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을 그리는 매 순간 관념을 떨치고 순수한 행위만을 행하고자 노력하지만, 자아는 늘 예기치 못한 순간에 개입합니다. 빈 캔버스를 응시하는 순간마다 끝없이 두려워하고 긴장하며, 삼매의 경지에 이르리라는 노력을 멈출 수 없는 이유입니다.”
그림에 몰입하기 위해 작가 김길후(60)는 끊임없이 자아를 지운다. 수행 같은 작업을 통해 완성한 김 화백의 작품이 관객을 만난다.
학고재가 여는 김길후의 첫 번째 개인전이다. 김길후가 역동적인 붓질로 그려낸 근작 회화와 조각 작품을 다채롭게 선보인다. 김길후는 지난 4월 제11회 한국미술평론가협회 작가상을 받으며 국내 미술계의 주목을 새롭게 받고 있다.
지난 21일 개막한 이번 전시는 이 수상을 기념하는 자리이기도 하다. 한국미술평론가협회 위원장인 최형순 제주도립김창열미술관 관장은 “시공간에 얽매이지 않는 거침없는 필선의 속도가 강력하다”며 “붓이 머금고 있는 물감 묽기는 스스로도 흘러내릴 듯 자유롭고 작가의 붓 길도 거침없게 해 주고 있다”고 평했다.
◆혼돈의 밤: 원시의 혼돈을 가로지르는 김길후의 붓
1999년, 김길후는 자신의 작품 1만6000여 점을 불태웠다. 기존의 방식을 청산하고 완전히 새로운 화면을 추구하겠다는 선언이었다. 2013년도에는 이름을 김동기에서 김길후(金佶煦)로 개명하기도 했다. 작가로서의 정체성을 탈바꿈하려는 시도의 연장선이다.
김길후는 “예술 표현의 핵심은 작품을 통해 자아를 실현하겠다는 욕구를 지우는 데 있다”고 믿는다. 순수한 아이의 마음으로 돌아가 “노동과 놀이가 일치된 상태이자, 의무감에서 벗어나 오로지 자신을 위하여 행하는 행위”를 행해야만 진정한 예술적 표현에 다가갈 수 있다는 생각이다.
이번 전시의 제목인 ‘혼돈의 밤’은 만물의 소생에 앞선 원시적인 상태를 가리킨다. 김길후는 관습을 잊고 본성의 마음으로 회귀하고자 노력한다. 구상과 추상 사이에 있는 김 화백의 작품은 보는 이에 따라 다양한 해석이 가능하다.
그의 작업 과정은 특별하다. 김 화백은 “그림을 그릴 때 가장 중요한 것은 작가의 호흡과 숨결이다. 내 자아에 통제받지 않기 위해 15cm 크기의 평붓으로 순식간에 선을 그려낸다. 붓의 속도를 느끼며 그린다. 붓으로 화면을 치기도 하고 힘을 주고 그리기 때문에 붓이 자주 부러지기도 한다”라며 “색별로 개별 붓을 사용하기보다 하나의 붓을 사용한다. 의식적으로 색을 사용한다기보다, 붓에 묻어 나오는 색이 화면에서 보이는 것 같다. 의식적인 통제를 최소화하기 위함이다”라고 설명했다.
그는 작가노트를 통해 장자의 ‘포정해우(庖丁解牛)’라는 우화를 소개했다. 포정(백정)은 19년이라는 세월 끝에 소를 잡는 방법을 터득했다. 칼을 망가뜨리지 않으며, 소에게 고통조차 주지 않는 경지였다. 포정은 완벽에 도달한 것일까?
그렇지 않았다. 포정은 “비록 도축에 능숙하다 한들, 매번 살과 뼈가 엉킨 자리에 이르러 또 다른 어려움에 처한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도덕경에서 노자는 “도는 이루기 어렵지만 지키기는 더 어렵다”라고 했다. 김 화백은 “그림을 그릴 때에도, 호흡을 취득하기 어려우나 그것을 체득하기가 더 어렵다”고 설명했다.
김 화백은 자아에 통제받지 않기 위해 15cm 크기의 평붓으로 순식간에 선을 그려낸다. 색별로 개별 붓을 사용하기 보다 하나의 붓을 사용한다. 의식적인 통제를 최소화하기 위해서다.
윤진섭 미술평론가는 “숱한 덧칠로 이루어지는 서양의 그림과는 달리 김길후의 그림은 일획으로 이루어진다”고 언급하며, 그의 “전광석화처럼 이루어지는” 붓질이 “한국의 사극에 등장하는 검객의 칼 솜씨”와 같다고 비유했다.
◆김길후의 최근 작품세계를 집중적으로 조명하는 전시
이번 전시는 김길후가 수년간 연마해온 예술적 표현의 결실을 내보이는 자리다. 최근까지 중국 베이징에 거점을 두고 작업한 김길후의 작품세계를 국내에서 조명할 기회가 상대적으로 적었던 것이 사실이다.
김길후는 자신만의 독창적인 화면으로 중국 미술계 내에서도 꾸준히 두각을 드러내왔다. 지난 2014년에는 베이징 화이트 아트박스 가 김길후의 대규모 개인전 ‘심인(心印) – 김길후의 회화’(2014)를 개최했다. 당시 왕춘천(王春辰·중국 중앙미술학원 미술관 학예연구부장)이 전시 기획을 맡았다. 왕춘천은 ‘제55회 베니스 비엔날레’(2013)의 중국관 예술감독을 역임한 전시 기획자(큐레이터)다.
김길후는 최근 국내 미술계의 주목을 새롭게 받고 있다. 올해 4월, 제11회 한국미술평론가협회 작가상을 받은 것이 계기가 됐다.
2009년 첫 수상자로 조각가 정현을 배출한 이후 매년 예술성과 독창성이 돋보이는 작가를 선정하여 시상하는 상이다.
학고재 아트센터에서 열리는 이번 전시는 김길후가 2021년에 제작한 회화 19점 및 2014년도에 그린 회화 1점, 2019년부터 2021년까지 제작한 삼발이형 인물상 3점 등 총 23점의 작품을 선보인다. 학고재 오룸(OROOM)에서 동시 개막하는 온라인 전시에서는 오프라인 전시에 포함되지 않은 작품들을 포함하여 총 42점의 회화를 살펴볼 수 있다.
김 화백은 1961년 부산에서 태어났다. 1988년 계명대 회화과 졸업 후 1996년 동 대학원에서 석사 학위를 받았다. 2005년 SAC 젊은 작가상을 수상하여 같은 해 예술의전당 한가람미술관에서 개인전을 열었다.
2014년, 베이징 화이트 아트박스에서 대규모 개인전을 개최했다. 포항시립미술관(포항), 송장당대문헌전시관(베이징), 복합문화공간 에무(서울) 등 국내외 기관에서 개인전을 선보였으며 서울시립미술관(서울), 대구미술관(대구), 울산문화예술회관(울산), 봉산문화회관(대구), 소카 아트센터(베이징), 전주문화예술회관(전주), 우봉미술관(대구) 등이 개최한 단체전에 참여했다.
2021년 제11회 한국미술평론가협회 작가상을 수상했으며, 국립현대미술관 미술은행(과천), 서울미술관(서울) 등에서 작품을 소장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