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역사에는 금주법이 발동하기 전에 위스키세라는 것이 존재했다. 조지 워싱턴 초대 대통령이 건국 초기에 연방정부의 부채를 해결하기 위해 위스키에 세금을 매긴 것이다. 표면상 이유는 국민들의 건강을 위한다는 것이었다. 우리나라에서 담뱃세 인상과 비슷한 논리였다.
당시 미국에는 애팔래치아 산맥을 경계로 동부에서는 대규모 위스키업자들이 존재했지만 서부에서는 농부들이 소규모로 운용하며 부수입을 올렸다. 서부 농부들은 위스키를 화폐 대신 썼기 때문에 돈에 세금을 물린다고 폭동을 일으킨다. 세제를 이상하게 만들어 술을 많이 만들수록 세금을 적게 내는 구조라 서부 농민들은 차별대우를 받는다는 생각도 있었다. 1791년부터 1794년까지 전개되는 이 사건을 미국 역사에서는 '위스키 반란(Whiskey Rebellion)'이라 부른다. 워싱턴 대통령이 직접 군대를 이끌고 반란군을 진압해야 했다.
세금이 이렇게 어려운 문제이다. 인류 역사에서 증세를 순조롭게 받아들인 경우는 스웨덴 등 일부 국가를 제외하고는 극히 드물다.
◆어려운 사람 돕고 싶지만 내 세금으로는 싫다?
지난 2일 보건복지부 중앙사고수습본부가 성별과 연령, 지역별로 할당한 전국 만 18세 이상 성인 남녀 1000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를 보면 아주 흥미로운 대목이 나온다.
우리 국민들은 정부의 방역 조치들에 협조하면서 영업상 피해를 본 자영업자에 대한 지원 문제에도 어느 정도 공감대를 이루고 있다. 거리두기로 운영이 제한된 자영업자에 대해서는 10명 중 8명가량(79.8%)이 '국가 재정 지원이 필요하다'고 답했다.
하지만 재원 마련과 관련해, 자영업자 재정 지원을 위한 추가 세금 납부에 대해서는 과반인 55%가 '의향이 없다'고 답변했고, 추가 세금 납부 의향이 있다는 응답은 22.5%에 불과했다.
이런 상황에서 참여연대는 지난 5일 서울 영등포구 국회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코로나로 인해 피해 보는 자영업자 등을 돕기 위해 이른바 ‘사회연대세’를 도입하자고 제안했다.
그런데 해당 청원안을 보면 과연 국민들이 따라줄지 의심스러운 대목이 많다. 가령 법인세 과세표준 200억~3000억원 법인에 대해선 현행 22%에서 25%로, 3000억원을 초과하는 법인에 대해선 현행 25%에서 28%로 각각 세율이 3%포인트씩 올리자는 것이다. 국민들은 법인 세금이야기만 나오면 자기와는 상관이 없을 것이라고 무심코 넘어가는데, 참여연대안에 따르면 소득세율도 과세표준 4600만원 이상 개인에 대해 구간에 따라 5%포인트에서 최대 15%포인트까지 높아진다.
과세표준 4600만원 이상인 사람들이 세금을 더 내라고 하면 과연 얼마나 동의할지 의심스러운 대목이다.
참여연대가 과세대상을 비교적 크게 넓힌 것은, 코로나로 인한 미증유의 경제난국에 대처하기 위해서는 문재인 정부가 집권 초기부터 주장했던 슈퍼리치에 대한 징벌적 과세만으로는 세원 확보가 어렵기 때문이다.
◆보편적 증세 없이 복지수요 감당 어려워
문재인 대통령이 집권 초기인 2017년에 ‘슈퍼리치’에 대한 증세방안을 내놓자 시민단체 ‘내가만드는복지국가’는 논평을 내고 “(문 대통령의 슈퍼리치 증세 발언은) 불과 약 4조원의 세입을 확보한다는 명분으로 다른 증세 논의를 봉쇄하는 문제점을 지닌다”고 주장했다. 이 단체는 이어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평균에 비해 부족 세금이 연 100조원인 나라에서 고작 4조원을 마련하는 방안이 촛불정부의 증세 목표여서는 곤란하다”며 “극소수 부자와 기업에 한정하는 증세는 복지국가를 지향하는 조세정책으로 어울리지 않는다”고 했다.
