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물총장’ 그만두고 서울시장 나가라

2020-10-25 12: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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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석열 검찰총장이 지난 22일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열린 법제사법위원회의 대검찰청에 대한 국정감사에서 의원 질의에 답변하고 있다.  [연합뉴스]



윤석열 검찰총장은 국회 법사위 국감에서 퇴임 뒤 정치로 나갈 여지를 활짝 열어놓았다. “여론조사에서 대선후보로 거론된다”는 지적에 “퇴임하면 우리 사회와 국민을 위해 어떻게 봉사할지 그런 방법을 천천히 생각해 보겠다”고 말했다. 쉽게 풀면, 퇴임 후 정계 진출을 국민에 대한 봉사의 방법으로 고려하고 있다는 답변이다. “정치를 하겠다는 뜻이냐”는 질의에는 “그건 제가 말씀드리기 어렵다”고 즉답을 피했지만 현직 검찰총장으로서 이보다 더 확실하게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이제부터 총장이 관여한 검찰의 결정이나 그의 언행 하나하나가 모두 정치와 연관되어 해석될 수밖에 없다. 정치적 중립이 요구되는 자리에 이런 그가 계속 눌러앉아 있는 것은 국민이나 부하 검사들에게 도리가 아니다. 모래시계 검사로 떠서 정계 진출 모델을 먼저 개척한 홍준표 의원은 “윤 총장이 추미애 법무부 장관의 연이은 수사지휘권 발동이 부당하다고 생각했다면 이를 거부했어야 한다”면서 “윤 총장은 사퇴하고 당당하게 정치판으로 오라”고 말했다.

천정배 법무부 장관이 2005년 검찰사상 첫 번째 수사지휘권을 발동했을 때 김종빈 검찰총장은 바로 사표를 냈다. 추미애 장관은 무려 6건 시리즈로 수사지휘권을 발동했다. 추 장관은 윤 총장이 보고도 받지 않고 스스로 회피한 처가 관련 사건도 수사에서 배제하는 망신을 주었다. 노골적으로 나가달라는 압력이라고 해석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그는 스스로 나가기보다는 잘리는 것이 낫다고 판단하는 것일까.

윤 총장은 4월 총선에서 압승한 더불어민주당 쪽에서 사퇴하라는 압박이 들어왔을 때 문재인 대통령이 “임기를 지키며 소임을 다하라”는 메시지를 보내왔다고 국감에서 답변했다. 그러나 돌아가는 판을 보면 문 대통령의 이중 플레이다. 문 대통령은 윤 총장에게 임명장을 주면서 “살아 있는 권력에 대해서도 같은 자세를 취하라”고 당부했다지만, 조국 사건 수사가 대통령과 여당 뜻대로 돌아가지 않자 여권은 힘을 합해 식물총장 만들기에 돌입했다.

살아있는 권력과 맞짱 뜬 검찰지상주의의 참사

그는 국감에서 인사권이 완전히 배제된 식물총장이라고 스스로 말했다. 검사장 인사를 하면서도 장관과 총장 간 실질적인 협의가 없었다는 것이다. 이번에도 총장이 신문을 보고 검사장 인사의 내용을 안 모양이다. 검찰지상주의자가 앞뒤 안 가리고 정치권력과 맞짱 뜨다 자초한 참사였다.

“검찰총장은 법리적으로 법무부 장관의 부하가 아니다”는 윤 총장의 국감 발언이 나온 직후 추 장관은 페이스북에 “검찰총장은 법무부 장관의 지휘 감독을 받는 공무원”이라는 글을 올렸다. 유치한 논전이다. 검찰은 법률적으로는 법무부 외청인 검찰청 소속 공무원이다. 검찰청법 8조는 '법무부 장관은 검찰사무의 최고 감독자로서 일반적 사건에 관해서는 검사를 지휘 감독할 수 있지만 구체적 사건에 관해서는 검찰총장만을 지휘 감독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이 법규대로라면 법무부장관은 검찰총장의 상관이 맞는다.

그러나 준사법기관인 검찰의 정치적 중립을 고려해 정치인인 법무부 장관이 구체적 사건에 함부로 관여하지 못하도록 장관급 총장이라는 방조제(防潮堤)를 만들어 놓은 것이다. 그런데 추 장관이 수사지휘를 하는 차원을 넘어 총장이 갖고 있는 수사지휘권을 박탈한 것은 8조가 위임한 테두리를 벗어난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렇게까지 법무부 장관과 검찰총장의 관계가 악화한 데는 윤 총장의 책임도 크다. 윤 총장은 법사위 국감에서 조국 수사와 관련해 의미심장한 이야기를 했다. 검찰이 조국 법무부 장관 후보자에 대한 인사청문회를 앞두고 부산대와 단국대, 서울대, 사모펀드 운용사, 웅동학원 등 10여곳을 전격 압수수색하는 강제수사에 돌입했을 때였다. 윤 총장은 압수수색 당일 청와대 근처에서 박상기 법무부장관을 만났는데 “어떻게 하면 선처가 될 수 있겠느냐”고 물어서 “(장관 후보를) 사퇴한다면 저희가 일 처리 하는데 재량과 룸이 생기지 않겠느냐”고 의견을 드렸다고 법사위 국감에서 말했다.

