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낭만적이네요. 이 조명, 온도, 습도…."
한 예능프로그램에서 출연자가 남긴 말이었다. 장소, 조명, 온도 등 하나하나의 요소로 어떤 분위기가 형성된다는 의미였다.
그의 말대로 대개 추억은 여러 요소로 만들어진다. 그날의 날씨, 그날의 기분, 그날 먹은 음식이나 만난 사람들 등등. 모든 요소가 그날의 기억이 되는 셈이다. 영화도 마찬가지다. 어떤 영화는 작품이 가진 본질보다 다른 요소들로 재미를 가르기도 한다. 혹평받은 영화가 '인생작'으로 등극할 때도 있고, '인생영화'가 다시 보니 형편없게 느껴질 때도 있다.
<최씨네 리뷰>는 필자가 그날 영화를 만나기까지의 과정까지 녹여낸 영화 리뷰 코너다. 관객들도 같은 경험을 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두고 편안하게 접근하고자 한다.
계절마다 떠오르는 영화가 있다. 저마다 계절을 상징하는 영화들이 다르겠지만 대체로 가을에서 겨울로 넘어가는 계절이면 영화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감독 이누도 잇신)을 떠올리는 이들이 많았다. 나 역시도 마찬가지고.
어느 새벽, 대학생 츠네오(츠마부키 사토시)는 언덕에서 곤두박질치는 유모차와 마주친다. 돈다발을 숨겼네, 마약을 운반하네 소문만 무성했던 유모차 안에는 츠네오 또래의 여자아이가 타고 있다. 다리가 불편한 그는 학교 대신 방안에 틀어박혀 책을 읽는 조제(이케오키 치즈루). 본명은 쿠미코지만 프랑수아즈 사강의 소설에 푹 빠져 자신을 조제라 부른다. 츠네오에게 도움을 받은 조제는 그에게 식사를 제공하고, 조제의 요리 솜씨에 반한 츠네오는 때마다 그를 찾는다. 몇 번의 만남 후 츠네오는 조제에 사랑을 느끼고 두 사람은 동거를 시작한다.
장애가 있는 여자와 자유로운 관계 속에서 사는 남자는 특별한 설정을 제외하곤 보편적인 연애담이다. 서로를 특별하다 여기고 운명이라고 확신하던 시기를 지나 현실의 벽을 느끼고 고민하며 닳아 사라지는 마음 같은 것들은 이미 우리가 겪거나 목격한 사랑 이야기다. 손대면 터질 것처럼 부푼 애틋함, 내가 아니면 안 될 거라면 자만심, 닳아 없어진 마음에 관한 죄책감 등등. 뭉치고 흩어지길 반복하는 감정들은 지극히 우리 범주 안의 감정이라 영화를 보며 여러 차례 벅차고 쓸쓸하며 눈물이 쏟아졌다.
개인적으로 그 자체가 완전무결하게 느껴지는 영화는 리메이크 소식이 달갑지 않다. 보통 리메이크작을 대하는 감독의 태도는 이야기를 반복하거나, 원작에 부담을 느껴 강박적으로 다른 이야기를 하려고 하곤 했으니까.
그럼에도 김종관 감독이 영화 '조제'를 리메이크한다고 했을 때는 어떤 기대가 있었다. 2004년 단편 영화 '폴라로이드 작동법'을 시작으로 '눈부신 하루' '조금만 더 가까이' '최악의 하루' '더 테이블' 등 감각적이고 섬세한 이야기를 다뤄온 김 감독인 만큼 원작 역시 충분히 닳거나 마모되지 않고 전달될 수 있을 거로 생각했다.
사실 시사회 당일에는 얼떨떨했다. 원작과 궤를 함께하면서도 캐릭터의 성격이나 디테일한 요소들을 뒤틀어 묘한 간격이 느껴지게 했다. 그 간극을 받아들인 건 며칠 뒤였다. 몇 번씩 곱씹으면서 원작과 '조제' 사이의 시간, 정서, 청춘의 삶이 틈을 벌릴 수밖에 없다는 걸 인정하게 됐다.
원작 속 츠네오와 조제가 유모차를 매개로 만났다면 리메이크작의 영석과 조제는 전동 휠체어로 만나게 되고, 원작의 조제가 살모넬라균 등에 관심을 가지며 잘난 체를 했다면 리메이크 속 조제는 위스키에 관해 해박한 지식을 자랑한다. '인싸'인 츠네오와 달리 영석은 내성적인 편에 가깝고, 원작 속 조제가 숨겨야 하는 존재였다면 리메이크작 속 조제는 스스로 존재를 감추는 인물이다. 이처럼 김종관 감독은 아주 작은 디테일의 변화로 완벽히 다른 질감의 감성과 이야기를 전했다.
