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준석, 과학의 시선] 드라마 ‘시지프스’를 넷플릭스에서 뒤늦게 보았다. 타임머신과 시간 여행자를 등장시킨 기존의 영화나 소설과는 좀 다른 게 있었다. 과거를 바꿈으로써 다른 미래를 만들어낼 수 있다는 설정이 흥미로웠다. ‘시지프스’는 JTBC가 16부작으로 만들어 지난 4월 8일까지 방영했다. 천재 공학자(조승우 출연)와, 그를 구하려고 미래에서 온 미녀(박신혜 출연)의 로맨스도 스토리라인을 풍부하게 했다. 그중에서도 내 눈에 들어온 대사 하나가 있었다. 악당역으로 나오는 ‘시그마’가 말한다. “여자야?, 세상이야? 하나만 골라!”(제9화)
이 짧은 대사는 여자를 구하려면 세상을 포기해야 하고, 세상을 구하려면 여자를 포기해야 하는 양자택일의 구도를 만든다. 어떤 가치가 더 중요한가를 판단해 보고, 둘 중에서 옳다고 생각하는 일을 하라는 설정이다. 답을 찾기 힘든, 어려운 선택 같아 보인다. 사랑하는 한 사람을 구하자니, 서울 시민 1000만 명이 핵폭탄 투하로 죽을 것 같다. 많은 사람을 구하자니, 내게 가장 소중한 한 사람을 잃게 되고, 그가 없는 세상은 무슨 의미가 있나 싶다.
실제로 시그마의 양자택일 논리에 등장 인물들은 당황한다. 혼란 속에서 그들은 선택을 하는데,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을 구하려 했고, ’1000만 서울 시민‘은 외면했다. 그런 모습을 악당은 조소한다. 그리고 악당의 비웃음 앞에서 등장인물들은 꼼짝 못했다. 그들은 자신들의 선택이 그리 떳떳하지 않았다고 생각했다. 가령, 등장 인물 중 한 사람은 파킨슨 병으로 죽어가는 어머니를 살리기 위해 ’세상‘을 구하지 않았던 것이다.
진화생물학자에 따르면 우리는 이기적인 존재다. 우리는 재생산이라는 유전적인 목적을 위해 세상에 태어났으며, 그에 부합하는 가치를 최우선적으로 추구한다. 다시 말해 우리는 번식을 위해 필요한 몸과 마음을 갖고 있다. 그러니 나의 남편과 아내, 자식이 중요하지, 서울시민 1000만 명을 구하는 게 우선이 아니다. 우리는 서울시민과 인류를 구하기 위해 태어나지 않았다. ‘이기적 유전자‘라는 말이 나온 게 다른 게 아니다. 자신의 이기적인 유전자를 다음 세대에 전달하기 위해 유전자는 우리의 몸과 마음을 만들었다고 <이기적 유전자> 저자 리처드 도킨스는 설명한다.
반면 인간은 이타적인 존재이기도 하다. 다른 사람과 기꺼이 협력하는 존재다. 우리는 남을 기꺼이 돕는 사람을 주위에서 쉽게 볼 수 있다. 자신을 희생할 위험을 무릅쓰고 열차가 들어오는 기차역 철로에 뛰어들어 넘어진 사람을 구한 사람 이야기는 잊을 만하면 들려온다. 20세기 진화생물학자는 인간의 협력적인 마음을 설명하는 데 상당한 어려움을 겪었다. 이기적인 존재인 건 분명한 데 협력적인 마음은 왜 진화했을까를 이해하는 건 쉽지 않았다.
가령, 혈연관계가 있는 친척을 우리는 남들보다 더 챙긴다. 친척이 어려울 때 기꺼이 도움의 손을 내민다. 이를 두고 그런 행동은 친척이 나와 유전자를 공유하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나왔다. 그걸 ‘혈연선택’론이라고 한다. 생면부지의 사람을 돕는 경우는 또 무엇일까? 더 어려운 문제다. 남을 도와주면 그런 명성이 쌓이고 결국은 내게도 언젠가 도움의 손길로 돌아올 수 있을 것이라는 믿음이 행동 동기라는 연구 결과가 나왔다. 이 같은 연구가 쌓이면서 ‘이기적 유전자’의 다른 얼굴은 ‘이타적 유전자’라는 말도 나왔다.
동아시아 전통도 인간 본성을 오래 탐구했다. 하지만, 참 모습이 무엇인지를 놓고 혼란을 겪었다. 성악설이니, 성선설이니 하는 게 그런 사례다. 성악설은 인간의 마음은 본래 악하다는 것이며, 순자가 주장했다. 성선설은 인간의 마음은 본디 선하다는 생각이며, 맹자가 말했다. 두 사람이 기원전 4세기에 무슨 얘기를 했는지 원문을 찾아보았다.
맹자: “사람은 모두 남에게 차마 모질게 하지 못하는 마음을 갖고 있다” “아이가 우물에 빠지려는 걸 보게 되면 사람들은 모두 깜짝 놀라 측은히 여기는 마음을 일으키고 달려가 아이를 구할 것이다. 그건 아이의 부모와 교분을 맺기 위해서도 아니고, 마을 사람과 친구들로부터 아이를 구했다는 칭찬을 듣기 위해서도 아니며, 아이의 울부짖는 소리가 싫어서도 아니다”라고 말했다.(‘맹자’ 책 제3편).
