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위바위보는 강한 것보다 약한 것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가르쳐준다. 부드러운 ‘보’가 딱딱한 ‘바위’를 이기는 가위바위보의 ‘덕’이 동아시아 평화의 엔진이었다. 하지만 가위바위보는 ‘바위’와 ‘보’만으로는 성립될 수 없다. 대륙인 중국과 섬나라인 일본 사이에 한반도라는 ‘가위’가 존재함으로써 비로소 끊임없이 경쟁하면서도 절대 승자가 없는 아시아의 역동적인 둥근 원이 만들어진다.”
문화부 초대 장관을 지낸 이어령 이화여대 명예 석좌교수가 암 투병 끝에 지난 26일 별세했다. 향년 89세. 빈소는 서울 종로구 연건동 서울대병원 장례식장 1호실에 마련됐으며 발인은 3월 2일 오전 8시 30분이다.
1933년 충남 아산에서 출생(호적상 1934년생)한 고인은 부여고를 나와 서울대와 동(同) 대학원 국어국문학과를 졸업했다. 이후 문학평론가, 언론인, 교수 등으로 활동하며 한국 대표 석학이자 우리 시대 최고 지성으로 불렸다.
1960년 서울신문에 입사한 그는 1972년까지 한국일보, 경향신문, 중앙일보, 조선일보 등 논설위원을 역임하면서 당대 최고 논객으로 활약했다. 1972∼1973년에는 경향신문 파리특파원으로 활동했다.
20대 초반에 문단 원로들의 권위 의식을 질타한 ‘우상의 파괴’를 1956년 한국일보 지면을 통해 발표하며 평단에 데뷔했다. 문학의 저항적 기능을 수행해야 함을 역설함으로써 문단에 큰 반향을 일으켰다.
1966년부터 이화여대 강단에 선 이후 1989년까지 문리대학 교수를 역임한 그는 6공화국 때 문화공보부가 공보처와 문화부로 분리되면서 1990년 출범한 문화부 초대 장관에 임명됐으며 대한민국예술원 회원으로도 활동했다.
다시 강단으로 돌아온 그는 1995∼2001년 국어국문학과 석좌교수를 지냈으며 2011년 이화여대 명예교수가 됐다.
문화예술인으로는 처음으로 문화부를 이끈 고인은 당시 국립국어연구원(현 국립국어원)과 한국예술종합학교 설립, 전통 공방촌 건립, 도서관 업무 이관 등 4대 사업으로 문화정책의 기틀을 마련했다.
1988년 서울올림픽 개·폐회식 대본을 집필했던 고인은 개막식에서 ‘굴렁쇠 소년’을 연출해 깊은 인상을 남겼다.
한국을 대표하는 지성인 그는 대중과 함께했다. <흙 속에 저 바람 속에>(1960)를 비롯해 <축소지향의 일본인>(1984), <이것이 한국이다>(1986), <세계 지성과의 대화>(1987), <생각을 바꾸면 미래가 달라진다>(1997), <디지로그>(2006), <지성에서 영성으로>(2010), <생명이 자본이다>(2013) 등 수많은 저서를 펴냈다.
책에는 시대를 앞서는 통찰이 담겼다. 그는 ‘디지로그’를 통해 디지털 기반과 아날로그 정서가 융합하는 세상을 말하며 비빔밥과 같은 우리 문화와 정서에 조화의 힘이 있다고 강조했다.
고인은 또 개신교 신앙을 고백한 책 <지성에서 영성으로>(2010)를 출간하면서 저술 활동 50년 만에 새로운 내면을 드러내기도 했다. 아울러 소설 <장군의 수염> <환각의 다리>, 희곡 <기적을 파는 백화점> <세번은 짧게 세번은 길게> 등 소설과 희곡, 시집 등도 펴냈다.
문학평론가, 언론인, 교수 등으로 활동하며 한국 대표 석학이자 우리 시대 최고 지성으로 불린 이 전 장관은 한중일비교문화연구소 이사장 재임 당시 ‘한·중·일 문화 국제심포지엄’ 등을 열며 3개국 화합에 크게 일조했다.
2015년 펴낸 <가위바위보 문명론> 한국어판에서는 한국과 중국, 일본의 문화와 관계에 대해 명료하게 설명했다.
