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대 권력자 시진핑, 그는 누구인가
신중국을 창업한 마오쩌둥(毛澤東, 1893~1976)과 1980년대 개혁개방의 총설계사인 덩샤오핑(鄧小平, 1904~1997) 시대를 이어, 중국 역사상 3번째 ‘역사결의(중국공산당의 역사를 결산하는 주요 문건)’ 채택으로 영수(領袖) 반열에 오른 시진핑(習近平, 1953년 6월 15일~) 주석이 무소불위의 권력을 갖고 지난달 중국의 ‘새로운 황제’로 등극, ‘격대지정(隔代指定)’ 의 불문율을 깨고 10년 집권에 이어 3기 연임으로 1인 장기집권 시대에 들어섰다.
중국공산당은 100년사에서 1945년과 1981년 두 차례 역사결의를 통해 당시 최고 실권자였던 마오쩌둥과 덩샤오핑의 정치적 지위를 공고히 한 바 있다. 지난해 세 번째 ‘역사결의’(당의 100년 분투의 중대 성취와 역사 경험에 관한 중공 중앙의 결의)는 공산당 100년 역사의 중요 사건을 성찰하고 시 주석 장기집권의 당위성을 강조, 신중국 창업 100주년인 2049년에 ‘초강대국’이라는 중화민족의 위대한 부흥을 꿈꾸는 ‘중국몽(中國夢)’을 궁극적 목표로 제시했다. 특히 ‘중국 역사 3단계론’ 즉 신중국을 세운 마오가 중국을 일어서게(站起來) 했고, 개혁개방의 설계사인 덩이 중국을 부유하게(富起來)한 데 이어 시 주석은 중국을 강하게(强起來) 만들었다는 점을 부각, 시 주석의 역사적 위상을 중국 현대사 3대 주역으로 자리매김한 것이다.
시진핑은 지난달 제20차 전대에서 마오쩌둥의 1인 장기 독재의 모순을 절감했던 덩샤오핑이 마오 시대가 초래한 참사에 대한 반성의 성찰에서 확립된 집단지도체제에 종지부를 찍고 종신 영구집권의 길을 열었다. 시진핑은 ‘신시대 중국 특색 사회주의’ 노선에 따라 패권 국가로의 강경 노선을 지속해서 강행할 것을 분명히 했다. 중국 관영언론 CCTV가 이번 전대 개막 직후 내놓은 논평(10월 20일)은 시진핑의 우상화 신격화의 참모습을 여과 없이 보여주었다.
“당의 핵심이자 인민의 지도자이시며 군 통수권자인 시진핑 총서기는, ‘스스로 돌아봐도 잘못이 없다면, 천만인이 가로막아도 나는 전진한다(雖千萬人 吾往矣)’는 불요불굴의 정신과 ‘나 자신을 잃어버리는 경지에 도달해 인민을 저버리지 않는다(我將無我, 不負人民)’는 헌신적 봉사로, 그이가 위대한 마르크스주의 정치가란 점을 입증하시었다. 이와 함께 그는 사상가이자 전략가로서의 넓은 도량과 철저한 역사적 유물론자의 숭고한 풍모로 모든 인민의 찬탄을 자아내고 계시다.”
반동분자로 몰렸던 태자당, 과묵한 성격 형성
‘3세대 영도자’로 등극한 시진핑은 1953년 6월, 중국 공산혁명 ‘8대 원로’이자 국무원 부총리를 지낸 시중쉰(習仲勛, 1913~2002) 아들로 베이징에서 태어났다. 시중쉰은 중국공산당 1세대 원로 가운데 젊은 층에 속하는 인물로 13세에 혁명에 투신했다. 15세 때 학생운동에 가담했다가 국민당 당국에 투옥된 옥중에서 1928년 공산당에 가입했다. 시중쉰은 이후 농민 폭동을 기획했고, 21세에 산시(陝西)와 간쑤(甘肅) 22개 현을 통제하는 ‘산간혁명 근거지’를 꾸려 대장정중인 홍군(인민해방군)을 후방에서 지원했다. 국공내전에서 펑더화이(彭德懷, 1898~1974)와 허룽 (賀龍, 1896~1969)을 도와 서북전장에서 큰 승리를 거둬 ‘서북 왕’이 됐고, 1949년 정부 수립 때 서북 5개 성의 당·정·군을 모두 맡았다.
덕과 재능을 겸비했다는 평판을 얻었던 시중쉰은 1950년대 초반 베이징으로 옮겨와 중앙선전부에서 일했다. 1936년 동료 공산당원 하오밍주와 결혼해 1남 2녀를 낳았지만 1943년 이혼, 이듬해 치신과 재혼해 낳은 2남 2녀 중 셋째가 시진핑이다. 진핑(近平)이란 이름에 ‘핑’(平)이 들어간 것은 과거 ‘베이핑’으로 불렸던 ‘베이징’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작명했다고 하는데, <사기(史記)>의 ‘평이근인’(平易近人·정치를 쉽게 해서 백성에게 친근함)을 원용, 작명했다는 설도 있다.
