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저기 도토리 나무 솎아 베는 나무꾼만 못함이여
무슨 큰 뜻이 있는 듯하나 그저 부질없음이여
“세계 위인들을 칭송하는 찬탄사도 많고 헐뜯는 말도 많아요. 서울대 법대생 제자가 하루는 다석 선생을 찾아가 물었어요. ‘부처님과 예수님을 비교하면 누가 더 훌륭합니까?’ 다석이 간단하게 대답했습니다. ‘비교 연구해야 하는 일이 참으로 많지만, 비교 연구해서는 안 되는 일도 있는 것이다. 지금 질문이 그러하다.’
내가 그 책 앞에 고은 시인과 박영호 선생의 시를 함께 실었습니다. 박 선생은 다석을 칭송하는 시를 쓰죠. 그러니 다른 사람들의 눈에 안 들어오는 것이죠. 제자들은 다석이라면 껌뻑 죽습니다. 다석에 대해 조금이라도 비판적인 이야기를 하면 아주 언짢아 해요. 고은 시인은 다석을 주제로 다룬 시에서 무언가 있는 것 같은데 파고 들어가보면 잡히는 것이 없다고 했거든요. 다석을 균형 있게 보라는 소리겠죠. 고은 시인이 근자에 여류 시인 몇 사람에게 고발당했잖아요. 시 한 수 배우러 온 아가씨를 괴롭혔다는 말도 있지요. 나는 개인적으로 사람은 양면성을 지니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수용 가능하지 않습니다. 다석 스스로 정통이 아니라고 말했어요. 일제 강점기 말기에 김교신이 이끈 무교회주의자들이 있습니다. ‘우리는 교회에 모여서 북적거리는 것 싫다’ ‘우리끼리 모여서 목사 없이 설교 없이 성경공부 하겠다’는 무리였죠. 다석은 그 무리에도 끼지 못했어요. 그러니까 15살에 종로5가 연동교회에 다니다가 5년 후 20세에 평안북도 정주 오산학교 선생을 하면서 ‘목사한테 배운 것과 다른 길이 있구나’하고 전통적인 성경 버리고 성경의 진수를 뽑아서 ‘내 맘대로 톨스토이’ 기독교를 새로 세웠거든요, 오산에서 선생으로 있을 적에 동료 선생이 이광수입니다. 그분이 갖고 있던 톨스토이 전집을 빌려서 읽고 정통을 떠나서 이단 기독교인이 된 것이죠. 본인 스스로 ‘이단 기독교인’이라고 그랬습니다. ‘예수에게는 신성과 인성이 있다고 보는 것이 정통 기독교지만, 나는 예수를 무한히 존경해서 나한테는 진짜 스승은 예수 한 분이지만’ 예수님을 일컬어서 대덕사(大德師)라는 칭호를 드린다.’ 덕이 대자로 있는 분이라는 뜻이죠. 부처님이나 공자님에게는 그런 칭호를 안 드렸죠. ‘일생 동안 내가 예수 공부하면서 살지만 그렇다고 해서 예수가 신은 아닌 거다. 예수를 신으로 모시는 것은 과공(過恭)이다’고 보셨어요. 그러니까 전통 기독교를 벗어난 분이죠. ‘그런데 무교회주의자들이 성경을 열심히 공부하는 모임에 가서 내 속 이야기를 하게 되면 충격을 받을 것이다. 사람들이 신앙을 잊어버릴지도 모른다. 그러니까 난 거기에 안 간다’ 하셨죠. 딱 한 번 거기에 가서 설교를 한 적은 있지만 그 얘기까지 하면 너무 기니 생략하지요.”
-다석에 대한 김흥호 식 이해와 박영호식 이해 중 어느 것이 다석 본래 사상과 더 가깝다고 평가하는지요?
