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톤 실루아노프 러시아 재무장관은 13일(현지시간) "전체 외환보유액 6400억 달러(약 790조7200억원) 중 약 3000억 달러가 서방의 제재로 동결되어 사용할 수 없다"며 "외환보유액 사용을 제한한 비우호 국가들에 대응하기 위해 이들 국가에 대한 채무는 루블화로 상환할 것"이라고 러시아 국영 TV에서 밝혔다. 그러나 루블화로 부채를 상환하겠다는 방안은 사실상 디폴트와 다를 바가 없다고 로이터는 설명했다.
러시아는 16일까지 2개의 달러 표시 채권에 대해 총 1억1700만 달러 상당의 이자를 지급해야 한다. JP모건은 이들 채권은 러시아에 루블화로 지불할 수 있는 선택권을 주지 않는다고 밝혔다. 루블화 상환은 러시아의 일방적인 의견이라는 지적이다. 이날 이자를 지급하지 않더라도 30일간 유예 기간이 있기 때문에 러시아가 즉각 디폴트 상태에 빠지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간 러시아가 채권 이자를 지불하지 않겠다는 의사를 밝힌 것은 물론 이자를 지급하더라도 가치가 폭락한 루블화로 지불하겠다고 밝히며 디폴트 우려는 계속되고 있다.
전문가들은 현재 러시아의 디폴트 가능성을 매우 높게 보고 있다. 크리스탈리나 게오르기에바 국제통화기금(IMF) 총재는 이날 카르멘 라인하르트 세계은행(WB) 수석 이코노미스트에 이어 러시아의 채무불이행이 현실화할 가능성이 있다고 CBS에서 주장했다. 그는 "러시아에서 디폴트 사태가 일어날 수 있다고 생각한다"며 "러시아는 부채를 갚을 돈이 있지만 이에 접근할 수 없다"고 설명했다. 앞서 서방 국가들이 우크라이나 침공을 규탄하기 위해 러시아를 국제은행간통신협회(SWIFT·스위프트) 전산망에서 배제하면서 러시아는 전 세계 200여 개국이 사용하는 1만1000여 개 금융기관과 전자 거래를 하는 데 어려움을 겪게 됐다.
러시아가 디폴트 상태에 빠지면 이는 1917년 볼셰비키 혁명 이후 러시아의 첫 국제 디폴트가 된다. 그러나 러시아의 디폴트가 전 세계적인 금융 위기를 촉발할 가능성은 낮다. 국제결제은행(IIF)에 따르면 러시아에 대한 전 세계 은행들의 익스포저(위험 노출액)는 1210억 달러 수준이다. 무시할 수준은 아니지만, 러시아와 러시아를 제외한 국가들의 은행들 간 재정적 연계가 강하지 않기 때문에 큰 영향을 미치지는 않을 것이라는 설명이다.
그러나 일부 전문가들은 러시아의 디폴트 사태가 가져올 수 있는 나비효과를 경계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찰리 로버트슨 르네상스자산운용 글로벌 수석 이코노미스트는 "시장은 (러시아의 디폴트 가능성으로 인한) 모든 가능성을 평가할 수 없다"고 로이터에 경고했다. 러시아가 원유·천연가스의 주요 생산국이자 산업용 금속과 식품의 주요 수출국인 상황에서 금융위기부터 치솟는 인플레이션까지 모든 가능성이 있다는 설명이다. 또한 "6개월 내에 경기 침체가 올 수 있다"며 러시아의 디폴트 사태가 세계경제에 대한 하방 압력을 높일 수 있다고 주장했다. 골드만삭스에 따르면 현재 전 세계 금융 상황은 2009년 이후 가장 타이트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여러 경제국들 중에서는 중국을 비롯한 신흥국들이 가장 큰 타격을 입을 것으로 전망되고 있다. 스티븐 로치 이코노미스트는 "러시아가 디폴트를 선언하면 중국과 여러 신흥국들에 영향을 줄 수 있다"고 전망했다고 CNBC는 7일 밝혔다. 그는 러시아가 우크라이나에 비인도적인 행위를 자행하고 있는 가운데 중국은 러시아와 긴밀한 협력 관계를 유지할 여유가 없다며 중국이 러시아와 빨리 결별할수록 더 나은 결과를 가져올 것이라고 말했다.
한편 보다 직접적인 문제도 있다. 달러 대신 가치가 폭락한 루블화로 상환받게 되면 러시아에 자금을 대출해준 서방 국가들의 주요 투자은행들은 큰 손실을 겪을 수 있다. 지난 11일 기준 역외시장에서 러시아 루블화 환율은 달러당 135루블까지 급등했다. 1월 초 달러 대비 러시아 루블 환율이 달러당 75루블 수준이던 것을 고려하면 가치가 절반 이상 하락한 것이다. 로이터는 지난 3주간 루블화 가치가 32% 폭락했다고 지적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자산운용사들이 채무를 대신 지급해야 할 경우 이들 운용사들은 큰 손해를 볼 수 있다. 글로벌 자산운용사인 핌코는 지난해 말까지 약 9억4200만 달러 규모의 신용디폴트스와프(CDS)를 투자자들에게 판매했다고 파이낸셜타임스(FT)는 밝혔다. CDS는 디폴트 위험 자체를 거래할 수 있도록 만든 파생상품으로, 채권을 판매한 핌코는 투자채권 원리금을 받을 수 없게 될 경우 이를 물어줘야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