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찾아온 메타버스] ① 익숙한 미래일까, 낯선 과거일까

2021-06-14 0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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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여년만의 유행…애플도 메타버스 '탑승'

"MZ·α세대 일찍 경험…산업 성장성 기대"

하드웨어기술 발전, '안전함' 욕구 맞물려

나의 분신 '아바타', 메타버스 속 공통분모

현실의 디지털화 이제 시작, 갈 길은 멀다

팀 쿡 애플 CEO가 WWDC21 키노트를 위해 입장하고 있다. [사진=애플 WWDC21 영상 캡처]

 
#어두운 화면이 서서히 밝아진다. 어딘가로 걸음을 옮기는 팀 쿡 애플 최고경영자(CEO)의 뒷모습이 점점 뚜렷해진다. 객석에서 환호성을 지르는 사람들의 목소리가 점점 크게 들려 온다. 쿡 CEO가 마침내 환한 조명으로 둘러싸인 무대에 들어선다. 그의 정면 왼쪽에 세워진 거대 스크린에는 이 행사의 제목인 'WWDC21'가 검은 바탕에 크고 흰 글씨로 크게 떠 있고, 그가 오른손을 들어 인사하는 객석에는 증강현실(AR) 기술로 만들어진 화상통화용 디지털 얼굴, '미모티콘'들이 줄지어 앉아있었다. 태연히 이 '미모티콘(영어명 '미모지·memoji') 무리'를 향해 말하기 시작하는 쿡 CEO. "우리의 최신 기술을 여러분과 전세계 수백만명의 애플 개발자 커뮤니티와 공유하게 돼 기쁩니다."

애플은 이달 초 치른 WWDC21에서 미국 본사 애플파크 스티브 잡스 극장 강당에 물리적으로 올 수 없는 전세계 개발자들이 '참석'하는 장면을 이렇게 연출했다. 코로나19 확산 직후 뜻하지 않게 첫 온라인 행사를 치른 지난해 WWDC 당시, 쿡 CEO의 어깨 너머 배경으로 '텅 빈 객석'의 쓸쓸한 분위기를 뒤집으려고 애썼다. 비록 물리적으로는 먼 곳에 영상을 송출하는 온라인 스트리밍 방식을 쓰고 있지만, 이 영상을 시청하는 세계 각지 개발자들에게 '당신은 여느 때처럼 이 시간 이 발표행사에 참석하고 있음'을 표현하려 한 것이다. 최근 정보기술(IT) 업계 화두로 급부상하고 있는 '메타버스(Metaverse)'의 흐름에 가세한 움직임으로 읽힌다.

십수년간 극적으로 발전한 컴퓨터 하드웨어·소프트웨어 기술을 기반으로 다시금 본격적인 메타버스를 실현할 수 있다는 기대감이 IT업계 안에서 커지고 있다. 나이언틱의 '포켓몬고'나 애플의 미모티콘 같은 AR 게임·서비스가 등장했고, 페이스북·인스타그램은 웬만한 국가보다 큰 공동체를 형성하고 있다. 5세대(5G) 이동통신 기반의 대규모 데이터 송수신을 통해 조만간 몰입감이 뛰어난 3D 가상현실(VR) 경험을 구현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산업계는 최근 들어 로블록스, 포트나이트, 제페토처럼 차세대 소비 시장 주역으로 꼽히는 'MZ세대'들이 열광하는 몇몇 서비스를 주시하고 있다. IT업계 전문가들의 진단에 따르면 ​올해 들어 증폭되고 있는 '메타버스 붐'은 기술 발전, 코로나19 이후의 사회상황, 미디어 이용자층의 변화를 포착한 기업들의 움직임이 맞물린 결과다.
 

미국 온라인 게임 플랫폼 '로블록스'를 구동 중인 태블릿 기기 화면. [사진=AFP·연합뉴스]


황인선 구루미 화상사회연구소장은 올해 들어 증폭되고 있는 메타버스 붐에 대해 "세대별 맞춤 미디어를 선점하고자 하는 기업들이 주류의 변화 가능성에 주목하는 것 같다"며 "MZ세대·알파(α)세대가 VR 등 신기술을 어릴 때부터 경험했고, 이 시장이 더 커질 것이라는 관측이 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신동형 알서포트 전략기획팀장은 "코로나19 이후 현실사회의 위험을 회피하고 안전한 곳을 찾고자 하는 본질적인 욕망이 커졌고, 활발히 보급되고 있는 5G 서비스로 그 킬러 앱인 확장현실(XR·eXtended Reality)이 활성화되고 있다는 점도 함께 작용한다"고 설명했다.