고인은 2012년 12월 본지와 인터뷰하면서 “한국·중국·일본은 정치와 경제, 안보 등 여러 분야에서 공통적인 가치를 갖고 있다”며 “공적인 문제를 문화를 공감하거나 지식인의 대화로 풀어낼 수 있다”고 짚었다.
‘한·중·일 문화 국제심포지엄’을 지속해서 보도한 본지에 대해 고인은 “한·중·일 3개어 특판으로 3국 간 우호 행사를 빛내준 아주경제와 아주일보에 감사하게 생각한다”며 따뜻한 격려의 말을 전하기도 했다.
2017년 암이 발견돼 두 차례 큰 수술을 받은 이 전 장관은 항암치료를 받는 대신 저서 집필에 마지막 힘을 쏟았다.
고인은 자신을 ‘이야기꾼’이라 칭하며 한국인의 문화 유전자를 탐구하는 마지막 저작 시리즈 '한국인 이야기' 집필에 몰두해왔다. 12권으로 계획한 시리즈 중 지난해 2월 첫 권인 '너 어디에서 왔니'를 출간했다.
또 ‘이어령 대화록’ 시리즈로 '메멘토 모리'를 펴내는 등 생의 마지막까지 우리 삶의 본질적인 물음에 답했다. 삼성그룹 창업주인 고 이병철 회장이 1987년 별세 한 달여 전에 가톨릭 신부에게 물은 24가지 질문에 대해 고인이 자신의 관점으로 답한 책이다.
고인은 지난해 10월 한국 문학 발전에 이바지한 공로로 금관 문화훈장을 받았다.
사상가 박영호가 쓴 '다석 류영모 어록'에는 잔신즉세(殘燼卽世)라는 말이 나온다. 고인을 떠올리게 하는 말이다.
등잔의 석유가 떨어져서 불이 차차 꺼질 무렵, 다 된 불기운은 거의 배나 불이 환해지면서 아주 꺼진다. 에너지가 있는 대로 다 나와 버린 것이다. 있는 힘을 다 내놓는다. 성냥불도 켜보면 가끔 그러한 현상을 볼 수 있다.
사람도 죽음 직전에는 도로 기운이 난다. 그리하여 이제는 다 나았다고 여길 때 그 이튿날 갑자기 죽어 버린다. 이러한 현상은 끝을 남기지 않는다는 것, 곧 있는 힘을 다 내놓는다는 것을 잔신이라고 한다. 이 전 장관은 마지막까지 세상에 많은 것을 아낌없이 남겼다.
시대의 지성으로 불린 고인을 향한 애도의 물결은 각계각층에서 이어지고 있다.
문재인 대통령은 지난 26일 오후 빈소에서 고인을 추모하고 유족들을 위로했다. 앞서 문 대통령은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이어령 선생님은 우리 문화의 발굴자이고, 전통을 현실과 접목해 새롭게 피워낸 선구자였다”며 “우리가 우리 문화를 더 깊이 사랑하게 된 데는 선생님의 공이 컸다”고 고인을 추모했다.
더불어민주당 이재명 대선 후보는 26일 조문을 마친 후 “한평생 아낌없이 지성과 지혜를 나눠주신 이어령 교수님께서 오늘 우리 곁을 떠나셨다”며 “우리 시대 최고의 지성, 이어령 교수님의 영면을 빈다”고 애도했다. 국민의힘 윤석열 후보도 SNS에 “이어령 교수님은 한국 문화계의 새로운 지평을 연 거인이셨다”고 추모했다.
김기만 전 한국방송광고진흥공사 사장은 “사통오달, 팔방미인 너무 다재다능해서 뭐라고 직업을 쓰기가 어려운 분이다. ‘작가’라는 단어에 자부심이 강했고, 평생 100권 이상의 책을 쓰셨지만 글에 대한 욕심과 긍지는 오만하다고 할 만큼 대단했다”며 “서울 올림픽에서 ‘굴렁쇠 소년’과 ‘벽을 넘어서’로 이미 ‘세계적 창의성’을 보여준 국보(國寶)”라고 회상했다.
이 전 장관 장례는 5일간 문화체육관광부장으로 치러진다. 이 전 장관 영결식은 3월 2일 오전 10시 서울 서초구 국립중앙도서관 국제회의장에서 진행된다.
