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가 말한 '나'는 바로 '얼나'다
1905년 봄 15세 소년 류영모는 서울 연동교회 예배에 참석했다. 조선에 천주교가 들어온 지 112년, 기독교가 들어온 지 22년이 되던 해였다. 소년은 선교사 제임스 게일의 설교를 들었다. 게일은 'GOD'을 천주(天主)라는 말을 쓰느냐 하나님이라는 말을 쓰느냐 고심하다가 '하나님'이란 우리말로 정착시킨, 한국 기독교의 선구적 헌신자다. 신약성경이 우리말로 번역된 것은 1887년이었고, 구약은 1910년이다. 류영모가 기독교에 입문하던 시절, 구약은 중국어 번역본이었다.
류영모는 기독교를 알게된 지 51년이 되는 1956년에, 이런 말을 하였다.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한 14장 6절). 하느님이 주신 얼나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예수는 하느님이 예수의 마음속에 보낸 얼나가 예수 자신의 길이요 진리요 생명임을 깨달은 것이다. 예수는 얼나와 길, 얼나와 진리, 얼나와 생명이 둘이 아닌 것을 깨달았던 것이다. 얼나를 길(道)로 표현한 이가 노자이며, 얼나를 진리로 표현한 이가 석가이며, 얼나를 생명으로 표현한 이가 예수다."
류영모의 '얼나'는 그의 사상의 모든 것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류영모가 위대한 이유는, 많은 이들이 추상적으로 혹은 개념적으로 이해했던 '얼나'를 뚜렷하게 사상의 중심주제로 궁구한 사상가였다는 점이다. 기독교를 배태한 서구인들 스스로도, 예수가 설파한 그 참뜻만큼 철두철미하게 인식하지 못했던 '성령'의 문제를, 동서양 사상의 해박한 회통(會通)과 기독교 사상 자체에 대한 순일한 정진을 거쳐 결정적인 깨달음에 당도했다는 바로 그 점이다.
기독교가 20세기에 이르러 동양의 어느 대각(大覺)에게서 본질적인 깨달음의 발화(發火)가 이토록 치열하게 이뤄질 것을 짐작한 사람은 없었을 것이다. 그는 평생의 성서 연구 속에서 신의 진언(眞言)과 예수의 직언(直言)을 읽어냈다. 그 진언과 직언 바깥의 많은 수식(修飾)들은 종교에 대한 세속적 욕망을 담은 '인간들의 책략'으로 이뤄진 번잡한 해석과 과장과 미화들임을 간파했다. 예수라는 자아를 '얼나(靈我)'로 기표한 순간, 기독교는 세상의 많은 신앙과 종교와 사상이 지닌 보편을 가장 적실하게 실체화했으며 오직 그것만으로 생명을 얻은 종교라는 사실이 드러났다.
얼나의 잣대로 보면, '쭉정이'가 보인다
예수가 '얼나'로 거듭난 신의 아들(人子)이라는 뚜렷한 사실 앞에, 예수의 제자와 기자(記者)들이 쏟아낸 팩트와 가짜뉴스들은 알곡과 쭉정이처럼 가려질 수 있었다. '얼나'가 드러내는 가장 진지한 핵심은 '몸'이라는 다른 자아에 대한 문제성이었다. 류영모는 이것을 얼나와 대비하여 몸나(肉我)로 표현했다. 몸, 혹은 몸나. 이것은 무엇인가. 대부분의 인간이 '자기'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 생물학적 존재인 그것이다. 몸나의 존재성과 가치와 의미를 부정할 필요는 없다. 짐승들이나 나무들도 몸나를 가지고 있다. 그것은 분명하며 뚜렷하다. 몸을 주관하는 의식이 있으며 생물학적 체계를 이끌어가는 시스템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것은 태어나고 사멸하는 시간적인 존재다. 이 모든 것이 우주 만물의 생성사멸 대계(大系)를 지금 여기에 있게 한 창조주의 작품인 것도 의심할 나위가 없다. 다만 몸나는 얼나를 품고 있는 것이며, 시간의 태엽이 감긴 껍질일 뿐이다.