김진영 더인벤션랩 대표 역시 "하드웨어 발전과 큰 관련이 있다"면서 "과거 대비 VR 세계 속에서 아바타를 활용한 소통과 그 안에서의 경제활동이 다변화되고 있다"고 진단했다.
 
메타버스가 궁금해? 40년 전 게임 속 '아바타'부터 보자
메타버스는 1992년 미국 작가 닐 스티븐슨의 SF소설로 발표된 '스노크래시(Snow Crash)'에서 처음 언급됐다. '~를 초월하여(beyond)'란 뜻의 그리스어 접두사 '메타(meta-)'와, 우주를 포함한 이 세계 전체를 가리키는 단어 '유니버스(universe)'의 합성어다. 당초 소설 속에선 현실세계와 구별되는 '컴퓨터 기술 기반의 3D 가상세계'를 뜻했는데, 15년 뒤 미국의 사회변화연구 비영리단체인 '가속연구재단(ASF)'에 의해 더 넓은 의미를 품게 됐다. 2007년 발표된 ASF의 '메타버스로드맵'을 통해 기존 가상세계뿐아니라, 현실세계에 디지털정보를 덧씌우는 AR, 일상을 온라인에 디지털로 기록하는 '라이프로깅', 현실세계가 디지털로 복제·투영된 '거울세계'까지 아우르는 용어로 재정의됐다.

확장된 메타버스 아이디어가 몇몇 디지털 서비스를 통해 첫 흥행기를 이끌었다. 1996년 세계최초 그래픽 온라인게임으로 등장한 '바람의 나라'나 1999년 등장해 국내 대표 사회관계망서비스(SNS)가 됐던 '싸이월드', 2003년 PC기반 다인용 온라인게임으로 미국에서 출시돼 선풍적 인기를 끈 '세컨드라이프'와 맞물려 메타버스라는 용어도 함께 주목받았지만, 이 흐름은 2000년대 중후반 정점에 달했다가 사그라졌다. 2010년대 이후 열린 모바일 시대에 PC에만 의존했던 디지털 서비스가 위축된 결과다.

뚜렷한 명맥을 이어 온 용어는 현실의 사람과 메타버스 간의 매개체인 '아바타(Avatar)'다. 게임 '울티마' 시리즈에선 이용자의 선택에 따라 게임 속 여정을 수행하는 플레이어 캐릭터를 지칭하는 단어다. 이 시리즈의 첫 게임은 메타버스라는 단어가 나오기도 전인 1981년에 출시됐는데, '신이 지상으로 내려오다' 또는 그렇게 내려온 '화신'이라는 뜻의 산스크리트어 '아바따라(Avatāra)'의 어원에 들어맞는 세계관을 그렸다.
 

[사진=게티이미지뱅크]


아바타는 스노크래시의 소설 속에서는 현실세계의 사람들이 메타버스 안에서 다른 사람들과 상호작용하고 의사소통을 하는 '분신'을 뜻했고, 2009년 개봉된 동명의 영화 속에선 주인공이 컴퓨터로 연결돼 조종할 수 있도록 만들어진 '인공생명체의 몸'을 일컬었다. 이 일련의 콘텐츠에서 아바타는 이용자에게 '다른(디지털) 세계에서 나와 연결돼 나를 대신하는 존재'라는 공통된 의미를 담고 있다.
 
디지털 세계 속 '나'의 화신…기술발전 맞물리자 대중화 가속도
하지만 컴퓨터 기반 3D 가상세계로 좁게 정의된 메타버스를 구현하기엔 초창기 컴퓨터 기술 수준이 불충분했다. 디지털 세계와의 상호작용 방식은 기술의 한계로 현실과 똑같을 수 없었다. 흉내를 내더라도 컴퓨터 그래픽의 정교함이 떨어지거나 속도가 충분히 빠르지 않아, 자연스러운 몰입감을 제공할 수 없었다. 아바타는 직접적으로 구현되지 않는 몰입감을 이용자들이 스스로 채우도록 유도하는 일종의 '상상력 촉매'였다.

