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다면 화학연구실의 실체는 과연 어떨까. 최첨단 신기술 연구개발이 한창인 그곳은 아이러니하게도 여전히 구시대에 머물러 있다. 특히 국내 수많은 대학 연구소에서는 수기나 엑셀 정도로 시약 현황을 공유하는 등 아날로그 방식으로 관리가 이뤄지고 있다. 50글자가 넘는 수백, 수천개의 약품 이름과 병 라벨을 연구원들은 일일이 밤을 새워 가며 수기로 적는 것이 국내 연구실의 일상적인 풍경이다. 실상이 이렇다 보니 먼지 쌓인 약병을 보는 것은 흔하고, 유통기한이 10년도 더 지난 1급 발암물질을 방치하는 곳도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다.
문제는 국내 연구실에서 보유한 시약들은 300~1000종으로, 이들 대부분은 인체에 해로운 화학물질이다. 대학 연구실은 특히 시약 관리가 좋지 못해 사용기한이 끝난 시약들이 그대로 시약장에 방치되고 있다. 이런 오래된 시약들의 독성을 파악도 못한 채 방치하거나, 혼합처리하는 과정에서 최악의 ‘폭발 사고’가 발생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지난해 경북대 화학연구실 사고가 대표적인 경우다.
과학기술정보통신부에 따르면 국내 연평균 연구실 안전사고 발생건수는 약 231건으로, 0.6일당 한 번꼴로 일어난다. 주요 발생장소는 대학 연구실로, 전체 연구실 안전사고의 82.6%를 차지한다. 이런 사고는 연구실 내 시약 등 유해인자 위험성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해 일어난 경우가 다반사다.
특히 시약들의 물성(물질 자체가 갖고 있는 특유한 상태)을 고려하지 않고 보관하면 독성으로 변하기 쉽다는 점에 주의해야 한다. 시한폭탄 같은 위험물질을 연구실에 상시 비치하는 셈이기 때문이다. 시약의 정확한 물성을 이해하고 시약 생애주기에 맞춰 관리하는 일이 연구실 안전사고 예방의 첫걸음이다.
최근 국가 차원에서 연구소 업무환경 안전조사 작업에 착수한 것은 환영할 일이다. 지난해 9월 국내 최초로 과학기술정보통신부 주도로 실시한 ‘2020년 연구실별 유해인자 현황조사 사업’이 그것이다. 이로 인해 국내 연구소의 시약관리 현황 파악이 면밀히 이뤄졌다. 전국 7만9223개 연구실 내 유해인자 현황 전수조사가 완료되면, 연구실 내 유해인자 현황 파악 및 안전정보 제공시스템 구축 기반을 마련할 수 있다. 이제야 연구실 안전 가이드라인 정립을 위한 포문이 열리는 것이다.
이 사업에 활용된 ‘랩키퍼’라는 프로그램은 국내 스타트업이 개발한 시약 자동 등록 프로그램이다. 인공지능(AI) 기술이 적용돼 스마트폰 사진 촬영만으로 유해인자를 인식, 제반정보를 자동으로 등록해준다. 일일이 연구원이 수기로 적는 수고를 덜어줬다. AI 엔진을 통해 각 유해인자 카테고리별 필요 정보를 자동 인식해 데이터베이스화하는 기능도 있어, 전국단위 전수조사 사업이 훨씬 신속정확하게 이뤄졌다. 특히 화학물질뿐만 아니라 생물체, 가스, 연구장비, 보호장비 등 총 5개의 유해인자 카테고리에 모두 적용 가능해 연구실 전반의 안전을 체크할 수 있었다.
첨단 기술개발에 앞장서고 있지만 정작 국내 연구실 업무환경은 첨단과 너무나도 거리가 멀었던 게 사실이다. 연구원들은 지금도 밤낮없이 코로나19 예방과 치료제 개발 등 연구개발에 여념이 없다. 그들 덕분에 코로나 이전의 일상을 되찾는 시간이 한층 빨라질 것이다. 그 전에 연구원들이 두 번 다시 어이없는 폭발사고로 소중한 생명을 잃는 참사가 없도록, 안전한 연구환경이 하루빨리 조성돼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