예수는, 그 몸의 삶이 진행되는 인간 속에, 신의 일부이자 대행자이자 뜻이자 아들이자 전부인 무엇이 완전하게 들어와 있음을 확신한 첫 사람이었다. 신의 그 무엇과, 인간이 뚜렷이 생각한 믿음이 굳게 하나로 일치하는 기적이 일어난 것이다. 절대세계와 상대세계가 결코 하나의 세계에서 만날 수 없다는 '모순'이, 신의 의지에 의해 혁신된 것이다. 이것이 예수 현상의 진면목이다. 그리고 이것 외에 어떤 현상도 예수 현상이란 이름을 붙일 수 없다. 만약 그런 이름이 붙을 수 있다면 그것은 인간의 창작이거나 과장이거나 미화, 혹은 오해에 불과하다. 예수 이후 2000년간의 서구 역사가 일정하게 구축해온 기독교의 믿음과 기록과 교리와 교의와 준칙과 관행들은, 최초의 예수 현상에서 상당히 멀어져온 것이 사실이다.
류영모는 예수가 인간의 회임 과정을 거치지 않고 성령으로 잉태되었다는 것, 많은 초인적인 기적을 행사했으며 병든 자를 고치고 죽은 자를 살려냈다는 것, 죽은 지 사흘 만에 부활했다는 것은 물리적인 혹은 역사적인 사실 여부를 따질 필요도 없는, 신앙적 군더더기로 이해했다. 예수를 죽음에 이르게 한 로마의 폭력적 형틀인 십자가 자체에 대한 지나친 의미 부여도, 오히려 불필요한 신앙적 장식으로 보았다. 그것은 인간 속에 하느님의 '얼'이 들어와 있는 예수를 보여준 그 자체의 기적에 비하여 말초적이고 기복(祈福)적인 이야기 삽입일 뿐이라는 얘기다. 굳이 그럴 필요가 없었는데도, 이런 이야기들이 끼어든 것은, '얼나의 기적'을 수많은 다양한 대중에게 제대로 설명할 자신이 없었기에 끼워넣은 유치한 방편에 불과했다.
톨스토이는 4대 복음서를 하나로 요약한 '통일복음서'를 펴냈다. 그 속에는 교회가 지금껏 중요시해온 것들의 일부가 빠져있다. 세례 요한의 수태와 출생, 투옥과 죽음을 빼버렸고, 예수의 출생과 가족계보, 이집트 탈출 부분을 잘라냈고, 가나와 가버나움에서 펼친 그리스도 기적과 악마 축출, 바다 위를 걷는 기적, 무화과나무의 건조, 병자 치료, 죽은 이의 소생을 제외시켰다. 또 예수의 부활과 예수 예언의 성취 같은 부분도 없앴다. 기독교회의 입장에서 보자면, 가장 힘주어 전파해온 성서의 부분들을 잘라낸 셈이다. 통일복음서 서문에서 톨스토이는 이렇게 말한다.
"이런 것들은 조금도 교훈을 담고 있지 않다. 경전을 번잡하게 하는 데 지나지 않는다. 복음서의 한 구절 한 구절이 다 신성하다는 것은 잘못된 생각이다. 예수는 무지한 군중에게 설교했다. 예수가 죽고 오랜 시간이 지난 뒤에 그에 대해 들은 것을 기록하기 시작했다. 5만종의 기록물 중에서 세 가지를 고르고 한 가지 요한복음을 더 골랐다. 성경 복음이 모두 성령으로 보내진 것이라는 상투적인 견해에 미혹되어선 안 된다."
교회는 이렇게 의문을 제기하거나 반론을 제시하는 입들을 억압하고 이단으로 몰아내는 데 급급했으며, 스스로 예수의 본질을 잊거나 잃고 오히려 신의 존재에 대한 끝없는 불신을 양산하는 엉뚱한 길로 나아간 점이 있다. '형식적이고 생활적인 신앙'으로 규모를 불려온 교회와 교단은 참예수를 놓친 바 있었고 그 예수가 증언한 신의 길과 진리와 생명을 잃어버렸다.
