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수진영발(發) '북한 원전 문건' 진실 공방이 동력을 잃고 있다. 북한 원전 건설안은 실현 가능성이 ‘제로’에 가까운 아이디어 수준의 제안인 데다, 앞서 보수정권에서 1994년 먼저 추진했다는 점이 발목을 잡았다.
설사 정부 차원에서 원전 건설을 고려했다 해도 전제 조건인 북핵 문제가 먼저 해결돼야 한다. 비핵화를 전제로 한 국제사회의 고강도 대북 제재 완화 없이는 북한 원전 건설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비핵화 문제가 1994년 이후 한 걸음도 진전되지 못했다는 점이 역설적으로 북풍 논란을 잠재운 셈이다.
북한 원전 건설 논의는 2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김영삼 전 대통령은 1994년 광복절 경축사를 통해 "북한이 핵 활동의 투명성을 보장한다면, 북한의 경수로 건설을 비롯한 평화적 에너지 개발에 우리의 자본과 기술을 지원할 용의가 있다“고 말했다.
그해 10월 21일 북한과 미국의 ‘제네바 기본합의서’가 체결됐다. 제네바합의서 1조 1항은 "미합중국은 1994년 10월 20일부 미합중국 대통령의 담보 서한에 따라 2003년까지 총 200만 킬로와트 발전능력의 경수로 발전소들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 제공하기 위한 조처들을 책임지고 취한다"고 명시했다.
단, 합의서의 전제 조건은 '비핵화'다. 이후 1995년 12월 미국·한국·일본·유럽연합(EU) 등이 이사국으로 참여한 한반도에너지개발기구(KEDO)와 북한은 경수로 제공협정에 서명하며 원전 건설에 속도를 냈다. 1997년에는 함경남도 금호지구(신포)에서 원전 건설 착공식을 진행했고, 2002년 8월 7일에는 원자로 기초콘크리트 타설 공사도 진행됐다.
그러던 중 착공 6년 만인 2003년, 원전 공사는 중단됐다. 2002년 10월 북한의 고농축우라늄(HEU) 개발 의혹이 제기되면서다. 미국이 우라늄 개발 계획을 문제 삼고 제네바 합의를 파기하자, 북한은 곧바로 영변 흑연감속로 원자로 봉인을 풀었다. 약 2조7000억원이 투입된 대형 사업이 하루아침에 뒤집힌 셈이다.
◆전문가들 "현재 원전 건설 가능성 더욱 희박"
20년 만에 다시 테이블에 올라온 북한 원전 건설 문건도 마찬가지다. '비핵화'라는 전제 조건이 적용된다. 설사 산업통상자원부의 원전 건설 문건을 정부 차원에서 논의했다 해도 북핵 문제가 먼저 해결돼야 한다는 뜻이다.
북한은 2012년 개정 헌법에 '핵보유국'을 명기하고, 2017년 11월에는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화성-15형' 시험발사 성공 직후 '국가 핵 무력 완성'을 선언하는 등 국제사회를 향해 핵보유국이라는 점을 기정사실화했다.
전문가들은 약 20년이 지난 현 상황에서는 원전 협력 가능성이 더욱 희박해졌다고 조언했다.
신범철 경제사회연구원 외교안보센터장은 "(산업부의 3가지 안은) 북한이 비핵화한다는 증거 없이는 불가능하다"며 "어느 수준이든 비핵화 조치를 해야 유엔 제재위 등에서 예외 인정해줘야 넘어갈 수 있다. 또한 유엔 제재를 넘어도 핵확산금지조약(NPT) 문제를 넘어야 한다"고 말했다. 조한범 통일연구원 선임연구위원도 "북한 원전 건설 지원은 비현실적이고 불가능한 얘기"라고 꼬집었다.
산업부 보고서에 따르면, 함경남도 신포에 한국산 원전 APR1400을 짓는 게 1안, 수출형 신규 노형을 비무장지대에 건설하는 게 2안이다. 3안은 중단한 울진 신한울 3·4호기 공사를 재개해 북으로 송전하는 안이다.
3가지 안 모두 국제사회의 동의가 필요하다.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의 대북 제재결의안 1718호는 대량살상무기(WMD) 프로그램 관련 품목과 재래식 무기, 사치품 거래 금지, 화물 검색 조치 등의 제재 내용을 담고 있다. 핵 관련 기술과 물자의 이동이 엄격하게 통제된 만큼 유엔과 미국의 독자 제재 해제 없이는 원전 제공이 어렵다는 주장이다.
또한 유엔 제재를 넘는다고 해도, 북한이 2003년 1월 NPT를 탈퇴한 점도 문제다. NPT 탈퇴 국가에는 원전을 건설할 수도 없고, 원전 건설을 포함한 원자력의 평화적 이용을 위해서는 핵을 폐기한 후 NPT에 복귀해야 하는 전제 조건이 있다. NPT 복귀 후엔 국제원자력기구(IAEA)의 정기 사찰을 받아야 한다.
◆北 핵 포기해도 美 동의 거쳐야
위와 같은 조치는 전부 완전 핵 폐기라는 첫 번째 과제를 전제하고 있다. 비핵화가 상당히 진전되지 않는 이상 북한에 원전을 짓는다는 계획은 거론되기도 힘들다는 뜻이다.
핵 폐기 자체가 어려울 뿐만 아니라, 원자력 수출을 위해서는 미국의 동의도 필요하다. 북한이 핵을 폐기하고, NPT에 복귀하더라도 '한국형 경수로' 원천기술과 라이선스는 미국이 갖고 있어 한국 정부가 독자적으로 원전 건설을 추진할 수 없기 때문이다.
앞서 우리 정부는 아랍에미리트연합(UAE)에 원전을 수출할 당시에도 UAE는 미국과 원자력 협정을 체결해 동의를 받았다.
조 연구위원은 "한반도 신경제 구상 연구책임자로 일했지만, 북한에 원전을 건설한다는 내용은 하나도 없었다"며 "논의가 있었다 해도 산 넘어 산이다. 원자력을 수출할 때는 원자력 원천기술을 가진 미국의 승인 없이는 안 된다. 결국 원전 건설은 불가능한 얘기"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