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과학기술원(KAIST·카이스트)이 인공지능(AI)·소프트웨어(SW)와 반도체 관련 분야에 1년짜리 '미니 석사과정'을 신설한다. 대학 차원에서 정부의 대학 정원 제한에 영향을 받지 않는 방식으로 국내에 부족한 융합형 인재를 양성, 코로나19 사태 이후 더욱 급격해진 디지털 경제 도래의 가속화와 앞당겨진 산업계의 디지털 전환 흐름에 대응한다는 방침이다.
이광형 카이스트 총장은 11일 본지와의 인터뷰에서 "각 대학 정원이 제한돼 있는 상황에서 대학이 우리나라 사회에서 필요한 인재를 못 길러내 산업계가 인재 부족 문제를 호소하고 있다"며 "그래서 우리는 '마이크로 학위(micro degree)'를 만들려고 하는데, 미니 석사과정 비슷한 것"이라고 말했다.
이 총장은 AI·SW 분야와 반도체 분야에 카이스트의 마이크로 학위 제도를 우선 운영할 예정이라고 언급했다. 그는 이어 "우리 산업계에 필요한 인재를 육성하고, 실업자를 구제해 주고, (구인난이 해소될) 기업에도 좋을 것"이라면서 "학비를 내게 하고 정식 학생처럼 다닐 수 있게 하겠지만, 정식 학위가 아니어서 정부의 (대학별로 제한된) 정원에는 관계가 없다"고 덧붙였다.
마이크로 학위는 특정한 기술 역량과 직무 수행능력을 포함하는 전문성을 나타낼 수 있도록 구성된 고등교육을 이수했음을 증명하는 제도로, 기존 대학의 학사·석사·박사 등 정규 학위 제도와는 구별된다. 통상적인 대학원의 석사 학위 교육 과정은 일반적으로 2년간 전공 수업을 듣고 학점을 이수해야 졸업할 수 있지만, 카이스트에 도입될 마이크로 학위는 그보다 짧은 1년짜리 과정으로 운영된다.
이 총장은 "우리가 (마이크로 학위 과정 운영을) 시범적으로 하고, 잘되면 다른 대학에도 많이 적용해서 1년에 1000~2000명씩 인재를 길렀으면 좋겠다"고 언급했다.
외국의 주요 마이크로 학위 운영 사례로 미국 매사추세츠공과대학(MIT)이 운영 중인 'MITx 마이크로마스터' 프로그램이 있다. 이는 대규모 온라인 학습(MOOC)인 'MIT 오픈러닝'의 강의를 듣는 전 세계 수강생들에게 학습 이력과 시험 기반의 인증을 거쳐 비정규 학위 인증서와 학점을 부여한다. 수강생은 MITx 마이크로마스터 프로그램 이수 학점을 MIT와 제휴한 각국 대학의 석사과정에 진학할 때 정규학점으로 인정받아 석사 학위를 조기에 취득할 수 있다.
"의전원 설립해 ‘연구하는 의사’ 배출... 한국의 화이자·모더나 키워 제2 코로나 대비해야"
이광형 총장은 올해 3월 취임 일성으로 의학전문대학원 설립을 강조했다. ‘연구하는 의사(의사 과학자)’를 배출하기 위해서다. 그는 진료·수술하는 의사만 배출되고, 의사와 엔지니어가 융합 연구를 하지 못하는 현 상황에서 제2, 제3의 코로나19를 대비할 수 없다고 지적했다. 그는 카이스트가 의사 과학자를 배출해 제약·바이오 산업을 일으키면, 궁극적으로 한국에서도 화이자, 모더나, 아스트라제네카 같은 다국적 제약사가 탄생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그는 의전원 설립을 위해 정부와 국회를 적극적으로 설득하고 있다. "의사를 자꾸 배출한다"라는 의료계 지적에 대해선 "의사와 경쟁하는 의사를 키우는 게 아니라 연구소, 교수 등을 배출하는 게 목표"라고 강조했다.
-취임 초부터 의전원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이공계 연구중심의 특수대학인 카이스트에 왜 의전원이 필요한가.
