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의 관심이 한국으로 쏠리는 가운데, 한국의 상징적인 랜드마크 상당수를 보유한 서울에도 이목이 집중된다. 이에 서울의 랜드마크를 대표하는 건축물 50선을 조명해본다.
건물이 세워지기 전 상가 터는 일제강점기인 세계 2차대전 말 폭격에 따른 도심 화재를 막으려고 공터로 비워둔 곳으로, 한국전쟁 때 피난민이 모여들어 불량 주거지가 됐다. 국가는 이를 정비하려고 1960년대 대한민국 최초 도심재개발사업을 벌였으며, 건축가 김수근이 세운상가를 설계했다.
'세상의 기운이 다 모여라(世運)'란 이름 그대로 세운상가는 국내 유일의 종합 가전제품 상가로 호황을 누렸다. '세운상가를 한 바퀴만 돌면 미사일·잠수함을 조립할 수 있는 부품을 모두 구할 수 있다'는 우스갯소리가 통하던 시대였다.
황금기는 오래가지 못했다. 강남권이 개발되고 용산전자상가가 들어서면서 점차 상권이 쇠퇴하며 쇠락의 길을 걷게 됐다. 여기에 재개발 계획이 30년 넘게 표류하면서 상가는 도심 속 흉물로 방치됐다.
2008년 12월 단계적으로 상가를 철거하고 대규모 녹지축을 조성하는 사업에 착수했으나, 2014년 백지화됐다. 2015년부터 서울시가 도시재생의 일환으로 '다시·세운 프로젝트'에 착수해 2017년 9월 18일에 재개장했다. 3년 6개월 만에 문화 공간을 갖춘 첨단산업 단지로 탈바꿈한 것이다.
세운상가의 옥상은 종묘 일대는 물론 북악산까지 한눈에 바라볼 수 있는 시민의 휴식 공간으로 다시 태어났다. 청계천을 복원하면서 철거됐던 3층 높이의 공중 보행교도 다시 만들어졌다. 보행교 주변으론 지능형 로봇 등을 만드는 신생 벤처기업들의 보금자리가 마련됐다.
창덕궁 앞에 자리한 작은 한옥마을인 익선동이 최근 '뉴트로(신복고주의)' 열풍과 함께 서울의 대표적인 데이트 거리로 주목받고 있다. SNS에 검색해보면 '익선동 맛집' '익선동 핫플'(핫플레이스)라는 태그가 달린 글들을 심심찮게 볼 수 있다.
창덕궁과 가까운 익선동은 요리, 복식, 음악 등 조선 시대 궁중문화가 흘러들었던 곳이다.
과거 익선동은 원래 철종이 태어나고, 그 후손들이 살던 누동궁이 자리한 지역이었다.
그러다 일제강점기인 1920년대 일본인들이 종로 진출을 본격화하자, 일제의 민족 말살 정책에 반대했던 조선인 부동산 개발업자이자 독립운동가인 정세권(1888∼1965)이 이 일대 토지를 사들여 서민을 위한 대규모 한옥 단지를 조성했다.
1920∼1950년대 지어진 익선동 일대는 좁은 필지를 최대한 활용하고, 근대 생활방식에 맞게 만든 도시한옥 형태는 조선인들이 살기에 안성맞춤이었고, 그렇게 자리 잡은 익선동 한옥단지는 일제 강점기 내내 이어졌다.
더 많은 한옥을 넣기 위해 좁은 골목으로 만든 까닭에 익선동은 서울의 도시화 속에서도 한옥 100여 채가 남아 아직까지도 독특한 풍경을 유지하고 있다.
지금 익선동이 관광 명소로 재탄생하기까지 우여곡절도 많았다. 낡고 오래된 도시한옥에서 살기 힘들어진 주민들이 재개발을 택했으나, 여러 가지 사정으로 재개발이 철회되면서 지금 익선동의 모습이 남아있을 수 있게 됐다.
재개발 철회는 익선동에게는 상권 재도약의 기회가 됐다. 서울의 급격한 변화로 도심엔 군집(群集)을 이룬 한옥마을은 익선동이 거의 유일했고, 골목과 한옥을 경험하지 않은 젊은 세대들은 이곳에 매력을 느꼈기 때문이다.
그때 재개발을 추진했던 주민들은 도시재생으로 눈을 돌렸고, 한옥엔 카페, 술집 등 상업시설이 들어오며 활기를 띠기 시작했다. 게다가 최근 불어온 '뉴트로 열풍'은 근대 한옥, 좁은 골목과 어우러지며 익선동을 새로운 핫플레이스로 떠오르게 했다.
실제 익선동 일대는 서울의 마지막 한옥마을로 지정됐다. 지난 2015년 한옥보존지구로 지정돼 건축물 높이를 제한했고, 체인점의 입점까지 제한해 그 풍경을 보존키로 했다. 또 지구단위 계획에 따라 보행중심의 골목 역시 바꿀 수 없게 돼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