황희 문체부 장관이 장례위원장, 김현환·오영우 차관이 부위원장을 맡는다. 장례위원으로는 전직 문체부 장관들과 문화예술계·학계 인사가 참여한다.
황희 장관은 지난 26일 빈소를 찾은 자리에서 “1년 전 취임 첫 일정이 영인문학관으로 이어령 전 장관을 찾아뵙는 것이었다”며 “문체부 장관 소임을 1시간 넘게 꼼꼼하게 설명해주셨다. 장관이 되고서 길잡이, 등대 역할을 해주셨다. 앞으로 살면서 남다르게 기억되실 분”이라고 애도했다.
문화부 초대 장관을 지낸 이어령 이화여대 명예 석좌교수가 암 투병 끝에 지난 26일 별세했다. 향년 89세. 빈소는 서울 종로구 연건동 서울대병원 장례식장 1호실에 마련됐으며 발인은 3월 2일 오전 8시 30분이다.
1933년 충남 아산에서 출생(호적상 1934년생)한 고인은 부여고를 나와 서울대와 동(同) 대학원 국어국문학과를 졸업했다. 이후 문학평론가, 언론인, 교수 등으로 활동하며 한국 대표 석학이자 우리 시대 최고 지성으로 불렸다.
1960년 서울신문에 입사한 그는 1972년까지 한국일보, 경향신문, 중앙일보, 조선일보 등 논설위원을 역임하면서 당대 최고 논객으로 활약했다. 1972∼1973년에는 경향신문 파리특파원으로 활동했다.
1966년부터 이화여대 강단에 선 이후 1989년까지 문리대학 교수를 역임한 그는 6공화국 때 문화공보부가 공보처와 문화부로 분리되면서 1990년 출범한 문화부 초대 장관에 임명됐으며 대한민국예술원 회원으로도 활동했다.
다시 강단으로 돌아온 그는 1995∼2001년 국어국문학과 석좌교수를 지냈으며 2011년 이화여대 명예교수가 됐다.
문화예술인으로는 처음으로 문화부를 이끈 고인은 당시 국립국어연구원(현 국립국어원)과 한국예술종합학교 설립, 전통 공방촌 건립, 도서관 업무 이관 등 4대 사업으로 문화정책의 기틀을 마련했다.
1988년 서울올림픽 개·폐회식 대본을 집필했던 고인은 개막식에서 ‘굴렁쇠 소년’을 연출해 깊은 인상을 남겼다.
한국을 대표하는 지성인 그는 대중과 함께했다. <흙 속에 저 바람 속에>(1960)를 비롯해 <축소지향의 일본인>(1984), <이것이 한국이다>(1986), <세계 지성과의 대화>(1987), <생각을 바꾸면 미래가 달라진다>(1997), <디지로그>(2006), <지성에서 영성으로>(2010), <생명이 자본이다>(2013) 등 수많은 저서를 펴냈다.
책에는 시대를 앞서는 통찰이 담겼다. 그는 ‘디지로그’를 통해 디지털 기반과 아날로그 정서가 융합하는 세상을 말하며 비빔밥과 같은 우리 문화와 정서에 조화의 힘이 있다고 강조했다.
고인은 또 개신교 신앙을 고백한 책 <지성에서 영성으로>(2010)를 출간하면서 저술 활동 50년 만에 새로운 내면을 드러내기도 했다. 아울러 소설 <장군의 수염> <환각의 다리>, 희곡 <기적을 파는 백화점> <세번은 짧게 세번은 길게> 등 소설과 희곡, 시집 등도 펴냈다.
문학평론가, 언론인, 교수 등으로 활동하며 한국 대표 석학이자 우리 시대 최고 지성으로 불린 이 전 장관은 한중일비교문화연구소 이사장 재임 당시 ‘한·중·일 문화 국제심포지엄’ 등을 열며 3개국 화합에 크게 일조했다.
2015년 펴낸 <가위바위보 문명론> 한국어판에서는 한국과 중국, 일본의 문화와 관계에 대해 명료하게 설명했다.
‘한·중·일 문화 국제심포지엄’을 지속해서 보도한 본지에 대해 고인은 “한·중·일 3개어 특판으로 3국 간 우호 행사를 빛내준 아주경제와 아주일보에 감사하게 생각한다”며 따뜻한 격려의 말을 전하기도 했다.
