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호택 칼럼] 선거 결과 믿지 않는 민주주의의 위기

2020-11-16 17: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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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지난 13일(현지시간) 백악관 로즈가든에서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트럼프 대통령이 공개행사에 나선 것은 지난 5일 이후 8일 만이며, 7일 대선 패배 결정 이후 첫 공개행보다. [워싱턴= AP·연합뉴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은 대선 결과에 승복하지 않고 ‘부정선거’ ‘사기’ 같은 트윗을 날리면서 400여개의 선거 소송을 벌이고 있다. 그러나 법정에서 번번이 패하고, 재판을 진행하는 연방판사들로부터 비판과 조롱을 당할 정도다. 대선 소송전에서 가장 화제가 된 것은 펜실베이니아 법정에서 트럼프 측 변호인들의 ‘논제로(nonzero)' 답변이다.

트럼프 측 변호인들은 모든 공화당 참관인들이 개표소에 들어가지 못하고 있다고 주장하며 개표를 즉각 증단하는 긴급명령을 내려달라고 판사에게 요구했다. 폴 다이아몬드 판사가 이 문제를 따지고 들자, 변호인들은 ‘논제로’ 숫자의 공화당 참관인이 있었다고 말했다. 논제로는 0이 아닌 숫자다. 한 명 이상의 참관인이 있었다는 의미다. 논제로 답변이 나오자, 다이아몬드 판사는 누구나 들을 수 있게 화난 목소리로 “실례지만 그렇다면 뭐가 문제요”라고 말하고 트럼프 측의 소송을 기각했다.

다이아몬드 판사는 공화당인 조지 W 부시 전 대통령이 연방판사로 임명했다. 그는 2016년 대선에서는 펜실베이니아주(트럼프 승리)의 개표를 재검표해 달라는 녹색당 후보의 소송을 기각한 경력이 있다.

일리노이주 디트로이트에서 트럼프 측 변호인들이 공화당 투표소 참관인을 증인으로 세워 우편투표의 효력을 문제 삼자 신시아 스티븐스 판사는 “증인의 진술은 사실만을 말해야 할 법정에서 고려할 가치가 없는 전문(傳聞)”이라고 반박했다. 변호인들이 “참관인이 직접 얻은 증거”라고 주장하자, 판사는 “내가 누군가가 뭐라고 하는 것을 들었다”는 증언이 전문이 아니라는 이유를 설명해 보라며 핀잔을 주었다.

대법원에는 공화당 대통령이 임명한 대법관이 다수지만 그들이 증거재판주의를 무시하고 트럼프 편을 들리라고는 상상하기 어렵다. 대법원은 주정부가 관리하는 대통령 선거의 수학적 표 계산에 직접 개입하는 것을 꺼리는 전통이 있다. 트럼프와 변호인들은 “대대적인 부정선거가 있었다”고 주장하면서도 이를 뒷받침할 증거를 제시하지 못했다. 유명 로펌의 변호사들도 트럼프 재판에서 철수하고 있다.

트럼프 지지자들 "선거 도둑맞았다"

트럼프는 대선 직전에 에이미 코니 배럿 대법관을 지명해 연방대법원에 6대3의 확고한 보수 우위 구도를 짜놓았다. 2000년 대선에서 연방대법원이 5대4로 공화당에 유리한 결정을 내림으로써 조지 W 부시가 승리한 전례를 기대했을 것이다.

이번에는 상황이 다르다. 2000년 대선 결과는 선거인단 수에서 고어가 266대271로 근소하게 뒤졌지만 29석의 선거인단이 걸린 플로리다주의 총 득표수가 537표 차이가 났기 때문에 재검표 결과에 따라서는 선거결과가 뒤집힐 가능성도 없지 않았다. 이번에는 트럼프 측이 여러 경합주에서 선거일 이후에 들어온 우편투표를 문제 삼고 있지만 이 표를 제외하고서도 바이든의 승리로 돌아간다.
바이든이 박빙의 1만4000표 차로 승리한 조지아주에서는 피 말리는 수작업으로 재검표를 했지만 결과는 같았다. 선거를 관리하는 조지아주의 주지사는 공화당원이어서 뻔한 결과가 예상됨에도 공화당 열성 지지자들과 지도부의 압력을 이겨내지 못하고 수작업 재검표를 했다.