“제가 다석학회를 2005년에 조직하면서 다석의 직제자(直弟子) 두 분을 고문으로 모셨어요. 김흥호 박영호, 이 두 분은 다석이 정통 기독교인이냐, 정통 기독교에서 벗어났느냐를 두고 의견이 갈립니다. 김흥호 목사는 아버지도 목사, 본인도 목사였죠. 그는 이화여대 기독교 학과의 교수였고 교목이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정통 기독교를 옹호할 수밖에 없는 것이죠. 정통 기독교인 가운데서 진짜 기독교인이 우리 선생님 다석이라는 입장일 것이에요. 다석에 대해 비정통이라고 하면 용서 못하죠.
그에 비해 박영호 선생은 무교회주의자, 좋게 얘기하면 다석식 기독교인이죠. 박 선생은 다석이 ‘예수의 신성을 이야기 안했다. 기독교 관점에서 이단자’라고 얘기합니다. 다석 학회 고문으로 두 분을 모시고 있었는데 누구 편을 들어야 할지 10년은 고민했을 것입니다. 다석 강의를 총정리해서 현암사에서 초판을 펴냈습니다. 그리고 두 번째 다석의 저작물은 20년 동안 쓴 다석일지입니다. 절반은 우리말 시조이고, 나머지 절반은 한시입니다. 이분은 우리 말보다 한시가 더 자유로웠던 것 같아요. 한문도 어렵지만 우리말 표현도 옛 말투이고 신조어를 남발했습니다. 세종대왕이 만들어낸 28개의 글자가 부족하다며 더 만들어냈어요. 다석 시조를 읽다가 포기하는 사람도 봤어요. 우리말이지만 불통(不通)이라는 것이죠. 그래서 ‘안 되겠다. 내가 한문에 약하지만 공부해서 밝혀 내야겠다’고 생각했죠. 다석 시조 2500수를 2006년부터 작년까지 십 수년 동안 붙잡고 늘어졌습니다. 다석의 시조 원문, 윤문, 풀이, 이렇게 2500번을 반복해서 원고를 쓰다 보니까 만 페이지가 넘어요. 인쇄해서 800페이지짜리 1,2,3권으로 나옵니다. 그거를 십 수년 동안 매달리고 나서 ‘이게 내 한계다, 내가 아는 것은 이 정도다. 내가 미처 못 본 것은 후학이 알아서 해주길 바란다’고 썼습니다.
그런데 이건 안 팔리는 책이죠. 현암사에 돈을 들고 가서 책을 내달라고 했더니 그 돈으론 어림도 없다고 합니다. ‘몇 천만원 가지곤 안 됩니다. 적자가 너무 커요. 일억 이상 가져오세요’라고 해요. 내가 연금 받아서 겨우 먹고 사는데 그럴 돈이 없잖아요. 그보다 작은 출판사를 찾아갔어요. 길 출판사라고, 거의 알려지지 않은 곳인데 5000만원 줄 테니까 책을 좀 내달라 했더니 기꺼이 내주겠다고 했어요. 그래서 잘 하면, 금년 말에 1,2,3권으로 다석 시조풀이가 나올 것입니다.”
인터뷰어가 “크게 출판기념회도 해야겠어요. 좋은 일이니 사람들에게 알려야죠”라고 했더니 정 신부는 “출판사가 할 일이죠”라고 말했다. 신부도 돈이 들어가는 일에는 기가 죽는 모양이다.
-정 신부가 고른 다석의 명언 4가지 중에 “사람을 숭배해서는 안 된다. 그 앞에 절을 할 분은 하나님뿐이다. 종교는 사람 숭배하는 것이 아니다”면서 예수를 하나님과 같은 자리에 올려놓은 것에 대해 비판적으로 얘기했던 데요. 가톨릭이 예수의 어머니인 마리아를 숭배하는 것은 합당하다고 보는지요?