“한국의 최대 현안이 코로나19 백신 확보다. 왜 이런 일이 벌어졌는지를 살펴봐야 한다. 국내 산업 지형을 산과 비교해보면, 반도체와 자동차, 조선 등이 높은 산이다. 우리는 그 산에 올라가서 먹거리를 만들어내고 있다. 그러나 우리가 잘 아는 산에만 올라가다 보니 뒤에 에베레스트라는 큰 산이 있는지 모른다. 의료, 바이오 산업이 바로 그것이다. 그곳에 오르면 신약과 약품, 의료기기가 있다. 반도체 산보다 높이가 두 배나 높다. 국내 병원에서 사용하는 기기 중 국산 비중은 10%밖에 안 된다. 미국의 경우 대학에서 기본 아이디어가 나오고 기초 기술을 연구한다. 연결된 병원과 임상시험을 진행한다. 모더나, 화이자 같은 기업은 이를 상용화한다. 우리나라는 대학과 병원이 완전히 분리돼 있다. 의과대를 보유한 학교에서 의과대 교수와 공과대 교수가 같이 연구하는 모습을 찾아볼 수 없다. 의대 졸업자가 셀트리온 같은 회사에 가는 경우도 없다. 벽이 쫙 갈라져 있기 때문이다. 한국 정부는 이전부터 연구하는 의사의 필요성을 인식해 서울대 의대에 MD PHD(연구중심 의사 과학자) 프로그램을 만들었다. 신청하면 장학금을 받는 조건이 붙는데, 신청자가 거의 없다. 서울대 의대에서 매년 135명이 졸업하는데 지원자는 1~2명뿐이다. 축구를 하면 팀을 잘 짜야 하는데, 중간에 패스를 잘해주는 사람이 없는 상황이다. 그래서 공대에서 의사를 키워야 한다.“
-의전원 설립을 떠올린 계기가 있나.
“의료, 바이오 산업은 국내 자동차 산업보다 두 배 크다. 우리나라도 할 수 있고, 의사들이 같이 만들어줘야 한다. 우리가 어떻게 자동차, 반도체 시장서 두각을 드러냈는지 생각해봐야 한다. 반도체는 미국 인텔, 마이크론 등이 강자였고, 도시바와 파나소닉 같은 일본 업체들이 비집고 들어왔다. 고(故) 이병철 삼성그룹 회장이 1980년대에 반도체 사업을 추진할 때 다 반대했다. 당시 제조 기술이 없었는데도 해냈다. 의료기기도 한국이 더 잘 만들 수 있다. 10년이면 충분하다. 2001년 전산학과 교수 시절, 미래학문 분야 인재 양성을 위해 바이오및뇌공학과 신설을 주도했다. 피로회복제 ‘박카스’, 영양제 ‘우루사’ 정도가 두각을 보일 때였다. 그 당시 ‘산업이 없는데 졸업생을 실업자 만들 일 있냐’는 비판을 들었다. 이에 인력을 키우면 산업을 일으킬 수 있다고 답했다. 안 된다는 이유를 대면 수천 가지다. 신념과 뜻을 세우고 미래를 예측해야 한다. 과거 고(故) 정주영 현대그룹 회장이 500원짜리 지폐와 백사장 사진만으로 선박을 수주하고 영국으로부터 차관을 받아 조선 산업을 일으켰다. 이 신화보다는 (의료·바이오 산업을 일으키는 게) 쉬울 것이라고 생각한다.”
-한국은 왜 연구하는 의사가 없나.
“우리 의식이 일류가 아니라서 그렇다. 미국 같은 선진국에선 대학을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한 인재는 대기업 취직 대신 회사를 만든다. 남의 밑에서 일하기를 싫어한다. 우리나라 인재는 시험 보고 회사 취직하는 게 더 좋다고 생각한다. 그게 가장 큰 차이다. 의과대에도 이게 적용된다. 항공 산업을 예로 들면, 비행기를 설계하는 사람이 있고, 비행기를 조종하는 사람이 있다. 새로운 비행기를 만드는 사람이 더 가치가 있다. 한국에선 남이 만들어놓은 약품, 의료기기만 가지고 ‘조종을 잘하겠다’는 의사가 99%다. 사실 의약품, 의료기기 개발로 성공해 돈을 많이 번 사례가 없어서 그렇지, 성공하면 의원 개업보다 더 많은 돈을 벌 수 있다. 선진국에선 그 길이 있고, 관련 산업이 있다. 의사 중에서 연구직, 교수직을 하거나 기업에 취업하면 월급이 줄어든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 이는 착각이다. 세상이 바뀌어 가고 있어 인식의 전환이 필요하다. 제약회사도 삼성전자, 구글처럼 충분히 가치가 있다. 가치를 어디에 두느냐가 중요하고, 결정을 위한 대단한 용기가 필요하다."
-의전원 설립이 가능할까. 국내엔 어떤 움직임이 있나.