트럼프가 2024년을 노리고서 7000만 지지자들을 결속하기 위해 소송전을 벌이고 있다는 해석도 나오지만 대선 불복과정을 지켜보며 트럼프와 거리를 두는 공화당원들도 늘어나고 있다.

이번 미국선거를 뒤집은 것은 우편투표였다. 코로나 감염을 두려워한 미국인들이 우편투표에 대거 참여했다. 민주당 지지성향이 높은 대도시의 흑인 유권자들, 그리고 트럼프의 갈지자 코로나 대책에 분노하는 많은 사람들이 우편투표를 했다. 조지아주에는 트럼프가 37만2000표를 앞서갔으나 사전투표와 우편투표함이 개표되면서 판세가 역전됐다. 트럼프 지지자들과 공화당원들은 조지아의 선거 기구를 민주당이 장악하고 있다는 주장을 폈지만 선거를 관리하는 주지사는 공화당이었고 투·개표관리 책임자도 공화당이었다.

4·15 총선의 사전투표 부정설 닮은꼴

한국에서도 4·15 총선거에서 이틀간 실시된 사전투표율이 26.69%로 역대 최고치를 기록했다. 나도 사전투표를 하러 갔다가 젊은 사람들이 많이 나와 있는 모습을 보고 심상치 않다는 예감이 들었다. 코로나 때문에 사람들이 몰릴 당일 투표를 피했다거나 투표일에 놀러가기 위해 사전투표를 많이 했다는 분석도 있지만 총선에 대한 정치적 관심이 그만큼 높아진 이유도 있을 것이다.

총선이 더불어민주당의 승리로 끝난 뒤 야권에서는 사전투표가 조작된 부정선거라는 주장이 제기됐다. 사전투표 조작설 시나리오를 연일 방송하며 클릭 수를 올리는 유튜버들이 많았다. 사전투표가 도입된 2014년 지방선거 이후 역대 선거에서는 사전투표와 당일투표의 후보 지지율이 비슷했다. 4·15 총선에서는 사전투표를 제외한 당일 투표의 결과만을 놓고 보면 미래통합당 124석, 더불어민주당 123석이었다.

당일 투표에서 1위를 한 다수의 미래통합당 후보들이 사전투표에서 나가떨어졌다. 험지에서 선전한 광진을의 미래통합당 오세훈 후보는 당일투표에서는 3만3469표를 얻어 2만8276표를 얻은 더불어민주당 고민정 후보를 5193표나 앞섰다. 그러나 사전투표에서 오 후보는 1만7993표를 얻어 2만5934표를 얻은 고 후보에게 7941표를 졌다. 방송사들이 투표 당일만 시행한 출구조사가 틀릴 수밖에 없었다. 결국 사전투표에 대거 참여한 젊은 층의 표심이 선거결과를 바꾼 것으로 해석할 수밖에 없다.

투표함은 정당참관인들이 지켜보고 봉인 후 날인한다. 그리고 CCTV가 돌아가는 곳에 투표함을 보관했다. 이런 엄정한 과정 때문에 사전투표 조작이 있을 수 없다는 중앙선관위의 설명이 나오자 버전을 바꾸어 컴퓨터 개표조작설이 제기됐다.

백악관 주변에서는 트럼프가 이긴 선거를 도둑맞았다고 외치는 시위대와 이에 맞서는 반(反)트럼프 시위대가 폭력 충돌했다. 친(親)트럼프 방송인 폭스 뉴스도 계속 바이든의 승리를 보도했지만, 트럼프 열렬 지지자들은 이제 폭스 뉴스도 믿지 않는다. 그래도 정통 언론은 보수든 진보든 사실 보도의 원칙에는 철저하다. 그러나 팬덤(fandom) 지지자들은 SNS나 유튜브, 신뢰성이 떨어지는 인터넷 뉴스를 찾아 읽는다. 믿고 싶은 것만 보는 확증편향(確證偏向)의 뉴스 읽기다. 어느 나라에서나 전통(legacy) 미디어가 권위를 잃은 가운데, 특정 정당이나 정치인을 일방적·맹목적(盲目的)으로 지지하는 팬덤 정치가 민주주의의 위기를 부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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