“기원후 430년, 제3차 에베소 공의회에서 ‘마리아는 하느님의 어머니’라는 교리를 만든 게 시초입니다. 지중해 사람들, 특히 이탈리아 사람들이 어머니에 대한 공경심이 지극해요. 그것이 예수의 어머니에 대한 공경으로 나타나는 것이 아닐까요. 어머니가 노년기에 접어들게 되면 어머니는 한 집안의 왕초입니다. ‘맘마미아!’ 내 어머니에 대한 존경심이 있죠. 가톨릭과 정교회는 예수님을 공경한다고 하지만 예수님은 두려운 면이 있지만, 성모님은 다 사랑하고 공경하지요. 예수 이외에는 별 볼 일 없다는, 예수 중심의 신심(信心)을 강조하는 교회가 개신교 아닌가요.
그런데 다석은 ‘어머니를 우리가 공경하듯이 성모님을 공경하는 건 당연하다’고 했죠. 다석 말씀에 따르면 한국 아버지는 아들이나 딸이 ‘학교 가는 길에 무언가를 사야 한다’고 말하면 꽥하고 소리를 지르지만, 어머니가 아버지에게 가서 돈을 얻어다 준다는 것이에요. 다석의 경험이에요. 어머니가 간청을 전해준다는 것이죠. 그걸 가톨릭에서는 전구(轉求)라고 합니다. 간청을 아버지 하느님께 전해준다. 우리 일상에서도 아버지를 대하기는 거북하니까 어머니에게 이야기하는 거지요. 그런 인간의 심정이 가톨릭과 정교회의 성모 마리아에도 고스란히 담겨있는 것이며, 비방할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다석이 정통 기독교인이라면 이런 말을 죽어도 안 하겠지요. 다석은 자신이 자라난 집안 환경을 생각할 적에 ‘아버지에게 바로 말했다간 혼이 날 수 있으니 어머니에게 말하는 것이 낫더라. 어머니에게 기도하는 것이 나는 이해가 된다’고 한 거죠. 다석이 서양 개신교를 뛰어 넘은 겁니다.”
-다석어록 중 ‘사람을 숭배해서는 안 된다’는 말이 다석에게도 그대로 적용되는 가요?
“그렇지요. 너무 높이는 것도 안 되죠. 다석 영감도 평생 새벽 3시에 일어나서 세수와 맨손체조 하고 난 뒤 4시부터는 명상에 들어가서 아침 점심 굶고 저녁 드실 때까지 명상을 하셨잖아요. 생각이 딱 떠오르면 시조 한 수를 짓고, 어떤 때에는 생각이 정리 안 되면 날짜만 적었어요. 생각이 용솟음치면 하루에 시조 7수까지 지은 적도 있습니다.
보통은 하루에 시조 1수 또는 한시 1수였죠. 제자들이 말하기를 ‘선생님은 암탉 같아요. 하루에 시를 한 수씩 낳아요’라고 했습니다. 동서고전이나 어떤 사건을 읽고 우리가 무엇을 깨우쳐야 하는지 골똘히 생각해서 탁 트이면 시 한 수가 나오는 것입니다. 참 대단한 어른입니다. 평생 그렇게 사셨거든요. 목사들이 광화문에 모여서 데모하고, 주일마다 목청 돋우어서 설교하고, 굉장히 많은 말을 쏟아 내는데, 언제 명상할 시간이 있겠어요. 다석 닮은 분을 우리 시중에서는 찾아볼 수가 없어요.”
-데레사 수녀에게 성녀라는 칭호를 쓰는데. 다석에게도 성자라는 표현을 써도 되지 않을까요?
“가톨릭이 공인한 성인은 따로 있죠. 마더 데레사는 공인된 성녀입니다. 한국에서 순교한 1만 천주교 신도들 가운데 로마 교황청에서 103명을 간추려 성인품(聖人品)에 몇 년 전에 올렸어요. 교황청에서 신심이 돈독한 사람이 있다더라 해서 조사를 시작하면 짧게 10년, 길게 몇 십 년, 아주 길게는 몇 백 년 걸립니다. 교황청은 어느 누구가 성인이라고 소문이 나면 진짜 성인인지 조사해서 3단계 칭호를 줍니다. ‘가경자(可敬者)’ ‘복자(福者)’ 그 위에 ‘성인’. 일반 대학에서의 학사, 석사, 박사처럼 나눈 것인데 부질없는 짓이죠. 내면의 됨됨이를 어떻게 조사해서 알겠어요. 이승에서 조사해본들 부질없는 일입니다. 사람의 인품을 등급 매기는 것은 할 짓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위대한 스승으로 받들면 되지, 큰 칭호를 주려고 애쓸 필요가 없습니다.