2017년 암이 발견돼 두 차례 큰 수술을 받은 이 전 장관은 항암치료를 받는 대신 저서 집필에 마지막 힘을 쏟았다.
고인은 자신을 ‘이야기꾼’이라 칭하며 한국인의 문화 유전자를 탐구하는 마지막 저작 시리즈 '한국인 이야기' 집필에 몰두해왔다. 12권으로 계획한 시리즈 중 지난해 2월 첫 권인 '너 어디에서 왔니'를 출간했다.
또 ‘이어령 대화록’ 시리즈로 '메멘토 모리'를 펴내는 등 생의 마지막까지 우리 삶의 본질적인 물음에 답했다. 삼성그룹 창업주인 고 이병철 회장이 1987년 별세 한 달여 전에 가톨릭 신부에게 물은 24가지 질문에 대해 고인이 자신의 관점으로 답한 책이다.
고인은 지난해 10월 한국 문학 발전에 이바지한 공로로 금관 문화훈장을 받았다.
사상가 박영호가 쓴 '다석 류영모 어록'에는 잔신즉세(殘燼卽世)라는 말이 나온다. 고인을 떠올리게 하는 말이다.
등잔의 석유가 떨어져서 불이 차차 꺼질 무렵, 다 된 불기운은 거의 배나 불이 환해지면서 아주 꺼진다. 에너지가 있는 대로 다 나와 버린 것이다. 있는 힘을 다 내놓는다. 성냥불도 켜보면 가끔 그러한 현상을 볼 수 있다.
사람도 죽음 직전에는 도로 기운이 난다. 그리하여 이제는 다 나았다고 여길 때 그 이튿날 갑자기 죽어 버린다. 이러한 현상은 끝을 남기지 않는다는 것, 곧 있는 힘을 다 내놓는다는 것을 잔신이라고 한다. 이 전 장관은 마지막까지 세상에 많은 것을 아낌없이 남겼다.
시대의 지성으로 불린 고인을 향한 애도의 물결은 각계각층에서 이어지고 있다.
문재인 대통령은 지난 26일 오후 빈소에서 고인을 추모하고 유족들을 위로했다. 앞서 문 대통령은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이어령 선생님은 우리 문화의 발굴자이고, 전통을 현실과 접목해 새롭게 피워낸 선구자였다”며 “우리가 우리 문화를 더 깊이 사랑하게 된 데는 선생님의 공이 컸다”고 고인을 추모했다.
더불어민주당 이재명 대선 후보는 26일 조문을 마친 후 “한평생 아낌없이 지성과 지혜를 나눠주신 이어령 교수님께서 오늘 우리 곁을 떠나셨다”며 “우리 시대 최고의 지성, 이어령 교수님의 영면을 빈다”고 애도했다. 국민의힘 윤석열 후보도 SNS에 “이어령 교수님은 한국 문화계의 새로운 지평을 연 거인이셨다”고 추모했다.
김기만 전 한국방송광고진흥공사 사장은 “사통오달, 팔방미인 너무 다재다능해서 뭐라고 직업을 쓰기가 어려운 분이다. ‘작가’라는 단어에 자부심이 강했고, 평생 100권 이상의 책을 쓰셨지만 글에 대한 욕심과 긍지는 오만하다고 할 만큼 대단했다”며 “서울 올림픽에서 ‘굴렁쇠 소년’과 ‘벽을 넘어서’로 이미 ‘세계적 창의성’을 보여준 국보(國寶)”라고 회상했다.
이 전 장관 장례는 5일간 문화체육관광부장으로 치러진다. 이 전 장관 영결식은 3월 2일 오전 10시 서울 서초구 국립중앙도서관 국제회의장에서 진행된다.
황희 문체부 장관이 장례위원장, 김현환·오영우 차관이 부위원장을 맡는다. 장례위원으로는 전직 문체부 장관들과 문화예술계·학계 인사가 참여한다.
황희 장관은 지난 26일 빈소를 찾은 자리에서 “1년 전 취임 첫 일정이 영인문학관으로 이어령 전 장관을 찾아뵙는 것이었다”며 “문체부 장관 소임을 1시간 넘게 꼼꼼하게 설명해주셨다. 장관이 되고서 길잡이, 등대 역할을 해주셨다. 앞으로 살면서 남다르게 기억되실 분”이라고 애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