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완구 전 국무총리가 14일 지병으로 별세했다. 향년 71세.
고인은 충남 홍성군에서 태어나 양정고를 졸업하고, 성균관대 재학 중 행정고시(15회)에 합격했다.
이완구라는 이름이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1990년대 충북과 충남에서 지방경찰청장을 지내면서부터다.
이후 1995년 2월 경찰복을 벗은 고인은 민주자유당에 입당해 정치에 입문했다. 이듬해 총선에서 신한국당 후보로 청양·홍성에 출마해 15대 국회의원에 당선됐다. 당시 유일한 신한국당 의원이었다.
고인은 1998년 김종필(JP) 총재가 이끌던 자유민주연합으로 당적을 옮겨 대변인과 원내총무를 지냈다. 당시 JP는 "번개가 치고 먹구름이 올지 천둥이 올지 아는 사람"이라며 고인을 아꼈다. 한때 '포스트 JP'로 불리기도 했다.
굴곡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2000년 총선에서 2선에 성공한 고인은 2004년 17대 총선에는 출마하지 않았다. 잠시 미국으로 건너가 생활했으며, 귀국 후 한나라당 공천을 받아 2006년 지방선거에서 충남지사에 당선됐다.
박근혜 정부와 연을 맺은 것은 이로부터 3년 후였다. 이명박 정부가 2009년 세종시 원안을 바꿔 정부부처 대신 기업을 입주시키려 하자 이에 반대해 지사직을 내려놨다. 박 전 대통령(당시 국회의원)과 뜻을 같이하게 된 계기였다.
하지만 2012년 다발성골수종이라는 혈액암에 걸려 투병생활을 해야 했다. 이후 고인은 박 전 대통령 집권 당시 2013년 4월 재·보궐선거에 출마해 충남 부여·청양에서 당선, 19대 국회에 발을 들였다. 3선이었던 고인은 2014년 5월 새누리당 원내대표로 추대돼 세월호특별법 제정안을 여야 합의로 통과시키는 등 정무감각을 발휘했다.
그리고 2015년 1월 박 대통령으로부터 총리 후보자로 지명됐다. 인사청문회에서 부동산 투기, 차남 병역, 언론사 외압 의혹 등이 논란이 돼 가까스로 국회 임명동의안을 얻었다. 다만 취임 직후 이른바 '성완종 리스트' 사건이 터지면서 63일 만에 총리직에서 물러나 역대 최단명 총리로 기록됐다. 이후 2017년 12월 대법원에서 무죄 확정판결을 받았다.
고인은 완치됐던 다발성골수종이 최근 재발해 투병생활을 다시 해야 했다. 결국 이겨내지 못하고 눈을 감았다. 빈소는 서울성모병원 장례식장에 마련될 예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