다석 같은 분이 5000만 국민 가운데서 다시는 태어나지 않을 것 같아요. 아버지가 가죽을 취급하는 피혁방을 크게 했어요. 아버지는 다석을 위해 적선동에 솜공장을 차려주셨어요. 아버지 3년상을 치르고 나서 가게를 팔아 북한산 밑 구기동 농장으로 이사했습니다. 피혁방과 솜공장을 할 적에 ‘이렇게 수를 부리면 돈이 좀더 벌린다’라는 생각이 있었다고 합니다. 사람이 정직하게 사는 법은 농사밖에 없다고 했죠. 그때만 해도 대학을 나오면 자동적으로 좋은 자리를 차지했어요. 그리고 배운 사람들이 어리숙한 사람들을 등쳐 먹기 일쑤였죠. 그래서 상당히 경제적 여유가 있었음에도 아들 셋 다 고등학교까지 보내고 대학 공부를 안 시켰어요. 그리고 내 아들, 내 제자들은 ‘장가가지 말라’ ‘대학 가지 말라’ ‘오로지 농사를 지어라’하는 세 가지 유언을 남겼죠.”
-다석은 종로 상인이던 아버지로부터 많은 재산을 상속받았는데요. 그런데 다석이 자식들에겐 왜 그렇게 했을까요?
“부자인 선대에서 물려받은 토지가 상당 부분 있었어요. 소작인들이 찾아와서 생활이 어렵다고 하니 공짜로 땅을 다 넘겨주었어요. 다석은 ‘대학 나오지 말라’ ‘관공서에 취직할 생각하지 말라’ ‘농사지어라’라고 했죠. 그런데 첫째와 셋째는 아버지 말을 안 들었습니다. 첫째는 미국으로, 셋째는 일본으로 이민 갔죠. 90세가 넘을 때까지 거기서 살다가 몇 년 전에 다 죽었습니다. 첫째 셋째 아들은 아버지를 이해하지 못한 거죠. 아버지 장례식에 오지 않았습니다. 그렇지만 한국에서 오는 지인들을 만나면 ‘우리 아버지가 특이한 분인데 어떻게 생각하느냐’ ‘부귀영화를 멀리 했지만 대단히 생각이 고귀한 분’이라는 말을 했답니다.
둘째 아들이 가장 오래 살았습니다. 둘째 아들이 다석학회 연구 활동에 보태 쓰라고 돈을 보낸 적도 있습니다. 미국 아들과 일본 아들도 둘째 아들을 통해 아버지 연구를 위해 쓰라며 돈을 보내주었습니다. 큰돈은 아니지만 가족들의 돈으로 다석학회를 운영한다고 보면 맞습니다. 둘째 아들이 아버지의 뜻을 따라 농사를 짓겠다고 했지만 이미 소작인들에게 땅을 다 나눠주어서 농사 지을 땅이 없는 거예요. 그래서 강원도 화전민 땅에 가서 밭을 일구고 그 옆에 삼형제와 아버지, 어머니가 묻혀있습니다.
부인 목포댁이 다석의 괴팍한 뜻을 다 따랐지만, 두 가지에선 대들었다고 합니다. 아이들이 모두 서울에서 경기고 휘문고 나와서 출중한 데다가 대학 공부시킬 돈이 있는데도, 대학 가면 틀림없이 아랫사람을 짓밟을 가능성이 크다며 안 보냈거든요. 자녀교육을 놓고 목포댁이 다석과 대판 싸웠다고 해요. 다석이 천안 광덕에 있는 땅을 소작인에게 거저 주다시피 했지요. 목포댁은 ‘자식들 농사지으라고 해놓고 땅을 다 남 줘버리면 우리 아들은 어떻게 하느냐’고 불만을 토로한 거죠.”