서구교회의 오류와 모순을 맨눈으로 직관
류영모는 서구 교회의 어긋난 모습을 동양의 '맨눈'으로 직관했다. 그리고 기독교 정통신앙과 결별한다. 기독교 입문 7년 만인 1912년 무렵 조용히 교회를 나왔다.
하지만, 류영모 삶의 맥락에서, 서구 교회에 대한 가차없는 비판을 읽어내는 데 굳이 치중하지 않기를 바란다. 그건 중요한 문제이나 류영모 사상의 본질을 드러내는 하나의 계기일 뿐이다. 그것이 필요하다면 저 신랄한 톨스토이나, <안티크리스트>를 쓴 니체 같은 뛰어난 지성들의 견해를 숙독하는 것이 더 효율적일 것이다.
하느님과 예수의 관계를 동양적 부자유친(父子有親) 관념으로 이해한 것은, 류영모의 독특한 사유다. 맹자가 설파한 오륜(五倫)은 다섯 가지 인간관계인 부자, 군신, 부부, 장유(어른과 어린이), 붕우의 핵심도리를 규정하고 있다. 그중에 아버지와 아들은 '친(親)'이란 모럴이 있어야 한다고 했다. 이 글자는 '친(亲, 어버이,몸,가까이함)'과 견(見)이 합쳐진 말이다. 어버이는 몸을 낳은 사람이기에 서로 늘 가까이 하며 보살펴야 한다는 뜻이다.
어버이가 자식을 아끼는 내리사랑은 거의 생물학적으로 당연한 반면, 자식이 어버이를 아끼는 치사랑은 인간이 윤리적인 의식을 통해 높여야 하는 관계감정이라고 한다. 동양에서 쓴 이 윤리감각을, 류영모는 기독교의 하느님 아버지와 인자(人子)가 지녀야하는 신학적 모럴로 승화했다. 하느님이 인간을 사랑하는 것은 당연한 반면, 인간이 하느님을 가까이 하려는 감정은 끝없는 북돋움과 수행이 필요하다고 믿었다.
류영모는 예수를 '신'으로 보지 않았다. '신의 대행자'라고 생각하지도 않았다. 다만, 하느님이 그에게 얼나로 내려온 인간이며, 모든 신앙이 닿고자 하는 궁극적 모델이라고 생각했다. 신은 예수의 진정한 아버지였으며, 그는 사람으로서 완전한 신의 아들이었다. 그는 모든 인간이 하느님을 아버지로 믿음으로써 예수처럼 될 수 있다는 메시지를 전하러 온 사람이다. 그런 점에서 류영모는 예수를 '스승'이라고 일컬었다. 먼저 하느님 아들이 되어, 제자들을 부르고 있는 존재로 이해한 것이다.
류영모는 오로지 예수처럼 살고 예수처럼 생각하고 예수처럼 하느님 아버지를 모시며 예수처럼 사랑하며 예수처럼 외롭지만 분명한 길을 가고자 했다. 성서에 나온 부활을, 그는 '예수처럼 되는 것'이라고 이해했다. 하느님의 임재(臨在)인 얼나로 거듭나는 일이 예수처럼 되는 일이며, 바로 '부활의 기적'이다. 그리고 예수의 가장 중요한 실천인 '죽음'을 하느님과의 일체가 되는 깨달음으로 이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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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빈섬의 '다석긔림노래'(2)] 얼나
어,하고 놀라는 사이
혀가 미끄러져 천장을 감습니다
몸없는 몸으로
속없는 속으로
자기가 자기를 부르는 소리, 얼
거기가 거기를 얼우는 소리, 얼
누구있습니까
항문에서 내장에서 심장에서 숨길에서 목구멍에서
어둠이 올라오며 부릅니다 얼웁니다
얼 굴을 돌아돌아 나온 얼굴 나 온얼굴
어둠이 내려가며 어루만집니다
있는 소리 없는 소리 다 들립니다
있는 말숨 없는 말숨 다 보입니다
천지의 빈탕이 내 속 한 점이었구나
딱 앉은 자리, 얼
위를 둘러봐도 아래를 내려봐도
아무도 없습니다 나와 하나
한과 나
얼척 없습니다
몸이 껍질이요
빔이 속인 줄 알겠습니다
온통 밖으로 헤맸던 눈들이 돌아와
내 안에 걸린 캄캄한 한 점을 봅니다
생각이 타오른 불꽃
불꽃이 사윈 끝생각
