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병식 칼럼] 꽃다운 생명을 보내며

2022-11-01 14: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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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병식 위원]

이태원 참사를 접하곤 허난설헌(1563~1589)의 ‘곡자(哭子)’를 떠올렸다. 곡자는 자식을 잃고 운다는 뜻이다. 자신도 이른 나이(26살)에 세상을 등진 허난설헌은 불운하게도 두 아이를 앞세웠다. 남매를 차례로 보낸 그는 무덤가에서 피 끓는 심정을 토했다. ‘지난해는 귀여운 딸을 잃고 / 올해는 사랑하는 아들을 잃었네 / 슬프고 슬픈 광릉 땅이여 / 두 무덤 마주보고 있구나 / 백양나무에 으스스 바람이 일고 / 도깨비불은 소나무 숲에서 번쩍인다 / 지전으로 너희 혼을 부르고 / 너희 무덤에 술을 따른다(중략) / 부질없는 황대 노래를 부르며 / 애끊는 피눈물에 목 메인다.’ 자식 잃은 고통이 처절하다.

‘단장지애(斷腸之哀)’는 창자가 끊어지는 고통으로, 자식 잃은 슬픔을 이른다. 새끼 잃은 어미 원숭이 창자가 토막토막 끊어져 죽었다는 고사에서 유래했다. 말 못하는 원숭이가 이럴진대 사람이 느끼는 고통은 더 말할 게 없다. 비슷한 말로 ‘상명지통(喪明之痛)’이 있다. 공자의 제자 자하(子夏)는 자식이 죽자 음식을 끊고 밤낮으로 울다 눈이 멀었다. 이렇듯 자식의 죽음은 눈이 머는 고통이고, 창자 끊어지는 비애다. 이태원 참사에서 자식 잃은 부모들 심정은 이보다 더하면 더했지 못하진 않을 것이다. 이태원 참사는 사고 자체도 황당하지만 ‘세월호’라는 소를 잃고도 외양간을 고치지 못한 대한민국 민낯이다.

경찰 발표에 따르면 사망자(1일 오전 11시 기준)는 156명, 부상자는 151명에 달한다. 외국인 사망자도 14개국 26명이 포함됐다. 사망자 대부분은 20대(104명)에다 여성(101명)이다. 사망자 한 명 한 명마다 사연은 애틋하다. 미국 조지아주 애틀랜타에 사는 스티브 블레시(62)는 아들의 죽음을 전해 듣고 “수억 번을 동시에 찔린 느낌이다. 세상이 무너지는 것 같다”며 애통해 했다. 필자 또한 비슷한 또래 아이를 둔 탓에 예사롭지 않다. 한창 나이에 황망하게 목숨을 잃은 수많은 목숨들 앞에 숙연할 수밖에 없다. 경제규모 세계 10위 서울 한복판에서 155명이란 생때같은 죽음은 어떤 변명으로도 용납되지 않는다.

혹자는 ‘지금은 애도만 하고, 정치적으로 해석하지 말자’고 한다. 죽음을 정치적으로 이용하는 것을 경계하자는 말이다. 죽음조차 정쟁에 활용하는 정치 풍토를 감안할 때 공감한다. 남영희 민주연구원 부원장은 “청와대 이전이 이태원 참사 원인이었다”며 윤석열 대통령과 오세훈 시장 퇴진을 요구했다. 천박한 선동이라는 게 중론이다. 스스로도 문제라고 인식했는지 해당 글은 삭제된 상태다. 정쟁은 자제해도 원인과 책임은 명확히 할 필요가 있다. 사고 원인을 덮어둔 채 애도만 하자는 건 본질을 외면하는 것이다. 수많은 목숨을 앗아간 근본 원인을 따지는 건 망자와 유족을 위로하는 당연한 책무이지 ‘정치적’ 의도와 다르다.