인터뷰어가 “다석은 세속을 초월한 사람”이라고 거들자 정 신부는 “다석은 출세, 돈벌이, 공명심, 세 가지 욕심을 다 끊은 분”이라고 말했다.
-다석과 함석헌 선생의 관계에 대해서도 많은 이야기가 있습니다. 함석헌 선생을 통해 다석을 알게 된 분들이 많지요. 그런가 하면 다석과 함석헌 이 두 분을 모두 따르는 사람도 있고, 그 중 한 분을 더 따르는 사람도 있습니다. 두 분에 대한 평가는 어떤지요?
“두 분 다 위대하고. 두 분 다 기이한 면이 있죠. 다석이 오산학교 교장 그만두고 떠날 때 ‘내가 이곳에 온 것은 자네 하나를 만나려는 것인가 봐’라고 할 정도로 제자 함석헌을 애지중지했지요.
함 선생에 대해 우리는 듣기 좋게 ‘실덕(失德)’이라고 말합니다. 성천 유달영 선생한테 자세한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성천도 다석의 제자 중 한 분입니다. 함 선생이 민주화 운동을 하기 전에도 반반한 여자만 보면 가만히 두지 않았다는 겁니다. 다석 일지에 보면 아마 50번 정도 제자를 나무라는 이야기가 나와요. 독한 표현은 안 나와요. 함석헌이라고 이름도 잘 안 나옵니다. ‘함’이라고만 나오죠. 제자 이름을 최대한 노출 안 시키려고 하면서도 새벽 3시에 일어났을 적에 ‘그도 일어났을까’ ‘내가 저를 생각하듯이 저도 나를 생각할까’라고 생각하죠. 제자가 괘씸하지만 잊을 수 없었어요. 함석헌 선생이 등장하는 시조가 50편 이상 나오지 않을까 합니다. 아주 많습니다. 곰곰이 들여다보면 함석헌을 그리워하는 시조라는 것을 알 수 있어요.
그 사정을 잘 아는 성천(유달영)이 ‘함석헌이 자꾸만 여자를 탐하는 것은 병적이다. 정상적인 사람은 그렇지 않다’고 했어요. 정신과 의사에게 보내서 치료를 받게 해야 했는데 우리가 손가락질만 했다'고 후회하는 말을 했습니다. 안타까운 이야기죠. 나처럼 자세히 아는 사람이 많지 않을 것입니다. 나는 다석 일지를 통독했지요. 다석을 존경하는 사람, 제자 함석헌을 존경하는 사람, 둘 다 존경하는 사람이 있을 텐데요. 위대한 민주운동가 함석헌을 공개적으로 나무란 다석이 옳지 않다고 하는 사람도 있고요. 제각각입니다.”
조카뻘 되는 먼 친척이 1980년대 초에 함 선생의 여자관계를 폭로한 책을 안전기획부의 지원을 받아 발간한 적이 있다. 함 선생의 제자인 김용준 전 고려대 교수는 2005년 11월호 <신동아> ‘황호택이 만난 사람’ 인터뷰에서 그 책에 ‘따라다니는 여자는 모두 건드리는 것으로 묘사돼 있다’는 질문을 던지자 “함 선생님을 접해보면 알지, 어떻게 따라다니는 여자를 전부 건드려요”고 반론을 폈다.
-함 선생의 여자관계에 대한 팩트는 어느 쪽이 맞는가요.
“내가 성천 선생님에게 듣기로는 안기부에서 터뜨린 것이 사실이라고 합니다. 민주화 운동을 포기 안 하면 여성 행각 다 폭로하겠다고 했데요.”