“임기 중에 될 거라고 본다. 코로나19 같은 감염병이 이걸로 끝이 아니라 2~3년에 한 번씩 오고 백신도 매년 맞아야 할 수도 있다. 돈이 문제가 아니다. 당장 필요한 인재를 길러야 한다. 다만 현직 의사들이 ‘또 의사를 배출하냐’고 반발할 수도 있다. 카이스트는 의사와 경쟁하는 의사를 키우는 게 아니라 연구소, 교수 등을 배출하는 게 목표다. 정부와 국회를 설득하고 있다. 5분만 얘기해보면 대체로 다들 공감한다. 의사협회가 걱정된다는 말이 나온다. 기업들은 당연히 적극적으로 찬성한다. 셀트리온 같은 회사에 의사가 몇 명이나 있을까. 화이자엔 의사가 수없이 많다. 의사가 연구를 해야 한다. ‘굳이 의사를 둬야 하냐’는 지적이 있는데, 의료 데이터에 접근하기 위해 의사면허증이 있어야 한다. 의사 커뮤니티에 속해야 그들과 실험도 같이 할 수 있다. 카이스트에 의전원이 설립되면 박사 과정까지 만들 것이다. 7년 정도 공부시키고, 졸업 후 10년간 병원 개업 대신 임상시험을 하게 된다. 화이자나 아스트라제네카로 인재가 유출될 수도 있지만, 그들의 기술을 배워 돌아오면 된다. IT 인재들도 구글 등에 많이 갔다가 돌아온다.”
"인재 부족, 대학 경직성 때문...문제 풀기보다 만들 사람 있어야"
이광형 카이스트 총장은 산업계 전반의 AI·SW 인재 부족의 원인으로 "가장 큰 건 '대학의 경직성'이 문제"라고 진단했다. 외국 대학에선 학생들이 어느 학과를 원하느냐에 따라 해당 전공자 수가 결정되지만, 국내 대학 대다수는 학과별 정원이 있어 사회가 필요한 인재를 충분히 배출하지 못하고 있다는 지적이다. 그는 "(대학 교육에서) 학생이 첫째고, 교수는 학생을 위해 존재한다"라며 "학생이 입학할 때 희망하는 전공을 선택할 수 있게 하는 것이 글로벌 스탠더드"라고 강조했다.
-최근 AI·SW 인재 부족의 원인이 뭐라고 보나.
"가장 큰 건 대학교의 경직성이 문제가 아닐까 싶다. 국내 대학교수 80% 이상이 아마 외국에서 박사학위를 받았을 텐데 외국에서 박사학위 받고 태평양, 대서양 건너오다가 (바다에) 빠뜨리는 게 있다. 외국 대학에는 정원이 없다는 사실이다. 학생이 (학과를) 선택하는 것이지. 근데 그걸 딱 빼먹고 와서 한국에 학과를 만들어서 다 정원이 있다. 과별로 정원이 정해져 있으니까, 사회가 필요한 숫자만큼 인재를 못 키운다. 학생들이 첫째고, 교수는 학생을 위해 존재한다. 카이스트는 시작할 때부터 정원이 없다. 입학하면 자기가 정한다. 원자력학과처럼 지원자가 5~6명인 곳이 있고 200명씩 되는 전산학과도 있다. 희망하면 가니까. 그게 글로벌 스탠더드다. 학생이 입학할 때 자유롭게 선택하게 두면 된다. 한국에선 카이스트를 비롯한 과학기술원들만 이렇게 한다. 그런데 일반 대학교수들은 그 얘기 절대 안 한다. 듣고 보면 너무 좋지 않나. 그게 학생 중심이다. 외국에선 이미 이렇게 하고 있다. (교수들이) 외국에서 좋은 거라고 다 배워오는데 건너오다 비행기에서 빠뜨리는 거다."
-미래에는 어떤 인재가 필요할까.
"전부터 그래왔고, 앞으로도 계속 고유한 빛깔을 내는 돌(원석)을 찾고 있다. 점수만 높은 사람을 원하지 않는다. 책을 많이 읽고 다양한 경험을 쌓은 사람들을 중요하게 여긴다. 일류가 돼야 하지만, 노벨상이나 어떤 상을 받겠다는 것만으로 달려들면 안 된다. 카이스트가 추구하는 일류는 남들이 하지 않는, 새로운 걸 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 세상에 없는, 최초인 것을 해야 한다. 카이스트에선 모든 교수와 학생들에게 '남이 하는 걸 하지 말라'고 하고, 이 세상에서 최초인 것을 하나씩 하고 있도록 권한다. 하지만 학생들에게 이런 게, '창의적이 돼라'는 게, 실질적으로 와닿지 않는 얘기일 수 있다. 좀 더 구체적으로 '질문을 하라'고 요구한다. 학교에서나 가정에서 이런 질문을 하는 사람을 칭찬해 주고 키워 줘야 한다. 새로운 것을 알고자 하는 것이니까. 노벨상 수상에 더 다가가는 길은 '새로운 문제를 만드는 것'이다. 대세에서 벗어나 딴짓을 하는 사람을 키워야 한다. 어려서부터 문제를 만들어내고 질문을 하는 사람을 많이 칭찬해야 한다."