이른바 보편적 증세 외에는 복지국가 재원 마련이 어렵다는 주장일 것이다.
일각에서는 종부세 등 토지세가 만병통치약처럼 통하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꼭 그렇지는 않다. 종부세 세제 변화로 향후 5년간 종부세 추가 징수액 규모는 5조7131억원으로 추정되고 있다. 이 정도 규모는 세금을 부담하는 특정 계층에게는 세금폭탄으로 여겨지지만 복지국가 운운의 재정을 논의하는 수준에는 턱없이 미치지 못한다.
하지만 이 같은 계산도 금방 모순에 빠진다. 종부세라는 것이 부동산 가격 폭등에 대한 징벌적 성격이 강한데, 세금의 목적이 복지를 위한 세원 확보가 아니라 부동산 시장 안정이라면, 진짜 부동산 시세가 하향곡선을 그려 세금의 목적을 달성하면 그만큼 세수는 줄어들기 마련이다. 종부세 등 징벌적 세금으로 못사는 사람들을 도와주는 데는 근본적인 한계에 봉착하게 된다.
이에 따라 최근에는 ‘보편적 증세’가 본격 등장하고 있는 것이다.
여당 3선 중진인 이원욱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지난달 27일 정부의 코로나 방역 조치로 영업 손실을 입은 자영업자·소상공인을 지원하는 '손실보상제'와 관련, "한시적 부가가치세 인상으로 손실 보상 기금을 마련해보면 어떨지 고민하고 있다"고 전했다.
‘정세균(SK)계’로 꼽히는 이 의원은 이날 YTN라디오 인터뷰에서 "2019년 기준으로 부가세 (세수) 기준이 연간 70조원 정도 되는데 1% 내지 2%를 (추가로) 부과해 손실보상 기금을 마련해 그 돈으로 지급하는 방식"이라며 이렇게 말했다.
부가세 인상은 이원욱 의원이 어느날 불쑥 제기한 것은 아니다.
지난해 김학수 한국개발연구원(KDI) 연구위원이 한국재정학회 추계학술대회에서 발표한 보고서에 따르면 현행 10%인 부가세율을 12%로 2%포인트 올리고, 면세 대상인 교육·금융·의료서비스 부문에 5% 경감 세율을 적용하면 2050년에도 현재 수준의 부가세 수입을 확보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국책연구기관에서 보고서라는 형식을 통해 부가세 인상이라는 화두를 슬쩍 던진 것이다.
OECD가 최근 발표한 '2020년 소비세 동향'에 따르면 우리나라의 부가가치세율은 10%로, 미국을 제외한 36개 회원국 중 캐나다(5%), 스위스(7.7%)에 이어 세 번째로 낮다. OECD 평균은 19.3%다. 우리나라는 1977년 부가세를 도입한 후 한 번도 세율을 높인 적이 없다. 일본만 보더라도 저성장·초고령화 사회 진입에 따른 보편적 증세를 위해 기존 5%에서 2015년 8%로, 올해 다시 10%로 인상했다. 이탈리아(22%), 영국(20%), 독일(19%) 등도 한국보다는 높다.
상황이 이러하니 부가세 인상 여력이 있다는 주장이 나올 만하다.
이 같은 논란에 대해 이낙연 더불어민주당 대표가 지난 4일 언론 인터뷰에서 “증세는 불가능하다”고 강조한 것은 조세저항의 역사를 충분히 인식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사실 ‘증세여론’을 만들어내는 것이 그리 쉽지는 않다.
세율 인상이 거론되고 있는 부가가치세는 지금은 국가 세수에서 없어서는 안 될 중요 세금이지만, 처음 도입될 때는 18년 박정희 정권을 끝장낼 정도로 파급력이 컸다.