인터뷰어가 “안기부가 협박을 한 거군요”라고 묻자 정 신부는 “네. 없던 사실이 아니라 실제로 여성편력이 화려한 것을 찾아낸 것이죠”라고 답했다.
“함 선생에게 ‘민주화운동을 그만두지 않으면 여자관계를 폭로해 만천하의 웃음거리로 만들겠다’고 했답니다. 함 선생은 안기부의 협박을 받고 고민하다가 ‘폭로하라’고 했답니다. 내가 다석의 제자이고 함 선생과도 아주 가까운 성천 선생한테 직접 들었습니다.”
다석 연구와 대중화의 장애물은 그가 쓰는 단어의 난해성(難解性)이다. 훈민정음에도 없는 글자를 새로 만들고 소리글자인 한글을 뜻글자로 활용해 이해하기가 어렵다.
-다석 낱말사전은 박영호 선생과 함께 편찬 작업을 하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아니에요. 박영호 선생한테 완전히 맡겼습니다. 종로2가 YMCA 회관에서 한 강의 1년치를 속기사가 기록했습니다. 아주 악필(惡筆)이에요. 그것을 그냥 읽을 수가 없어서 다석학회에서 고쳐 쓰는데 꼬박 1년이 걸렸어요. 그러고 난 다음에 박영호 선생에게 부탁했습니다. '선생도 연세가 높고, 나도 나이가 지긋하니 우리가 아니면 앞으로 할 사람이 없을 것 같습니다.' 박영호 선생은 다석 낱말사전 하고, 나는 다석 시조 2500수를 맡았지요. 나는 일을 마쳐서 금년 말에 책이 나오기를 기다리고 있죠. 이 책이 나오면 석 박사 공부하는 사람들은 더 편해지겠죠. 이제 한시를 다루는 분이 나와야 하겠습니다. 대만문화대학에서 중국문학박사를 하신 분에게 한시를 맡아달라고 말해보았는데, 중국 사람들이 쓰는 한문과 뜻이 상당히 다르다는 것입니다. 문법도 다르고. 도저히 접근을 못 하겠다고 합니다.”
-서강대 재직시절 예수회와 갈등으로 학교를 떠나셨다면서요?
“서강대가 예수회 재단입니다. 예수회수도원 원장, 총장, 이사장, 세 우두머리가 다 예수회원이에요. 서강대학교에서 종교학과를 세우고 난 뒤에 강의계획표를 짜다 보니 박사 학위를 가진 교수가 부족했어요. 예수회원 교수 중 한 명을 제외하고는 박사학위가 없던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나와 서공석 신부, 장익 신부를 불렀어요. 나는 서강대에서 1998년부터 20여년간 근무했어요. 예수회는 그동안 젊은 예수회원들을 외국으로 보내서 박사를 많이 배출했죠. 그러니까 자기네 사람을 쓰고 싶었겠죠. 예수회 재단에서 나와 서공석 신부한테 나가주면 좋겠다고 했죠. 정교수에게 정년을 3년 앞두고 나가 달라는 것은 법적으로 절대 안 될 일이죠. 그쪽에서 나가주기를 간절히 원했지만 내가 법원으로 가져가면 승소하지요. 그러나 천주교 신부가 교수 자리를 두고 법원에서 다툰다는 것이 얼마나 꼴사나운 일이 되겠어요. 정나미가 떨어졌죠. 예수회에서 나를 배척하는 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법원에 안 가고 사표를 쓰고 나왔어요. 나와서 집에서 1년 정도 쉬고 있는데 성공회대학 이재정 총장이 교파가 다른 데도 나를 교수로 불러줘서 정년퇴직까지 잘 지냈어요. 아마 한국종교 역사상 타교파 대학에 가서 교편을 잡은 사람은 나 혼자일 겁니다. 앞으로도 좀처럼 나오지 않을 거예요.”
-이번에 나오는 다석 시조풀이 책에 붙인 다석 연보(年譜)를 만드는데 공을 들였다고 들었습니다.