이후 컴퓨터 하드웨어·소프트웨어 기술이 발달하면서 이후 아바타 개념을 활용하고 있는 서비스의 대중성·접근성도 확 높아졌다. 디지털 서비스 제공자들이 이용자 아바타의 행동반경과 경험을 점차 초기 서비스 경계 너머로 확장시키며 부분적인 메타버스 시나리오를 구현하고 있다. 에픽게임즈는 2017년 3인칭 슈팅게임으로 선보인 '포트나이트'에서 뮤지션·패션브랜드와의 협업을 통한 디지털 공연·패션상품을 선보였다. 네이버Z의 '제페토'는 2018년 AR 아바타 서비스로 시작해 유명인 아바타와의 소통, 3D 게임을 즐길 수 있는 기능을 더했다.

실험적인 시도도 늘었다. 세계 최대 SNS인 페이스북은 2017년부터 공식 앱으로 자회사 '오큘러스'의 VR 기기를 쓸 수 있게 했고, 블록체인 게임 개발사 업랜드미는 2019년 가상 토지·건물을 대체불가토큰(NFT)으로 거래할 수 있는 '업랜드'를 출시하고 이 서비스와 현실세계의 연계성을 높이고 있다.
 
메타버스 갈 길 멀지만…"디지털 이용 아니라 현실이 곧 디지털"

모델들이 SKT 점프AR 앱을 통해 볼류메트릭 캡처 기술로 탄생한 ‘스테이씨’의 디지털 휴먼 콘텐츠를 즐기는 모습. [사진=SKT 제공]


아직 IT업계 전문가들 사이에선 SNS, 게임, AR·VR, 디지털트윈 등 성격이 이질적인 디지털 서비스를 메타버스의 범주에 묶는 것이 명쾌하지 않다는 시각도 많다. 하지만 이용자가 디지털 세계 속에서 상호작용하기 위한 아바타를 내세우고 있다는 점, 아바타들의 공동체·사회적 활동이 존재한다는 점은 공통분모가 될 수 있다.

신 팀장은 "라이프로깅은 '디지털 미(Digital Me)', VR와 AR는 '확장현실', 거울세계는 '디지털트윈' 등으로 메타버스의 4대 분류를 재정의할 수 있다"며 "소셜미디어든 게임이든, 나를 아바타로 바꾸는 것을 포함해 모든 것이 디지털화되는 세계로 들어간다는 것이 공통점"이라고 설명했다.

한상기 테크프론티어 대표는 "(메타버스는) 사람들이 자기의 또다른 정체성과 체계를 만들어내고, 다른 존재와 만나고 얘기하는 사회적 활동도 가능한, 우리세계와 다른 세계"라고 설명했다.

김진영 더인벤션랩 대표 역시 "과거 대비 디지털 세계 속에서 아바타를 활용한 소통과 그 안에서의 경제활동이 다변화되고 있다"고 진단했다.

산업계의 최대 관심사는 메타버스가 새로운 수요·공급의 촉매가 될 가능성에 집중되고 있다. 다만 아직 인류 공동체의 삶을 근본적으로 바꿔놓을 것이라고 예견하긴 이르다. 핵심적인 기술·제도·문화·세대의 변화가 수반돼야 한다.

김 대표는 "과거에 분리돼 있던 현실·가상 세계가 (부분적으론) 중첩되고 있는데, 이는 '현실 세계에서 디지털을 이용한다'가 아니라 현실 세계 자체가 디지털이 되는 것"이라며 "개인이 느끼는 일상뿐 아니라 기업간거래(B2B) 세계에도 금방 올 변화"라고 전망했다.

각 영역의 변화가 성공적으로 받쳐준다면 경제·산업·사회를 근본적으로 변화시키는 태풍의 눈으로 성장할 수 있지만, 그렇지 않으면 메타버스 유행은 지난 10여년과 같은 정체기를 다시 맞을 수도 있다. 이미 지구적인 변화를 촉진하고 있는 것으로 평가되는 클라우드와 인공지능(AI) 기술도, 실현되기까지 앞서 수십년간 최소 두 번의 정체기를 거쳤다.

한 대표는 진정한 메타버스 시대가 도래하려면 아직 멀었다"며 "다만 컴퓨팅 패러다임이 바뀌었고 여러 성능이 좋고 저렴한 하드웨어가 나오는 등 세컨드라이프 때보다 기술이 발전해 실현 가능성이 좀 더 보이는 것"이라고 언급했다.
 

[그래픽=임이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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