핵심성장동력인 인적자본을 ‘가랑비에 옷 젖듯이’ 잠식할 것이다. 10·29 이태원 참사처럼 문제는 해결된 것이 아니라 미루어질 뿐이기 때문이다. 윤 대통령은 “법과 원칙이 바로 서는 나라가 진정한 약자 보듬는 길”이라고 강변하지만 현실에서는 법과 원칙이 이미 강자 친화적으로 설계되어 있다는 것이 국민 상식이다. 국민들은 오래 전부터 ‘유전무죄 무전유죄’를 말하고 있다.

노사갈등에서 정부는 조장자가 아니라 조정자로 나서야 한다. 정부는 법을 집행하는 기관이기에 앞서 대화와 타협을 통해 이해갈등을 해소하는 정치력을 발휘하는 중재자가 되어야 한다. 포용적 발전은 포용적 정치를 동반자로 한다. 작금의 화물연대의 운행중단사태는 그 결과뿐만 아니라 해결 과정도 향후 적어도 수년 동안 한국 사회의 진로에 큰 영향을 미칠 것이 분명하다.

지금 대통령이 보여주어야 할 것은 ‘본때’가 아니라 ‘본보기’이다. 민생은 멀리 있지 않다. 화물연대도 민생이다. 정부는 즉각 화물자동차운수사업법 상의 안전운임위원회를 열고 국회에는 “국민경제의 위기를 방지”하고 “공공복리의 증진에 기여”한다는 법의 목적에 부합되도록 법 개정에 나서도록 촉구해야 할 것이다. 더 이상 ‘뒤를 보며 전진하느라’ 낭비할 시간이 한국 경제에는 없다. 지금 윤석열 정부가 가는 길은 한국 경제가 70, 80년대 이미 지나온 길이다. 몇 발을 뒷걸음질하다가도 곧바로 다시 돌아 나와야 할 길이다. 디지털 전환과 탄소중립의 시대는 화물운송의 재개를 넘어 노사정이 합심으로 열어가야 전 국민을 위한 ‘워라밸’을 함께 확보할 수 있을 것이다. 대통령이 국내외에 선언한 자유의 가치가 중대한 시험대에 올랐다.

 

필자 주요 이력
▷서울대 경제학과 ▷독일 브레멘대 경제학 박사 ▷명지대 경영정보학과 교수 ▷경실련 경제정의연구소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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