앞서 언급한 대로 김종관 감독은 원작 소설, 영화에 기대려하지 않고 자신의 시선과 감성 그리고 시대적 변화를 작품에 녹여내려고 했다. 이는 '단맛'처럼 느껴질 수도 있고, '짠맛'으로 느껴질 수도 있다. 시대적으로나 환경적으로 원작 속 조제, 츠네오가 거리감이 느껴졌다면 리메이크 속 조제, 영석은 충분히 공감 가능한 환경에 처해있고 같은 고민을 나누고 있기 때문.
반대로는 가벼운 마음으로 여자들을 만나왔지만 조제에게는 측은함과 동시에 특별한 마음을 가졌던 츠네오와 달리 영석이 무려 세 명의 여자와 관계를 맺는 과정은 쉬이 이해가 가지 않는다. 성격이 다른데 설정은 공유하다 보니 빚어지는 간극처럼 보인다. 이 외에도 원작이 영상으로 감추고, 언어로 드러냈던 부분과 리메이크가 드러내고 감추는 부분도 차이가 있다. 흥미롭게 느껴지기도 하고 의아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개인적으로 원작은 '결말' 때문에 더욱 높게 평가받는 영화라고 생각한다. 결혼을 염두에 두고 지방에 사는 부모님에게 조제를 데려가던 츠네오가 마음을 바꾸게 되는 것, 츠네오를 통해 진짜 세상을 만나게 된 조제가 그의 부재에 좌절하지 않고 일상을 사는 것은 부족하거나 과하지 않게 관객의 마음에 '딱' 들어차기 때문이다. 가장 보편적인 이별이고 이상적인 후일담이다.
'조제'는 원작과 같지만 다른 결말을 택한다. 리메이크 속 조제는 더 멀리 나아갈 준비가 되어있고 영석은 그토록 바라던 안정적인 삶의 궤도에 접어든다. 영화를 본 관객들은 이해하겠지만 두 작품은 이를 통해 다른 결말을 보여준다.
드라마 '눈이 부시게'를 통해 한 차례 호흡을 맞췄던 한지민과 남주혁은 안정적인 호흡을 보여준다. 김 감독이 설정한 '조제' 속 세계를 누구보다 잘 이해하고, 펼쳐냈다. 차분하게 각자의 인물에 녹아들어 맡은 바를 충실히 해냈다. 인물들이 느끼는 현실과 이상 중, 현실을 적절하게 표현해냈다. 오는 10일 개봉이며 러닝타임은 117분 관람등급은 15세다.
한 예능프로그램에서 출연자가 남긴 말이었다. 장소, 조명, 온도 등 하나하나의 요소로 어떤 분위기가 형성된다는 의미였다.
그의 말대로 대개 추억은 여러 요소로 만들어진다. 그날의 날씨, 그날의 기분, 그날 먹은 음식이나 만난 사람들 등등. 모든 요소가 그날의 기억이 되는 셈이다. 영화도 마찬가지다. 어떤 영화는 작품이 가진 본질보다 다른 요소들로 재미를 가르기도 한다. 혹평받은 영화가 '인생작'으로 등극할 때도 있고, '인생영화'가 다시 보니 형편없게 느껴질 때도 있다.
<최씨네 리뷰>는 필자가 그날 영화를 만나기까지의 과정까지 녹여낸 영화 리뷰 코너다. 관객들도 같은 경험을 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두고 편안하게 접근하고자 한다.
어느 새벽, 대학생 츠네오(츠마부키 사토시)는 언덕에서 곤두박질치는 유모차와 마주친다. 돈다발을 숨겼네, 마약을 운반하네 소문만 무성했던 유모차 안에는 츠네오 또래의 여자아이가 타고 있다. 다리가 불편한 그는 학교 대신 방안에 틀어박혀 책을 읽는 조제(이케오키 치즈루). 본명은 쿠미코지만 프랑수아즈 사강의 소설에 푹 빠져 자신을 조제라 부른다. 츠네오에게 도움을 받은 조제는 그에게 식사를 제공하고, 조제의 요리 솜씨에 반한 츠네오는 때마다 그를 찾는다. 몇 번의 만남 후 츠네오는 조제에 사랑을 느끼고 두 사람은 동거를 시작한다.
장애가 있는 여자와 자유로운 관계 속에서 사는 남자는 특별한 설정을 제외하곤 보편적인 연애담이다. 서로를 특별하다 여기고 운명이라고 확신하던 시기를 지나 현실의 벽을 느끼고 고민하며 닳아 사라지는 마음 같은 것들은 이미 우리가 겪거나 목격한 사랑 이야기다. 손대면 터질 것처럼 부푼 애틋함, 내가 아니면 안 될 거라면 자만심, 닳아 없어진 마음에 관한 죄책감 등등. 뭉치고 흩어지길 반복하는 감정들은 지극히 우리 범주 안의 감정이라 영화를 보며 여러 차례 벅차고 쓸쓸하며 눈물이 쏟아졌다.
