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거릿 대처(Margaret Thatcher·1925~2013)는 영국병을 치유하고 영국을 일류국가로 다시 일으켜 세워 ‘철의 여인’으로 잘 알려진, 20세기가 낳은 위대한 정치가이다. 영국을 영국병에서 완전히 환골탈태시킴으로써 대처리즘(Thatcherism)이라는 정치지도자의 이름을 딴 이즘, 즉 정치경제적 사조 또는 주의를 탄행시킨 위대한 인물이다. 대처 총리는 1979년 5월에 집권해서 1990년 11월에 물러날 때까지 11년 6개월을 집권했다.
1979년 대처 집권 이전 영국은 노동당과 노동조합이 주도하는 방만한 복지와 만성적인 재정적자로 신음하는 ‘영국병’ 탓에 활기 잃은 경제로 추락하고 있었다. 심지어 노동조합이 정권을 좌지우지하는 상황이었다. 1964년 노동당 헤럴드 윌슨 총리가 집권한 이래 1970~74년 잠깐 보수당 에드워드 히스를 제외하고는 대처 이전까지 줄곧 노동당이 집권해 오고 있었다. 이런 형국이니 보수당 히스 총리조차도 노동조합과 정책을 상의해야 할 정도의 입장이었다. 필자가 영국 유학을 하던 1980년 초반에는 노동조합 중에 가장 강성이었던 석탄노조위원장 아서 스카길은 영국을 호령하던 호랑이처럼 보였다. 영국 보수는 설 땅이 없어 보였다. 도저히 힘들어 보이던 그런 상황에서 대처가 집권하고 강력한 리더십으로 영국병을 치유해 ‘철의 여인’으로 평가받은 것이다.
대처는 자유에 대한 강력한 신념과 투철한 리더십으로 영국병을 치유하기 위해 집권하자마자 구조개혁을 밀어붙였다. 심지어 보수당 내 반발도 있었지만 굳은 신념과 집요한 설득으로 반발을 넘어 구조개혁을 완성했다. 먼저 비대해진 정부를 개혁했다. 자유가 인간의 가장 중요한 가치이며, 작은 정부가 국민의 자유를 신장시킨다는 신념에 토대를 둔 개혁이었다. 정부 각 부문의 효율성을 조사하는 등 정밀진단을 실시해 정부조직을 축소하고, 민영화도 추진하고, 규제를 완화하고, 개방적인 공무원제도를 도입했다. 정부조직 축소, 민영화, 규제개혁은 집권당의 권한 축소와도 관련이 있어 보수당 내 반발도 있었지만, 대처는 큰 정부로는 방만한 경제를 해결할 수 없다는 신념으로 설득하고 돌파했다. 그 결과 정부재정지출의 GDP에 대한 비율이 1981년 45%에서 1989년 36%까지 줄었다, 국가부채의 GDP에 대한 비율도 1980년 48%에서 1990년 31%로 줄었다.
대처는 주거정책에도 일대 개혁을 단행했다. 그동안 노동당정부는 공공임대를 중심으로 주거정책을 실시해 왔다. 그 결과 많은 영국 국민들이 공공임대에 살고 있었는데, 많은 공공임대가 슬럼화되는 등 적지 않은 문제점들이 노정되고 있었다. 대처는 소유하고자 하는 인간의 본성에 충실할 때 인간의 자유가 증진되고 주택산업도 발전된다는 신념으로 공공임대를 분양했다. 개인소유가 된 주택들은 개량되고 주택산업도 활기를 띠기 시작했다. 이 영향은 당시 공공임대 중심으로 이른바 주거사회주의정책을 추진해 오던 북유럽 사회주의 국가들의 주택정책에 큰 영향을 미쳤다.
금융정책 면에서는 당시 유럽중앙은행이 탄생하고 그 소재지가 독일 프랑크프루트로 결정되자, 대처는 런던의 국제금융중심지 약화 가능성에 대처하기 위해 1986년 ‘빅뱅’이라는 상상도 못했던 규제 제로의 금융개혁을 단행했다. 그 결과, 런던은 지금도 외환거래액이 뉴욕의 두 배에 달하는 등 여전히 국제금융중심지를 두고 뉴욕과 쌍벽을 이루고 있다.
대처의 이러한 정책들은 큰 성공을 거두며 1988년에는 성장률이 5.9%까지 올라가는 기염을 토하면서 보수당 등 유럽의 우파는 물론 유럽 좌파사회주의 정책에까지 영향을 미쳤다. 1997년 노동당 토니 블레어가 집권했지만 그는 ‘제3의 길’을 주장하고 ‘신좌파(New Left)’ 정책을 추구하는 등 전통적인 좌파 사회주의정책에서 대거 수정된 정책을 채택하는 계기가 되었다. 핵심은 좌파정당들도 ‘사회’라는 개념보다는 ‘경제’라는 개념을 중시하는 방향으로 정책을 전환한 것이었다. 마침내 당시 ‘신중도(Neue Mitte)’를 추진하고 있던 독일의 사회민주당 슈뢰더 총리와 더불어 1999년 6월 8일 런던에서 일명 ‘슈뢰더-블레어 선언’을 하기에 이르렀다. 이 선언문에는 포괄적인 국가 개입의 반대, 공급 위주의 어젠다, 긴축정책 실시, 세제개혁 및 세금인하, 기업활동무대의 확대 및 국가현대화 등 많은 부분이 대처가 개혁하고 시행한 정책들을 포함하고 있다.