“그 아들을 모르겠거든 그 아비를 보라.(不知其子 視其父)”는 공자의 말처럼 시 주석은 부친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권력자인 아버지를 둬 ‘태자당(중국공산당 고위 관료의 자제)’이 된 그는 유년기 베이징의 엘리트층 교육시설이던 베이하이 유치원을 다니며 유복하게 성장했다. 그러나 1962년 아홉 살 되던 해 아버지가 숙청되면서 운명은 급변했다. 당시 마오쩌둥 추종 세력이 ‘류즈단(劉志丹)의 일대기’를 엮은 여류소설가의 소설 출판을 도운 시 부총리를 ‘반당(反黨) 문학’ 후원자로 낙인찍어 숙청한 것이다.
‘류즈단’ 사건은 서북 혁명 근거지 창건자인 류즈단의 생애를 묘사한 소설을 작가가 류즈단의 전우였던 시중쉰에게 사전 검토를 맡겼는데, 이 작품에 등장한 또 다른 전우 가오강(高崗, 1905-1954)이 미화됐다는 시비가 일어 논란이 됐다. 시중쉰의 ‘전우’라 할 가오강은 마오쩌둥에 의해 10대 당내 투쟁의 시작으로 반당(反黨) 분자로 찍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시중쉰도 반당 활동 분자로 내몰려 부총리직에서 즉각 해임됐다. 시중쉰은 마오쩌둥에게 농촌으로 가겠다고 부탁했고, 그 청이 받아들여져 1965년 뤄양의 공장으로 하방 됐다.
시진핑도 고위간부 자제들이 다니는 베이징 81학교를 1968년에 마치고, 중학교는 베이징 제25중학교에 다녔으나 문화대혁명으로 ‘반동 집안 자식’이라는 멸시를 받았다. 부친이 당에서 축출된 뒤 수백만 명이 중국 문화의 적으로 낙인 찍히는 등 중국 전역이 폭력과 혼란에 빠진 1966년 문화대혁명이 시작되자 상황은 더 악화했고, 시 부자는 7년 동안 헤어져 지냈다.
미국에 저항하고 조선을 도왔다는 항미원조(抗美援朝) 전쟁이라는 6·25동란 때 지원군 총사령관이던 펑더화이가 1959년 마오쩌둥의 대약진운동(미국 추월을 목표로 한 농공업 개혁 정책)을 비판해 실각당했다. 홍위병들은 시중쉰이 한때 그의 부하로 일한 전력을 들어 ‘반동분자’로 내몰았다.
<뉴욕타임스>는 시 주석의 이복 누나 시허핑은 문화대혁명 당시 홍위병들의 폭행과 모욕을 견디지 못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고 보도했다. 부친의 정치적 숙청과 누이의 자살 등, 가족의 비극이 과묵한 그의 성격 형성에 영향을 미쳤다. 문화대혁명 과정에서 ‘입은 재앙의 문이고, 혀는 몸을 베는 칼’(口禍之門 舌斬身刀)임을 터득한 그는 정치판에서 말, 즉 정치적 레토릭의 중요성을 절감했을 것이다. 부친 시중쉰이 1969년 산시성의 오지마을 량자허로 ‘하방’ 되자 1969년 중학교를 졸업한 16세 되던 해 그는 엘리트 자녀들이 다니는 학교에서 쫓겨나 하방 소년으로 유배 생활을 했다.
중국 북동부 산시성(陝西省)의 오지인 량자허(梁家河)에서 7년 동안 토굴 생활을 한 시진핑은 정규 교육을 받지 못했고, 1975년 22세 때 베이징으로 돌아와 대학에 입학하게 된다. 하방된 ‘지식 청년’ 가운데 모집한 공농병 청강생으로 부친 인맥과 천시(天時), 지리(地利)의 운을 타고 칭화대학 화학 학부에 입학 추천을 받았다.
마오쩌둥이 세상을 떠난 후 차기 지도자인 덩샤오핑이 1978년 부친 시중쉰을 정계로 복귀시켜 당 요직을 맡기자 대학 졸업반이던 스물다섯 청년 시진핑도 뒤늦게 ‘태자당’(당·정·군 고위층 인사 자녀)으로 인정받았다.1979년 시중쉰 건의에 따라 덩샤오핑은 선전, 주하이, 산터우, 샤먼에 경제특구를 설치하기로 확정했다. 오늘의 중국을 빛나게 한 개혁개방 정책에 시중쉰이 깊이 연관됐다는 것은 이후 시진핑에게 두고두고 크나큰 후광으로 작동한다.