개인적으로 그 자체가 완전무결하게 느껴지는 영화는 리메이크 소식이 달갑지 않다. 보통 리메이크작을 대하는 감독의 태도는 이야기를 반복하거나, 원작에 부담을 느껴 강박적으로 다른 이야기를 하려고 하곤 했으니까.
그럼에도 김종관 감독이 영화 '조제'를 리메이크한다고 했을 때는 어떤 기대가 있었다. 2004년 단편 영화 '폴라로이드 작동법'을 시작으로 '눈부신 하루' '조금만 더 가까이' '최악의 하루' '더 테이블' 등 감각적이고 섬세한 이야기를 다뤄온 김 감독인 만큼 원작 역시 충분히 닳거나 마모되지 않고 전달될 수 있을 거로 생각했다.
사실 시사회 당일에는 얼떨떨했다. 원작과 궤를 함께하면서도 캐릭터의 성격이나 디테일한 요소들을 뒤틀어 묘한 간격이 느껴지게 했다. 그 간극을 받아들인 건 며칠 뒤였다. 몇 번씩 곱씹으면서 원작과 '조제' 사이의 시간, 정서, 청춘의 삶이 틈을 벌릴 수밖에 없다는 걸 인정하게 됐다.
원작 속 츠네오와 조제가 유모차를 매개로 만났다면 리메이크작의 영석과 조제는 전동 휠체어로 만나게 되고, 원작의 조제가 살모넬라균 등에 관심을 가지며 잘난 체를 했다면 리메이크 속 조제는 위스키에 관해 해박한 지식을 자랑한다. '인싸'인 츠네오와 달리 영석은 내성적인 편에 가깝고, 원작 속 조제가 숨겨야 하는 존재였다면 리메이크작 속 조제는 스스로 존재를 감추는 인물이다. 이처럼 김종관 감독은 아주 작은 디테일의 변화로 완벽히 다른 질감의 감성과 이야기를 전했다.
앞서 언급한 대로 김종관 감독은 원작 소설, 영화에 기대려하지 않고 자신의 시선과 감성 그리고 시대적 변화를 작품에 녹여내려고 했다. 이는 '단맛'처럼 느껴질 수도 있고, '짠맛'으로 느껴질 수도 있다. 시대적으로나 환경적으로 원작 속 조제, 츠네오가 거리감이 느껴졌다면 리메이크 속 조제, 영석은 충분히 공감 가능한 환경에 처해있고 같은 고민을 나누고 있기 때문.
반대로는 가벼운 마음으로 여자들을 만나왔지만 조제에게는 측은함과 동시에 특별한 마음을 가졌던 츠네오와 달리 영석이 무려 세 명의 여자와 관계를 맺는 과정은 쉬이 이해가 가지 않는다. 성격이 다른데 설정은 공유하다 보니 빚어지는 간극처럼 보인다. 이 외에도 원작이 영상으로 감추고, 언어로 드러냈던 부분과 리메이크가 드러내고 감추는 부분도 차이가 있다. 흥미롭게 느껴지기도 하고 의아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개인적으로 원작은 '결말' 때문에 더욱 높게 평가받는 영화라고 생각한다. 결혼을 염두에 두고 지방에 사는 부모님에게 조제를 데려가던 츠네오가 마음을 바꾸게 되는 것, 츠네오를 통해 진짜 세상을 만나게 된 조제가 그의 부재에 좌절하지 않고 일상을 사는 것은 부족하거나 과하지 않게 관객의 마음에 '딱' 들어차기 때문이다. 가장 보편적인 이별이고 이상적인 후일담이다.
'조제'는 원작과 같지만 다른 결말을 택한다. 리메이크 속 조제는 더 멀리 나아갈 준비가 되어있고 영석은 그토록 바라던 안정적인 삶의 궤도에 접어든다. 영화를 본 관객들은 이해하겠지만 두 작품은 이를 통해 다른 결말을 보여준다.
드라마 '눈이 부시게'를 통해 한 차례 호흡을 맞췄던 한지민과 남주혁은 안정적인 호흡을 보여준다. 김 감독이 설정한 '조제' 속 세계를 누구보다 잘 이해하고, 펼쳐냈다. 차분하게 각자의 인물에 녹아들어 맡은 바를 충실히 해냈다. 인물들이 느끼는 현실과 이상 중, 현실을 적절하게 표현해냈다. 오는 10일 개봉이며 러닝타임은 117분 관람등급은 15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