순자: “사람의 본성은 악한 것이니, 그것이 선하다고 하는 건 거짓이다.”(‘순자’ 23편 성악 性惡).
혼란스러웠던 건 서양도 마찬가지다. 두 얼굴의 사나이니, 야누스니, 헐크, 지킬 박사와 하이드와 같은 문학적 예술적 상상력이 왜 나왔겠는가? 별개의 마음을 가진 두 존재가 한몸 안에 살고 있는 것처럼 인간 본성은 이해하기 쉽지 않았던 것이다.
개인적으로 드라마 ‘시지프스’가 던진 인간 본성에 관한 화두를 이리저리 생각하고 있을 때였다. 이번에는 드라마가 아니라 현실에서 ‘인간 본성 개조론‘ 운운하는 얘기가 둘려왔다.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의 발언이다. 조선일보 4월 19일자에 따르면, 김정은은 세포비서대회 폐회사에서 “당세포의 과업은 인간 개조 사업을 적극 벌이며”라며 그 이유와 관련, “청년 세대의 사상 정신 상태에서 심각한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라고 말했다. 그는 이어 “당세포가 이들의 옷차림과 언행까지 통제해야 한다”라고 말했다.
그의 할아버지 김일성이 그런 말을 했다면 고개를 끄덕여줄 만하다. 20세기에 살았던 김일성 때는 인간 본성에 대해 다들 지금보다는 몰이해 했으니까. 지금 우리는 그들이 어떤 잘못을 저질렀는지 잘 알고 있다. 좌나 우나 인간의 마음을 뜯어 고칠 수 있다고 잘못 알았다. 좌우의 극단주의는 인류 역사상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대규모의 사회 실험을 했으며, 그건 대재앙으로 끝났다. 영국의 좌파 역사가 에릭 홉스봄은 20세기를 극단의 시대라고 규정한 바 있다. 20세기는 인간 본성을 둘러싼 전쟁이 벌어진 시기라는 면에서도 극단적이었다.
비극은 인간 본성을 이해하지 못하고 ‘인간 개조’론을 꿈꿨던 이데올로그나 독재자가 일으켰다. 인류를 상대로 전례 없는 폭력을 저질렀다. 첫 재앙은 우파의 소행이었다. 아돌프 히틀러의 독일 제3제국은 “‘인간 본성의 생물학’이라는 잘못된 신념에 근거, 정복 전쟁과 유대인, 집시, 슬라브 민족, 동성애자를 대량 살상하는 걸 정당화했다.“(하버드대학 심리학자 스티븐 핑커의 책 <빈 서판> 275쪽)
2차대전이 끝나고 극우파의 소행에 사람들이 진저리를 치고 있을 때 좌파의 비극적인 사회공학적인 실험 결과가 알려지기 시작했다. 독재자 김일성, 마오쩌둥, 스탈린은 ‘사회주의 인간’을 말하며 인간 개조를 시도했고, 수없이 많은 사람을 죽였다. 그들은 자국민을 상대로 폭력을 일삼은 도살자이자 인간 백정이었다. 20세기의 공산 독재 희생자 수가 2500만 명에서 1억 명 사이라는 자료도 있다. 나는 개인적으로 20세기 이데올로기 경쟁에서의 공산 진영 패배를 그들이 ‘인간의 이기심’을 무시했기 때문이라는 정도로만 이해했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 자본주의와 공산주의는 인간 본성을 둘러싼 전쟁을 벌였던 것이다. 그리고 급진적인 혁명, 인간 개조를 말하는 자들은 다 세상의 파괴자였다.
밀레니엄이 바뀌고, 20년도 더 지났다. 그런데 인간 본성을 둘러싼 우리의 몰이해는 끝나지 않았다. 김정은과 같은 20세기적 사고를 벗어나지 못한 정치인은 ‘인간 개조’를 시대착오적으로 말하고 있다. 또 인간본성 이슈는 개인적인 차원에서 확인할 수 있다. 즉 자녀를 어떻게 키울 것이냐 하는 측면이다. 서점에 가면 ‘좋은 부모’(parenting) 코너가 있다. 아이들을 어떻게 키울 것인가 하는 책들이 산더미처럼 쌓여있다. 이걸 읽고 아이들을 키워라, 그렇지 않다면 당신이 잘못하는 거라는 식으로, ‘좋은 부모’ 코너는 부모를 압박한다. 자식을 점토처럼 반죽해 낼 수 있다는 잘못된 믿음을 노골적으로 부추긴다. 아이가 잘못 되는 건 부모 책임이라는 걸 강조한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부모 양육이 중요하나, 부모가 할 수 있는 일에는 한계가 있다. 아이 모두가 서울대에 진학할 수는 없는 것이고, 부모 바람과 달리 의사가 되고 싶지 않은 아이가 있다.
“자신이 어떤 존재인가를 보여 주면 인간은 한결 나은 존재가 될 것이다”(러시아 소설가 안톤 체홉)라는 말이 있다. 인간이란 어떤 존재인가에 대해 더 알아갈수록 우리의 삶은 나아질 것이라는 얘기다. 우리가 우리 내면의 세계를 모두 안다는 건 불가능할지 모른다. 하지만 값비싼 비용을 치르고 20세기에 습득한 지식에조차 고개를 돌려서는 안 된다. ‘인간학’이 모든 것의 바탕에 있기 때문이다. 드라마 ‘시지프스’를 보느라 시간을 쓰기는 했다. 하지만 개인적으로 인간 본성을 다시 생각해본 괜찮은 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