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철스님의 '가로세로'] 어디에 있을지라도 쓸모가 있어야 한다.

2022-03-11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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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철 스님]


사찰주소를 물었더니 네비검색어 ‘천흥사지 오층석탑’을 입력하라고 한다. 늘 도로가 막히는 구간이 많은 경부고속도로는 상습 정체구역인지라 아예 여유를 두고서 일찌감치 길을 나섰다. 언젠가 충남 천안의 모임에 참석하고자 서둘러 길을 나섰음에도 불구하고 약속시간보다 30분 늦게 도착했던 기억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항상 가다 서다를 반복하던 그 도로는 평소와는 달리 계속 제 속도를 유지하며 달리는 바람에 약속장소에 한 시간 이상 일찍 도착했다. 늦게 도착해도 곤란하지만 일찍 도착해도 당황스럽긴 마찬가지다. 과유불급(過猶不及)이라고 했던가. 모자라는 것과 지나친 것은 결국 같기 때문이다.
 
떡 본 김에 제사지낸다고 했던가. 온 김에 그리고 시간이 남는 김에 일행과 즉석에서 답사일정을 짰다. 가까이 높다란 둑이 보인다. 절터 전체를 조망할 수 있겠다는 어림짐작을 하면서 올라갔다. 제방은 생각보다 길었고 저수지 면적도 만만찮다. 1959년 축조된 후 2002년 보강공사를 했으며 물이 가득찼을 때 면적이 4만평에 이른다는 천흥지(天興池)다. 저수지 뒤로 성거산(聖居山 571m)이 보인다. 『동국여지승람』권16 ‘직산현(稷山縣) 산천조(山川條)’에 의하면 고려 왕건이 후삼국 통일을 마무리하기 위해 동분서주하다가 직산 수헐리에서 잠시 쉬고 있을 때 동쪽의 산 위에 오색구름이 나타나자 이에 ‘성스러움(聖)이 서려있는(居) 산’이라고 하면서 성거산으로 이름 지었다고 한다.
 
저수지를 뒤로 하고 앞을 바라보니 멀리 성거읍이 보인다. 오층석탑은 들판에 있는지라 바로 눈에 띄었지만 당간지주는 동네지붕에 가려 제대로 드러나지 않는다. 제방 저편 끝과 연이어진 길을 따라 마을로 내려갔다. 이 골목 저 골목을 더듬으며 몇 차례 모퉁이를 돌다보니 당간지주(보물99호)가 나타난다. 본래 절 입구에 세우는 구조물인데 이제는 아예 마을집이 에워싸고 있다. 조선시대 이종휘(1731~1797)의『동장기(銅檣記)』에 의하면 그 때까지 ‘구리기둥 당간이 있었다’고 한다. 당간은 깃발을 매다는 용도로 사용했다. 현재 당간은 없어지고 화강암으로 만든 지지대만 양쪽으로 남았다. 그래도 여전히 위용이 당당하다.
 
 

[천흥사지 당간지주]


오층석탑 방향으로 발길을 돌렸다. 동네 가운데로 냇물이 흐른다. 천흥천이다. 인근 직산 주변은 옛날부터 금 산지로 유명하다. 성거읍에도 일제강점기에 ‘천흥광산’이란 회사가 있었다고 한다. 또 천흥천에서 사금(砂金)을 채취했다고 한다. 인근 만일사(萬日寺) 관음보살상(충남 유형문화재)은 그 당시 사금캐던 이들에 의해 발견되었다. 이 불상 역시 ‘천흥사’에서 조성했다는 명문이 남아 있다. 저수지, 동네 그리고 과수원까지 포함하는 광활한 부지가 천흥사 경내지였던 것이다. 절터를 금지(金地) 혹은 보방(寶坊)이라고 하는데 그 이름과 딱 맞는 곳이라 하겠다.
 