대통령실을 용산으로 옮긴 뒤, 윤 대통령이 사저에서 출퇴근하는 바람에 용산경찰서 가용 인력이 줄고 피로도도 높다는 주장은 일견 수긍이 간다. 하지만 그것을 이태원 참사 원인이라고 단정하는 것 또한 논리적 비약이다. 정치적 성향에 따라 감정적 주장만 앞세운다면 의도하지 않은 가운데 ‘정치적’이라고 비난받을 여지가 있다. 주장과 의견은 미뤄둔 채 냉정하게 근본 원인을 파악해 시스템을 만드는 게 중요하다. 원인이 규명되면 책임 소재를 가리는 건 어렵지 않다. 공권력을 부여받은 국가는 원인 파악과 책임 규명에 나설 책임이 있다. 이는 창자가 끊어지고 눈이 머는 고통에 잠긴 유족들을 위로하는 길이기도 하다.

주지하다시피 핼러윈 축제는 올해가 처음은 아니다. 코로나19 이전 2017년에도 이태원에 20만여 명이 몰렸다는 보도가 있다. 그때는 문제가 없었는데 왜 올해는 대형 참사로 이어졌을까. 의문을 제기하는 건 당연하다. 이는 정치적 의도와 무관하다. 올해는 코로나19 이후 3년 만에 열리는 첫 노 마스크 축제라는 점에서 기대가 높았다. 언론은 10만 명 이상 몰릴 것으로 예측했고 당일 오후 6시 30분부터 이미 이태원 일대는 통제 불능이었다고 한다. 그렇다면 충분한 경찰 병력 배치와 안전 조치는 필수다. 한데 의무를 게을리한 게 아니냐는 의문이 든다. 그렇다면 당연한 책무를 왜 소홀히 했는지 따져볼 필요가 있다.

정치권은 일단 휴전에 합의한 모양새다. 여야는 “정쟁을 자제하자”며 초당적 협력 메시지를 내고 내부 단속에 들어갔다. 대규모 참사 앞에서 정쟁보다 수습에 만전을 기해야한다는 판단에서다. 나아가 여론 향방에 따라 역풍 맞을 수 있다는 계산도 깔렸다. 하지만 휴전은 얼마나 지속될지 미지수다. 원인 규명을 놓고 책임 공방이 제기되기 때문이다. 당장 야당은 경찰 대응 방식을 꼬집고 이상민 행정안전부 장관 발언을 문제 삼고 있다. 민주당 지도부는 “막을 수 있었던 사고”라는 인식을 공유하고 있다. 향후 정치 공방으로 확산될 불씨를 안고 있다. 박근혜 정권 탄핵을 초래한 세월호 트라우마가 있는 여당은 긴장할 수밖에 없다.

국가적 재난을 정쟁 소재로 삼는다면 심각한 사회갈등은 피하기 어렵다. 국가권력에 대한 공적 책임을 묻는 것과 함께 ‘진정한 애도’를 위한 시민의식은 아쉽다. SNS에는 이태원에 간 것을 탓하고, 또 ‘국적도 모르는 남의 나라 축제에서 귀신놀이하다 귀신 됐다’는 조롱도 눈에 뜨인다. 젊음은 죄가 아니다. 희생자들은 또래들과 함께 젊음을 발산하기 위해 이태원 거리를 찾았을 뿐이다. 그들은 어떤 해악도 끼치지 않았다. 오히려 책임을 묻자면 제대로 된 장을 제공하지 못한 기성세대에게 있다. 연대와 공감은 공동체를 유지하는 핵심이다. 우리는 연대하고 공감할 때 참척(慘慽)의 고통 속에 있는 유족과 함께할 수 있다.

이제라도 우리사회가 할 일이 있다면 매뉴얼과 시스템을 정비하는 일이다. 그렇지 않을 경우 제2 세월호, 제2 이태원 참사는 반복될 수밖에 없다. 경제규모 세계 10위, 3050클럽 세계 7번째 가입국에서 언제까지 후진적 참사를 반복할 것인지 뼈아프게 물어야 한다. 꽃다운 생명을 보내며, 자식을 잃고 비통해하는 부모의 심정을 담은 ‘곡자(哭子)’를 바친다.



 

[이태원역 1번 출구 앞에 마련된 분향소에서 미국인 여성이 헌화와 함께 묵념하고 있다/임병식 위원 제공] .



임병식 필자 주요 이력

▷국회의장실 부대변인 ▷국가균형발전위원회 위원 ▷한양대 갈등연구소 전문위원 ▷서울시립대 초빙교수 ▷전북대 특임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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