국감 발언에서 조국 장관 ‘낙마 수사’ 인정

수사 의도가 조국 장관 후보자의 낙마에 있었음을 노골적으로 드러낸 발언이다. 검찰총장이 수사를 통해 검찰사무의 최고 감독자인 직속상관을 심사하겠다는 것인가. 대통령의 인사권과 국회의 심의권에 대한 정면 도전이었다. 국회 청문회가 끝나기를 기다렸다가 수사에 착수하는 것이 헌법 절차에 대한 존중이고 대통령과 국회에 대한 예의였을 것이다.

나는 문 대통령이 결함이 많은 조국 전 민정수석을 법무부 장관으로 기용한 것은 실책이었다고 생각한다. 조 장관은 검찰 수사에 굴복하지 않고 버티다가 법무부 장관에 취임했으나 35일 만에 사퇴했다. 그러나 검찰 수사에도 무리가 많았다. 검찰은 조 장관 일가와 관련해 70여회 압수수색을 했다. 과거에 가택 수색은 증거가 충분한 중범죄에 국한해 이뤄졌다. 형사법이 사적인 공간의 문턱을 넘어서는 개입을 자제한 것이다. 검찰은 표창장 위조 등의 혐의를 찾아내 조 장관 가족을 기소했지만 “이 정도 탈탈 털어서 먼지 안 나는 사람이 있느냐”는 반응이 나올 지경이었다.

과거 김대중 정부에서 김태정 법무부 장관이 옷로비 사건과 관련해 대검 중앙수사부에 의해 구속기소됐으나 무죄판결을 받은 적도 있다. 그런데도 이 수사에 관여했던 검사 중 아무도 책임 진 사람이 없다. 검찰총장 출신 장관도 후배 총장을 다루기가 쉽지 않은데, 교수 출신이 장관이 오면 총장을 통제하기가 버거워 검사 출신 차관이 중요한 역할을 했다. 교수 출신 박상기 장관과 수사 피의자로 전락한 조국 장관 밑에서 윤 총장은 정치권력을 위협할 정도로 강력한 총장이 됐다.
신림동에서 9수 끝에 사법시험에 합격해 그만큼 드라마틱한 검사의 일생을 산 사람도 없다. 청와대 뜻을 거스르고 국정원 댓글수사를 밀어붙이던 채동욱 검찰총장이 혼외자 문제로 비명횡사한 후, 한직을 전전하던 그를 살려낸 것은 최순실 게이트였다. 박영수 특별검사가 박근혜 대통령의 뇌물 혐의 등 비위 의혹과 비선실세 최순실 국정 농단 의혹 수사를 담당할 수사팀장에 구 정권에서 박해를 받은 윤석열 대전고검 검사를 발탁한 것이다.

정치에 쓸 이름값 보존하라

문재인 정부 들어서 서울중앙지검장이 된 뒤에는 박근혜 정부에서 수사를 받고서도 법망에 걸리지 않은 이명박 전 대통령을 구속기소했다. 이명박 대통령 치하에서 수사를 받다 목숨을 끊은 노무현 대통령과 친노들의 한을 풀어준 셈이다. 그러나 그에게 권력의 칼잡이를 넘어서 큰 꿈을 그릴 사건이 발생했다.

“권력에 휘둘리지 않고 눈치도 보지 않고 사람에 충성하지 않는, 그런 자세가 살아 있는 권력에 대해서도 같아야 한다”는 대통령의 말이 임명장을 받는 윤 총장의 가슴에 와 닿았던 모양이다. 조국 수사와 울산시장 선거 개입사건을 수사하면서 역린을 건드리게 된 것은 대통령의 이 격려가 출발점이 됐다고 봐야 한다. 문 대통령이 윤 총장이 불편해지기 시작했으면서도 그를 자르지 않는 것은 바로 이 격려의 말이 부담으로 남아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꺼내든 카드가 싸움닭 추미애다.

윤 총장이 이쯤 난타전의 진수렁에서 몸을 빼내는 것이 정치에 쓸 이름값을 그나마 보존하는 길이다. 그가 총장에서 물러나고 대권후보로 가는 길에는 저항이 만만치 않을 것이다. 그에게 환호를 보낼 국민도 예전처럼 많지 않다. 정치 양극화로 국민은 좌우로 쫙 갈라졌다. 좌는 그를 적대시하고 우쪽에서는 적폐수사를 당한 친박·친이 세력이 이를 간다.

대권 도전으로 직행하기보다는 서울시장을 하며 행정과 정치 경험을 쌓아 몸집을 불린 뒤에 대권에 도전하는 모델이 그에게 맞을 것 같다. 이 점에서는 안철수를 반면교사로 삼으라. 윤 총장에게 서울시장 후보 경선과 본선 통과는 만만찮은 도전이겠지만 후보 가뭄이 든 야권에서 그만한 후보를 찾기도 쉽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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