동네를 지나 개울을 건너고 과수원을 통과하고도 한참을 걸어서 오층석탑(보물354호) 앞에 도착했다. 태조 왕건이 936년 후삼국통일을 기념하며 940년 천흥사를 창건했다. 천(天)은 왕조를 의미한다. 고려왕조의 흥성(興)을 기원하며 지은 이름이다. 동네이름도 저절로 천흥리가 되었다. 인근 천안(天安)의 작명자도 왕건이라고 한다. 모두 당신의 바람이 투영된 이름이다. 절은 조선초기에 폐사된 것으로 추정된다. 풀밭 가운데 탑만 우뚝하다. 이미 대웅전을 비롯한 모든 건물이 없어진 상태인지라 탑이 사찰의 모든 짐을 대신 지고서 견뎌온 세월이 오백여년이다.
 
오층탑 안내판에는 천흥사 동종(국보 280호)이 국립중앙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는 설명을 덧붙였다.
현재 종 표면에는 ‘성거산 천흥사 종명 통화이십팔년 경술이월일(聖居山 天興寺 鐘銘 統和二十八年 庚戌二月日)’라는 기록이 그대로 남아있다. 종을 만든 현종(이름 왕순)은 왕실의 골육상쟁을 피해 숭교사 라는 사찰에서 승려생활을 하였으며 다시 서울 은평구 진관사로 피신하는 등 우여곡절 끝에 왕위를 계승한 인물이다. 통화(統和)28년은 1010년(현종 원년)이다. 통화는 거란족이 세운 요(遼)나라 연호다. 고려는 현종 때 거란족의 침입을 받아 전남 나주까지 피난가는 수모를 당했으며 또 그들의 연호를 사용해야 할만큼 정치적 영향권 아래 있었다는 아픈 역사의 반영이기도 하다. 하지만 내심은 거란족이 빨리 물러가기를 바라면서 호국동종(護國銅鐘)으로 조성했을 것이다.

 

[천흥사 동종과 명문]



이후 종도 사연이 적지 않았다. 절은 없어져도 종의 용도는 여전히 유효했기 때문이다. 사람이건 물건이건 어디로 가던지 쓸모가 있어야 한다. 쓸모가 없다면 무엇이건 바로 폐기되기 마련이다. 서울 종로 탑골공원 원각사(圓覺寺)도 연산군에 의해 강제 폐사되었지만 종은 보신각으로 옮겨가서 한양도성의 성문을 열고 닫는 시간을 알려주는 역할을 맡았다. 천흥사 동종도 마찬가지다.『조선고적도보』에 의하면 이 종은 1920년 무렵 경기도 광주 남한산성 종각에 있었다고 한다. 남한산성에서 살고있는 주민들에게 시각을 알리는 용도로 사용된 까닭이다. 박물관으로 옮겨간 뒤에도 그 인연은 계속 이어져 현재 남한산성 행궁(行宮 왕의 임시 거처 . 별궁) 안에 그 종을 3배 크기로 복원해 놓았다. 천흥사 동종의 본래 출신지인 지역주민도 가만있지 않았다. 2011년 ‘천안 시민종’이라는 이름으로 같은 모양의 종을 제작하여 탄생천년을 기념하는 타종행사를 가졌다. 이렇게 천흥사 고려호국동종은 여러 가지로 변화를 거듭하며 오늘에 이르렀다.

 

[천흥사 동종과 명문]


즉석답사를 마치고 최종 목적지인 작고 소박한 새절 천흥사에 도착했다. 넓은 폐사지 한 켠 언덕자락에 오백년만에 다시 지은 절이다. 천흥사 동종이 호국의 소원을 담은 종에서 출발하여 시간을 알리는 종으로 바뀌었고 이후 다시 이운(移運 옮겨간)된 역사를 기념하는 종으로 ‘쓸모있는’ 변주를 거듭한 것이다. 이처럼 천흥사 역시 다시 ‘쓸모있는’ 사찰로서 새롭게 변주를 시작한 것이리라.




원철 필자 주요 이력

▷조계종 불학연구소 소장 ▷조계종 포교연구실 실장 ▷해인사 승가대학 학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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