시진핑은 1979년 대학을 졸업한 뒤 공산당 정치국원이자 국무원 부총리 겸 중앙군사위원회 상무위원이던 겅뱌오(耿飈) 국방부장 비서가 되어 중앙군사위원회 판공청(辦公廳)에서 현역으로 근무했다. 1982년 군에서 제대한 시진핑은 베이징에서 남쪽으로 300㎞가량 떨어진 허베이성(河北省) 정딩현(正定縣) 부서기를 시작으로 20여 년간 지방을 돌며 실무 경력을 쌓는다. 도서관에서 향토사인 <정딩현지>를 빌려 통독하고 시찰을 통해 주요 상황을 파악했다. 일반적으로 태자당(혁명가의 자녀들)이 교만하고 사치스러운 인상을 준 것과 달리, 시진핑은 낡은 군복에 검정 헝겊신을 신고 자전거를 타고 다니면서 구내식당에서 식사를 해결하는 등 인민들과 함께했다.
그는 정딩현 서기 시절 크게 두 가지 성과를 거뒀다. ‘생산링크 청부제’를 도입해 정딩현 개혁을 허베이성의 모범이 되도록 추진했다. 또한, 드라마 <홍루몽>의 세트장을 정딩현에 유치, 황금알을 낳는 거위를 마련했다. 여기에 삼국지 명장 조운(趙雲)이 정딩현(옛 상산 진정, 常山 眞定) 출신이라는 데 착안해 ‘상산공원’ 등을 건설하여 현지 관광업 발전을 촉진했다. 관련 자료에 따르면 이들 공원 건설로 정딩현은 매년 약 1000만 위안의 관광수입을 거뒀다고 한다.
1990년 5월 시진핑은 개방지역인 푸젠성 푸저우(福州)시 서기로 승진, 2000년까지 푸저우시 인민대표대회 주임, 푸젠성 부서기·부성장·성장 대리·성장 등으로 승승장구했다. 푸젠성장이 되기까지 17년6개월 동안 개혁개방 바람이 가장 먼저 불어 전국 관료들이 선망하는 푸젠성과 광둥성에서 근무했는데, 고위간부였던 부친 후광은 든든한 힘이 됐다.
1997년 중국공산당 제15차 전국대표대회(당 대회)에서 중앙위 후보위원에 당선된 시진핑은 2000년 푸젠성 성장에서 2002년 10월 당 대회 직전 저장성(浙江省) 부서기로 옮겨 성장 대리로 부임했다. 특히 푸젠성 당 위원회 서기, 저장성 당 위원회 서기 재직 시 경제발전에 공을 많이 세우면서 자신의 정치적 입지를 강화한 그는 당 대회가 끝나자 젊고 패기 있는 49세에 정치국원으로 승진하면서 저장성 서기가 됐다.
2006년 9월 상하이시 서기 천량위가 중앙과의 마찰 속에 낙마했고, 당 대회를 불과 몇 달 앞둔 2007년 3월 시진핑은 상하이시(上海市) 서기로 깜짝 발탁됐다. 공청단 세력의 독주를 막고 파벌 간 균형을 도모한 결과라는 풀이가 나왔다. 시진핑은 남동생에게 상하이를 당분간 떠나 있으라고 했다는 말이 전해질 정도로, 이때부터 극도로 몸을 낮췄다. 2007년 11월 제17차 당 대회에서는 당서열 제6위 중앙정치국 상무위원에 올라 ‘포스트 후진타오 시대’의 대표주자로 자리매김했다. 2012년 11월 15일, 중국공산당 제18기 1중 전회에서 당 총서기에 당선된 시진핑은 당 중앙군사위원회 주석직도 후진타오로부터 승계받았다.
시진핑의 집권과정을 보면 초급 간부 시절부터 손자병법의 ‘자신의 의도와 실체를 적에게 노출하지 않는 사람이 이긴다’라는 승패 결정의 핵심인 시형법(示形法)을 익혀 현실 정치에서 실천한 것으로 보인다. 좀처럼 자신의 속내를 드러내지 않는 것으로 유명한 시 주석은 지방에서 조용히 인맥을 쌓으며 자신의 때가 올 것을 믿고 기회를 기다렸다.
박종렬 필자 주요 이력
▷고려대 철학과 ▷중앙대 정치학 박사 ▷동아방송·신동아 기자 ▷EBS 이사 ▷연합통신 이사 ▷언론중재위원 ▷가천대 신방과 명예교수 ▷가천대 CEO아카데미원장
시진핑이 ‘스스로 돌아봐도 잘못이 없다면, 천만인이 가로막아도 나는 전진한다(雖千萬人 吾往矣)’// ‘나 자신을 잃어버리는 경지에 도달해 인민을 저버리지 않는다(我將無我, 不負人民) 이런 사상을 갖고 있는 자라면 “대만 통일론”은 시진핑 3부작- (3)을 기대하겠습니다
시진핑에 모든 것을 학습했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