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씨네 리뷰] 응원하고 싶은 '삼진그룹 영어토익반'

2020-10-15 0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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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는 21일 개봉하는 영화 '삼진그룹 영어토익반' [사진=롯데엔터테인먼트 제공]
 

"낭만적이네요. 이 조명, 온도, 습도···."

한 예능프로그램에서 출연자가 남긴 말이었다. 장소, 조명, 온도 등 하나하나의 요소로 어떤 분위기가 형성된다는 의미였다.
그의 말대로 대개 추억은 여러 요소로 만들어진다. 그날의 날씨, 그날의 기분, 그날 먹은 음식이나 만난 사람들 등등. 모든 요소가 그날의 기억이 되는 셈이다. 영화도 마찬가지다. 어떤 영화는 작품이 가진 본질보다 다른 요소들로 재미를 가르기도 한다. 혹평받은 영화가 '인생작'으로 등극할 때도 있고, '인생영화'가 다시 보니 형편없게 느껴질 때도 있다.

<최씨네 리뷰>는 필자가 그날 영화를 만나기까지의 과정까지 녹여낸 영화 리뷰 코너다. 관객들도 같은 경험을 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두고 편안하게 접근하고자 한다.



매년 잊지 않고 쓰는 기사들이 있다. 설날·여름 방학·추석·연말 등 극장가 성수기 영화 라인업이나 업계 결산 기사 등인데 특정 기간마다 필자 외에도 많은 영화기자가 관련 기사를 쓰곤 한다.

새해에는 빠지지 않고 '올해 주요 배급사 영화 라인업'을 정리한다. 각 배급사가 발표한 영화들과 감독·배우 등을 간략하게 짚고 흐름을 살펴본다. 일종의 새해맞이 의식을 치르는 셈이다.

올해도 어김없었다. 코로나19로 당장 다음 달 개봉작들도 짐작할 수 없는 상황이지만 개인적으로 기다렸던 작품이 몇 개 있었다. 영화 '삼진그룹 영어토익반'(감독 이종필)이 그 중 한 작품이었다. 영화의 제목이 주는 신선함과 여자 배우들이 주를 이루고 사건을 해결해나간다는 간략한 줄거리가 흥미로웠다. 최근 한국영화계 'F등급(Female-Rating)' 작품들이 엄청나게 늘어나긴 했지만 만족할 만한 정도는 아니었기 때문에 '삼진그룹 영어토익반'에 대한 막연한 기대와 응원하고 싶은 마음이 있었다.

그리고 얼마 전 '삼진그룹 영어토익반'이 개봉 소식을 전했다. 영화 시놉시스와 공식 포스터·예고편이 공개되었는데 콕 짚을 수는 없지만 '요즘 관객들이 선호할 만한 작품'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1990년대를 배경으로 '레트로 감성'을 담아낸 작품이 오히려 젊은 세대가 열광하는 '힙'한 '트렌디함'에 가까웠기 때문이다. 느낌적인 느낌인 거다.

하여 영화에 대한 호감도는 이미 충만했다. 영화 시사회 현장도 사회적 거리두기가 1단계 완화로 여느 때보다 활기찬 분위기였다. 덕분에 평소보다 많은 사람과 마주쳤는데 때마다 "피곤해 보인다"는 소리를 들었다. 어리둥절했다. 월요일에 피곤하지 않은 직장인도 있나.
 

오는 21일 개봉하는 영화 '삼진그룹 영어토익반' [사진=롯데엔터테인먼트 제공]


영화는 필자와 달리 커리어 우먼들이 활기차게 아침을 맞는 모습으로 시작한다. 1995년 대기업 삼진그룹은 글로벌 시대를 맞아 학력과 관계없이 토익점수 600점을 넘으면 승급시켜 주겠노라며 사내 공지를 내걸고 토익반을 개설한다.

무슨 일이든 성실하고 꼼꼼하게 해내는 생산관리 3부 사원 이자영(고아성 분), 톡톡 튀는 아이디어를 가진 마케팅부 사원 정유나(이솜 분), 수학 올림피아드 우승 출신 회계부 사원 심보람(박혜수 분)도 영어토익반에 참여한다. 입사 8년 차 베테랑임에도 '고졸' '여성'이라는 이유로 잔심부름을 도맡고 있기 때문이다. 세 사람을 비롯한 삼진그룹 여직원들은 승진을 위해 이른 아침부터 학구열을 불태운다. 