왜 거기 계십니까 천만 개의 예언이
퍼내고 퍼내도 남는 살음이여
그토록 저토록 이토록 막힌 궁리가
툭 터진 속자리
이렇게 시원한 살림이 계시다니요
누구가 누구를 찾아낸 기쁨, 얼
어디가 어디를 돌아본 놀람, 얼
몸이 아니라 몸의 몸
맘이 아니라 맘의 맘
없는 거기서 있는 여기까지 울리는
메아리 한 줄기
이토록 시원한 얼님과 나님을
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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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나는, 상대세계에 가상적으로만 존재하는 '점(點)'과도 같다. 상대적인 인간의 육신에 깃든 절대적인 하느님이라고 말할 수 있다. 상대세계와 절대세계가 공존할 수 없다는 이론적 관점에서는 모순이며 역설이라 할 수 있다. 하느님의 '얼(靈)'은 몸 속에 어떤 위치를 특정할 수 있는 곳에 존재한다고 말할 수 없지만, 그것이 없다고 말할 수도 없다. 인간 생각의 끝에 닿아있으며, 그 생각의 지향을 만들어내며 그 생각의 비약과 초월을 자극하며 인간 외의 어떤 생물에게서도 포착되지 않은 승화(昇華)하는 영적 성질을 만들어낸다는 점에서 꾸준히 인간 사유의 화두가 되어온 것이 사실이기 때문이다.
예수는 이런 말을 했다. "만약 육신이 영혼 때문에 존재하게 된 것이라면 놀라운 일이다. 그런데 만약 영혼이 육신 때문에 존재하게 된 것이라면 그건 놀라운 일 중에서도 놀라운 일일 것이다. 나는 영혼의 엄청난 풍요로움이 어떻게 이런 빈약한 육신 속에 깃들게 되었는지 놀란다"(도마복음 29장). 얼나가 있어서 몸이 만들어졌는가. 혹은 몸이 만들어지면서 얼나가 생겼는가. 이 수수께끼를 예수도 언급하고 있는 셈이다. 그런데 얼이 몸을 생겨나게 한 것보다, 몸이 얼을 깃들게 했다면 그게 더 놀라운 것이라고 그는 말한다. 예수가 말한 얼의 풍요는 바로, '하느님의 임재(臨在)'가 자아낸 풍요다.
예수가 언급한 것은 자신의 육신과 성령에 대한 얘기이기도 하지만, 모든 인간의 육신과 성령에 대한 것이기도 하다. 즉 인간에게 주어진 얼과 몸으로 이뤄진 두 개의 자아를 인정하면서, 예수 자신 또한 육신에 존재하는 영혼의 놀라움을 가장 뚜렷하게 실현한 존재라는 인식을 담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심지어 예수는 이런 말도 했다. "아버지에 대해 모독하는 자는 용서를 받을 수 있다. 그 아들(예수)을 모독하는 자도 용서를 받을 수 있다. 그러나 성령을 모독하는 자는 이 땅에서도 하늘에서도 용서를 받지 못할 것이다"(도마복음 44장). 성령은 곧 얼나다. 하느님과 자신을 모독하는 것을 참을 수는 있지만, 자신과 하느님의 고유한 본질인 '얼나'를 모독하는 것은 용서할 수 없다는 단언이다.
예수가 인자(人子)로 보내진 뜻은, 인간 속의 얼나를 통해 하느님을 증언하는 것이었으며, 그의 죽음은 '얼나'가 결코 육신의 죽음에 제약을 받지 않고 오히려 육신의 죽음으로 신에게 귀일하는 강력한 에너지를 드러내보인 위대한 전시(展示)였다. 얼나는 바로 예수의 유일한 메시지였고, 인간에 대한 신의 사랑 그 자체였다. 류영모 사상은, 이 지점에서 발화한다. 그는 얼을 지닌 인간을 표현하는 간명하면서도 강력한 말을 만들었다. 그것이 '얼'과 '나'를 결합한 얼나다. 얼나는 몸나(身我) 혹은 제나(自我)로 불리는 육신에 대비한 자아의 개념이다. 몸나와 얼나는 두 개의 '나'가 아니라 하나의 '나'에 결합되는 양상이나 면모를 말하는 것이다.