“다석이 잘 안 알려진 분이거든요. 전기로 쓰자면 너무 기니까 연보로 쓴 것이죠. 연보 가운데 가장 감동적인 것은 끝부분 ‘출가(出家)하고 임종’이지요. 그분이 87세가 되었을 적에 출가한 적이 있잖아요. 예수님과 톨스토이 두 분 다 객사(客死)했죠 .”
인터뷰어가 여기서 예수는 객사가 아니라 사형당한 거라고 끼어들자 정 신부는 “집안에서 안 죽으면 객사지요”라고 받았다.
“두 분이 모두 객사를 했는데, 어떻게 내가 집에서 편하게 죽을 수가 있는가. 그래서 민증(신분증)을 주머니에 넣고 소나무 숲을 찾아간 거예요. 예수님과 톨스토이의 중생을 생각하며 객사 결심을 한 거라고 생각합니다. 91세로 돌아가셨잖아요. 둘째 아들에게서 딸만 넷이 태어났어요. 다석을 추모하는 모임이 성천문화재단에서 매년 있는데 둘째 아들의 둘째 딸 유희원이 꼭 대표로 참석합니다. 둘째 아들과 며느리가 다석의 임종을 지켜봤어요. 3년 동안 말이 없으셨는데 숨을 몰아쉬다 말고 “아들에게 내 몸을 일으켜 다오”라고 했습니다. 아들이 상반신을 일으켜 주니까 한마디 말도 없이 묵언하던 분이 전력을 다해 ‘아바디’라고 큰 소리를 지르며 돌아가시더라. 하느님에 대한 그리움이 사무쳤다고 해야 할까. 왜 아버지라고 하지 않고 ‘아바디’라고 평안도 말씀을 하셨을까. 김흥호 박영호 선생, 두 분의 풀이가 조금 달라요. 박영호 선생은 ‘아 밝으신 분이여 디디고 서시오’라는 뜻으로 아바디라고 했다는 것입니다. 기록에는 안 남아있어요. 저도 박영호의 뿌리죠.
다석은 ‘내가 죽으면 관을 사지 말아라. 화장터로 가져 가거라”고 했지만 후손들이 유언을 들어주지 않았죠. 화장 대신에 토장을 해서 세 번 옮겼어요. 화장하라는 유언을 안 들어준 게 잘 됐다고 제자들이 말합니다. 선생님 묻혀 있는 곳에 제자들이 참배를 가거든요. 화장해서 뿌렸으면 갈 데가 없었을 거예요. 제자들은 장례식 때 다석의 유언을 지켜야 한다고 했지만 둘째 아들이 안된다고 했습니다. 그렇게 해서 묘소가 남아있게 됐죠. 기일(忌日)에 제자들이 모여 참배할 수 있다는 것만 해도 조그만 뜻이 있겠다 싶어요."
정 신부에게 마지막으로 “다석을 어떤 분이라고 한 문장으로 정리할 수 있느냐”고 묻자 “동방의 큰 스승”이라는 말로 인터뷰를 마무리했다. “이분도 참 외로운 분이었잖아요. 스승이 전혀 없고. 하루 종일 성경 한 구절, 어느 한 단락 물어볼 곳이 없고 참고서가 없으니 혼자 명상을 할 수밖에 없었죠. 항상 명상에 빠져 있던 분이시죠.”
인터뷰를 끝내고 정 신부는 인근의 단골 추어탕 집으로 안내했다. 정 신부는 추어탕 대신에 미꾸라지 튀김을 주문했고 나도 따라갔다. 함께 간 여성 두명(인턴기자와 영상팀 AD)은 처음에는 다른 음식을 찾다가 추어탕으로 돌아왔다. 남의 이야기들 듣는 직업을 가진 사람은 뭐든지 맛있게 잘 먹어야 한다. <인터뷰어=황호택 논설고문·정리 이주영 인턴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