그러던 어느 날 자영은 여느 때처럼 잔심부름하기 위해 공장을 찾았다가 폐수를 무단으로 방류하는 광경을 목격한다. 회사는 '페놀 무단 방류' 사건을 은폐하려고 하고 자영은 죄책감에 시달린다. 결국 그는 페놀 유출 사건의 결정적 증거를 찾기 위해 분투하고, 유나와 보람도 기꺼이 '내부 고발'에 동참한다.

영화는 비리를 저지르고 이를 은폐하려는 거대 조직과 이를 바로 잡으려는 인물들의 이야기를 전면에 내세우고, 차별과 맞서고 성장하는 여성들의 이야기를 풀어낸다.

영화의 출발점은 말단 사원들의 '파이팅'이었다고 한다. 우리가 살아가며 마주하는 크고 작은 사건들과 이를 해결하려고 노력하는 인물들을 통해 '우리'의 연대를 강조하고자 했다는 설명이다. 영화가 전체적으로 따뜻하고 경쾌한 톤으로 그려진 것도 자기 일에 책임감과 긍지를 가진 이들의 이야기를 맵시 있게 담고 싶었던 이종필 감독의 뜻이다.

판타지적인 성격이 강하고 인물들이 재기발랄하게 그려져 영화가 가볍고 쾌활하게 느껴지지만, 그 안에 담긴 사건들은 결코 가볍지 않다. 실제 1991년 발생한 '낙동강 페놀 오염 사건'을 모티브로 했고 극 중 인물들이 '성별' '학력' 등으로 차별을 당하는 모습은 폭력적이기까지 하다. 이 감독이 영화를 경쾌한 무드로 그려낸 건 우려를 상쇄하기 위함이었던 것으로 읽힌다. 극 중 인물들이 연대하고 승리를 쟁취하는 결과가 더욱 짜릿하게 느껴지도록 '장치'를 걸어놓은 셈이다.

아쉽게도 군데군데 성긴 구석도 많다. 사건을 해결하는 과정이 두루뭉술하게 표현되거나 주먹구구식으로 그려지기도 한다. 예컨대 영화 말미 주인공들이 감당하기 힘들 정도로 사건이 커지자 주변에서 선뜻 이들을 돕고자 나서는데 그 과정들이 다소 고민 없이 담겼다. '이 정도는 마음으로 이해해달라'는 식이다. 영화에 관한 호감도가 있으니 망정이다.
 

오는 21일 개봉하는 영화 '삼진그룹 영어토익반' [사진=롯데엔터테인먼트 제공]


'삼진그룹 영어토익반'의 완성도가 아주 빼어나다고는 볼 수는 없다. 그러나 해당 영화의 매력적인 요소가 그 단점들을 상쇄하곤 한다. 여성들이 연대하고 승리의 서사를 만든다는 점은 영화의 '무기'고 미장센과 디테일이 주는 '보는 맛'은 영화적 재미를 배가시킨다. 레트로 감성이 트렌디하게 반영된 점도 흥미롭고 음악과 편집 등으로 만든 '리듬'도 매력적이다.

배우들의 연기도 만족스럽다. 자영 역의 고아성, 유나 역의 이솜, 보람 역의 박혜수는 영화의 '호감도'를 쌓는 일등 공신이다.

드라마 '라이프 온 마스' 영화 '항거' '삼진그룹'으로 이어지는 배우 고아성의 확장성이 인상 깊다. 그가 연기한 정직하고 강직한 인물들은 고아성으로 하여금 빚어진다. 유나 역의 이솜은 놀라울 정도로 제 몫을 해낸다. 데뷔 초 그가 보여준 연기를 떠올린다면 충격적일 정도의 성장이다. 얼마나 오랜 시간 작품과 캐릭터 그리고 연기에 매진했는지 단단해진 그의 연기를 통해 짐작할 수 있었다. 보람 역의 박혜수는 캐릭터를 더욱 매력적으로 만들 줄 아는 배우다. '스윙키즈' '삼진그룹 영어토익반'까지. 어떤 역할이든 그가 맡으면 두 배는 사랑스럽다.

이 외에도 상무 오태영 역의 백현진, 생산관리3부 대리 최동수 역의 조현철 등 조연 배우들이 그려낸 캐릭터가 강렬하다. 업계의 많은 이들이 탐낼 만한 표현법이다. 그간 독립영화에서 활약한 이주영은 송소라 역을 통해 영화의 '레트로 감성'을 극대화했다. '삼진그룹'의 미장센이라고 할 수 있다. 21일 개봉. 러닝타임은 110분이며 관람등급은 12세 이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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