얼나가 따로 있는 게 아니라, 예수가 표현했듯, 몸에 속한 얼이나 몸을 낳은 얼이 '나'라는 존재에 얼마나 순일하면서도 지속적으로 합일하느냐에 따라 뚜렷해지거나 희미해지는 '얼의 나'다. '얼나'는 육신을 가지고 있는 동안, 인심유위 도심유미(人心惟危 道心惟微)처럼 위태롭고 아리송하여 늘 추스르고 생각의 불꽃으로 정진해야 하는 '잠정적인 상태'에 가깝다.
류영모는 이렇게 말했다. "얼나라는 생각밖에는 다른 생각이 없다. 모든 게 얼나가 원점이 되어서 나온다. 얼나를 생각하면 묵은 것도 새것도 없다. 얼나가 중심이다. 불교의 중도, 노자의 수중(守中), 유교의 중용은 일체가 하느님께 돌아가자는 것이다. 얼나는 예사롭게 저거니 하고 갈 게 아니다. 이 얼나가 대실존(大實存)일 것이다. 이 얼나는 진실이니 할 정도가 아니다. 이 사람 생각은 늘 얼나를 떠나지 않고 얼나에서 모든 게 나온다. 이것을 모르면 내 말을 못 알아듣는다."
얼나는 '얼라'의 영(靈)에 가깝다
우리 말 사투리 중에 '얼라(어린아이)'라는 표현이 있는데, 예수는 '얼나'의 이상적 모델을 자주 '얼라'로 표현하곤 했다. 동심이 지닌, 인간 내면의 원형적인 순수야말로 신의 이미지에 가깝다고 본 것이다. 예수는 "너희 중에 어린아이가 된 자는 누구나 아버지의 나라를 알 수 있으며 세례 요한보다 더 큰 사람이 될 수 있다"(도마복음 46장)고 말하기도 했다. 또 자신(예수)을 만날 수 있으려면 "옷을 벗고도 부끄러움이 없고 아이들처럼 발밑에 벗어놓은 옷을 함부로 밟는 그런 마음일 때"(도마복음 37장) 인자(人子)를 만날 수 있다고 했다.
어린아이를 안고 있는 여인을 보며 예수는 "이 아기들은 아버지 나라에 들어가는 이들(의 영성)과 같다"고 했고 "태어난 지 7일 밖에 안되는 어린아이에게 노인들은 생명의 장소를 물어보라"고 말하기도 했다. 얼나의 이상적인 영적 상황을, 인간의 탐욕이나 사회적인 에고와 성적 욕망이 육신에 들어앉기 이전인 상태에서 찾을 수 있다고 본 것이다.
얼라와 통하는 얼나는, 우리 언어가 낳은 우연한 닮음이겠지만 '얼라'의 말뿌리를 이루는 '어리다'는 말이, '얼'이 고착되지 않았다는 뉘앙스가 있는 만큼 완전한 우연이라고만은 할 수 없다. 예수는 육신의 할례를 받는 것을 비판하고(정말 필요했다면 모체에서 이미 할례를 받고 태어났을 것이다), 얼의 할례를 받으라고 말하기도 했다. 얼의 할례야말로 성령에 합당한 '얼나'로 가는 수행임에 틀림없을 것이다.
류영모는 말했다. "우리 앞에는 영원한 생명인 얼줄이 드리워져 있다. 이 우주에는 도라 해도 좋고 법이라 해도 좋은 얼줄이 영원히 드리워져 있다. 우리는 이 얼줄을 버릴 수도 없고 떠날 수도 없다. 이 한 얼줄을 생각으로 찾아 잡고 좇아 살아야 한다. 이 얼의 줄, 정신의 줄, 영생의 줄, 말씀의 줄에 따라 살아가야 한다."
집필 = 이상국 논설실장
감수 및 자문 = 박영호 다석사상연구회장
@아주경제 '정신가치' 시리즈 편집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