“그때 공화당에서는 부가세 도입 주역을 문책했어요. 부가세 때문에 박 대통령이 시해됐다는 엉뚱한 논리를 적용했어요. 국보위에 끌려 갔어요. 죽는다기보다, 사표 낼 각오로 갔어요. 당시 심유선 장군(소장)이 국보위 재무분과위원장이었어요. 그분이 재무부 내부에서도 반대하는 부가세를 강 과장이 주도적인 역할을 한 것이 사실이냐고 추궁했지요. 참으로 어이가 없었어요.”
재무부에 세제국 사무관으로 근무하던 시절, 1977년 부가가치세를 신설하는 실무자였던 강만수 전 기획재정부 장관의 회고이다. 오래전 언론 인터뷰 기사인데, 부가가치세가 부마사태의 원인이 되었다는 것은 이미 당시부터 정설로 굳어졌다. 전두환이 이끌었던 국보위 역시 부마사태를 조세저항으로 보고 부가세 실무자였던 강만수를 소환해 부가세 입법과정을 추궁한 것이다.
'5공 정권의 설계자'로 불리는 허화평 전 의원은 자신의 저서 <지도력의 위기>에서 “정치적 긴장과 조세 불만이 복합적으로 작용해 폭발한 것이 부산·마산지역에서 발생한 부마 사태”라고 결론을 냈다.
전두환은 물론 5공의 주역들은 부가세에 대해 날선 비판을 했었다. 조세저항으로 박정희 정권이 무너졌다는 분석을 그 후계자들이 공유한 것이다.
하지만 강만수 본인은 앞에 인용한 인터뷰 기사에서도 알수 있듯이 부가세가 부마사태의 원인이 되었다는 주장에 절대 동의하지 않았다.
실제 강만수가 장관이 되었을 때 필자가 기획한 ‘위기국면과 강만수의 악연, 부마사태 역시 강 장관이 기획한 부가세가 원인이었나?’라는 제목의 기사에 대해 당시 강 장관이 직접 필자에게 전화를 해서 “부가세가 부마사태의 원인이 되었다는 주장은 말도 안 된다. 부마사태의 원인은 부가세가 아니라 다른 곳에서, 가령 민주화 열망 그런 것에서 찾아야 한다”고 강력히 항의했던 기억이 새롭다. 그는 앞서 인용한 인터뷰 내용과 유사한 주장을 필자에게 집요하게 설득했다.
물론 내국세의 3분의1 넘게 감당하는 부가가치세가 국가재정에 기여한 공로는 지대하다. 이런 점에서 강만수 전 장관이 부가가치세를 설계한 사람으로서 자부심을 느끼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부가세를 굳이 부마사태와 연결해서 생각할 수 있는 대목은 ‘조세저항’이라는 것이 그만큼 어려운 문제라는 점을 상기시키기 위해서이다.
부가세 일률 인상이 뜻하는 ‘보편 증세’든 참여연대가 주장하는 사회연대세나 종부세 강화 등 ‘차별적 증세’든 납세자들에 대한 설득이 병행되지 않으면 ‘조세저항’에 직면해 소기의 성과를 기대할 수 없다.
우리가 복지천국으로 알고 있는 스웨덴은 거두어들인 세금이 어떻게 복지로 납세자들에게 되돌아가는지 오랜 기간 설득하고 동의를 얻는 길고 긴 과정을 거쳤다.
지금처럼 ‘적폐청산’과 '좌파척결'이 정치권의 주요 테마로 대립하고 있는 상황에서는 그 어떤 증세 논의도 의미있는 ‘사회적 합의’를 도출해 내기에는 어려운 상황이다.
특히 이번 정부는 부동산 세제를 다루면서 ‘세금은 곧 징벌’이라는 이상한 도그마를 국민들에게 주입시켰다. 세금에 대한 그런 국민적 인식을 되돌려 ‘복지를 위한 보편적 증세’를 논의하기 참 어려운 국면이 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