-문제를 잘 만들어내고 질문을 잘하려면.
"아이들에게는 호기심과 관찰력이 있어야 하고, 질문이 중요하다는 것을 아이들에게 인식시켜야 한다. 부모들이 자녀 데리고 어디 다녀오면 아이가 '이것 뭐야, 저것 뭐야' 하고 반복해 묻곤 하는데 그러면 대답해 주다가도 서너 번 계속되면 짜증을 내기도 한다. 아이가 밖에서 해보고 싶어하는 것이 많을 텐데 '하지 마'라는 말도 입에 달고 있다. 그런 얘길 계속 들으면 새로운 걸 하면 안 되는 거라고 생각하게 된다. 대한민국의 노벨상을 막는 거다. 어린 학생들 가르치는 선생님이나 가정에서는 질문을 잘 하도록 해야 한다. 얼마 전 (유은혜) 교육부 장관에게 모든 학교 졸업식에서 '질문 제일 잘 하는 질문왕 학생을 뽑아서 장관상을 주자, 그럼 나라가 바뀔 것'이라고 말했다. 그 자리에서 좋다고 했지만, 실행은 쉽지 않은가 보더라. 한 달 전쯤 만났더니 '총장님 숙제가 잘 안됐어요'라고 했다."
-그런 인재를 기르기 위한 카이스트만의 방식이 있나.
"카이스트는 이번 학기부터 시험 볼 때 마지막 문제로 학생들에게 '문제를 출제하라'는 문제를 내고 있다. '시험문제 5번' 해놓고 빈 칸으로 준다. 문제를 학생이 만들고 자기가 푸는 건데, 새로운 문제를 만들 수 있는 능력을 보는 거다. 교수일 때 시험에 이 문제를 내면 3분의1은 답을 백지로 냈다. 한 학기의 수업을 듣고 완벽하게 이해하지 않으면 잘 못 만든다. 지난 1학기 때 좋은 문제 만든 학생들을 각 학과에서 추천받으니 20여명이 나왔는데 조만간 상을 주려고 한다. 이런(문제를 잘 만드는) 게 좋은 거구나 알도록 하려고. 문제를 만들게 하는 시험문제는 세상에 없는 방법이고 카이스트 학생이라서 하는 것이니까 학생들에게 자긍심도 생길 거라고 본다. 교수 시절에 '미존(未存)'이라는 수업도 했다. 매주 와서 이 세상에 없는 것을 얘기해야 하는 수업이다. 학생들은 계속 없는 걸 찾고 상상해야 하고, 교수는 채점만 한다. 어디서 들어본 적이 있는 것 같은 걸 얘기하면 감점을 주는 식이다."
◆이광형 카이스트 총장은 어떤 사람?
이광형 카이스트 총장은 1990년대 카이스트 전산학과 교수 시절 김정주(넥슨), 김영달(아이디스), 신승우(네오위즈), 김준환(올라웍스) 등 국내 1세대 벤처 창업가들을 배출한 벤처 창업 대부이자 학제 간 융합연구의 중요성을 강조해온 미래학의 선구자다. 1985년 프랑스 INSA Lyon 전산학 박사 과정을 마치고 카이스트 전산학과 교수로 임용돼 카이스트 교학부총장, 교무처장, 국제협력처장, 과학영재교육연구원장, 비전2031위원회 공동위원장 등 다양한 교내 보직을 거쳤고 올해 2월 제17대 카이스트 총장으로 선임됐다. 2001년 정보통신기술(ICT)과 바이오 분야 융합을 주장하며 카이스트에 '바이오및뇌공학과'를 설립했다. 2009년 지식재산대학원·과학저널리즘대학원을, 2013년 국내 최초 미래학 연구기관인 '문술미래전략대학원'을 설립했다. 현재 한국과학기술한림원과 한국공학한림원 정회원이며 대통령소속 국가교육회의 위원, 국방부 국방개혁자문위원, 카이스트 전산학과·바이오및뇌공학과 교수, 문술미래전략대학원 미래산업 초빙 석좌교수다. 백암학술상(1990년), 정보문화진흥상 국무총리상(1999년), 프랑스정부 Chevalier 훈장(2003년), 국가과학기술위원회 위원장상(2012년), 대한민국 국민훈장 동백장(2016년), 대한민국 녹조근정훈장(2020년)을 받았다.
[대담=한준호 IT모바일부장, 정리=임민철·정명섭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