1981년 미국 대통령으로 집권해 미국을 재도약시키고 마침내 구 동구와 소련의 붕괴로 공산주의의 종식까지 이끌어내 미국 초대 대통령 조지 워싱턴, 노예를 해방시킨 에이브러햄 링컨과 함께 미국 역사상 가장 존경받는 대통령의 반열에 오른 인물이 로널드 레이건(Ronald Wilson Reagan·1911~2004)이다. 집권하기 전 미국은 오랜 베트남전쟁의 후유증에 따른 반전운동의 확산, 1975년 베트남전쟁의 패배와 베트남 공산화의 후유증, 그 가운데 터져나온 닉슨의 워터게이트 스캔들 등 미국 보수는 최대 위기를 맞고 있었다. 미국 공화당으로서는 도저히 불가능할 것 같았던 그 암흑 같은 위기를 뚫고 레이건은 현직 대통령 카터를 단선으로 주저앉히고 미국 대통령(1981~1989)이 되어 위대한 미국을 재건하고, 마침내 누구도 상상하지 못했던 공산주의 붕괴라는 세계역사의 엄청난 큰 획을 그었다.
레이건 대통령도 대처와 마찬가지로 자유, 가정, 생명을 존중하는 가치관을 정책에 반영하려고 노력하면서 경제정책 면에서는 작은 정부 구현을 위해 소련을 중심으로 한 공산주의 팽창을 제어하기 위한 국방지출을 제외한 통상적인 재정지출을 줄이고 세율을 크게 낮추었다. 레이건은 거대정부와 과도한 세금을 ‘살며시 진행되는 사회주의(creeping socialism)’의 징후로 비판하며, 취임 직후인 1981년 소득세 최고 한계세율을 70%에서 50%로 낮추고 1986년에는 28% 수준까지 인하했다. 작은 정부 구현을 위해 ‘스타워스(Star Wars)’ 계획과 같은 국방지출 외에는 크게 줄였다. 아울러 규제완화 정책을 강도 높게 추진했다. 이러한 레이건의 경제정책을 ‘레이거노믹스’로 칭송하고 있다. 스타워스와 같은 레이건의 ‘힘에 의한 평화 추구’ 정책은 마침내 구 소련 붕괴를 초래했다.
20세기 자유진영에서 가장 위대한 지도자로 평가받고 있는 대처와 레이건 두 지도자의 공통점은 좌파가 정치·경제·사회를 지배하고 있던 가장 암울하고 어려웠던 시기에 좌절하지 않고 이렇게 가면 ‘노예의 길’로 가게 될 것이며, 자유가 개인과 기업의 번영을 가져온다는 점을 외치며 혜성같이 등장했다는 점이다. ‘다시 일어설 수 있다’는 ‘낙관적 신념’을 토대로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만이 노예의 길이 아니라 번영된 미래를 가져다 줄 것이라는 ‘원칙 있는 보수’를 강조하며 새로운 희망을 국민들에게 역설해 국민들의 마음을 얻어 집권했다는 점이다. 집권한 후에는 갖은 난관을 극복하고 굳세게 작은 정부와 민영화, 규제개혁·노동개혁 등을 추진해 대처는 영국병을 치유하고, 레이건은 ‘리버럴’이라는 미명으로 지배하고 있던 좌파에서 미국을 구해내고 마침내 세계 최대의 강대국으로 재탄생시켰다는 점이다.
지금 대한민국은 암울했던 대처 이전의 영국, 레이건 이전의 미국과 유사한 좌경화된 정치사회적 사조가 팽배하고, 거대 좌파여당이 지배한 국회는 삼권분립과 더불어 자유민주주의의 근간인 협치도 무시하고 12·9 입법 폭거를 통해 반기업·친노조 법안들을 대거 통과시키며 34년 전 민주화라는 이름으로 민노총·전교조 탄생 등 좌경화된 ‘87년 체제’를 출범시켰듯이 이제 더욱 완성된 좌파 ‘21년 체제’를 구축하려 하고 있는 분위기다. 그러나 새벽이 오기 전 어둠이 짙듯이 가장 암울한 시기가 자유와 번영을 가져올 수 있는 길목이라는 점을 대처와 레이건으로부터 교훈을 얻으며 이 위대한 두 지도자처럼 낙관적 신념을 가지고 원칙 있는 보수의 길로 매진해 가면, 절망처럼 보이는 지금의 대한민국도 선진국으로 우뚝 도약해 우리의 후손들에게 번영된 미래를 물려줄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