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트남에는 “나무는 뿌리가 있고, 물은 근원이 있다(cȃy có cội, nước có nguồn)”, “물을 마실 때 수원(水源)을 생각하라(uống nước nhớ nguồn)”는 말이 있다. 음수사원(飮水思源)하라는 말이다. 즉, 뿌리가 있어야 나무가 있고 샘이 있어야 물이 있듯이 조상이 있음으로 해서 ‘나’가 있다는 마음가짐이 베트남 사람들의 기저에 깔려 있는 조상숭배 정신이다. 베트남은 건국 신화를 역사적인 사실로 기정사실화하고 있다. 기원전 3천여 년 전의 일이라 기록이 남아있지 않아 민간에 전해 내려오는 전설을 연구하여 성역화하고 민족단결의 구심점으로 삼고 있다. UNESCO는 2012년 12월 6일 전설을 중심으로 한 훙브엉(雄王) 신앙을 인류무형문화재와 구전문학의 걸작으로 공인하였다.
베트남 사람들은 스스로를 용자선손(龍子仙孫)이라고 한다. 용의 아들이고 선녀의 손자라는 뜻이다. 베트남의 건국신화도 우리나라 동명왕, 탈해왕, 박혁거세, 수로왕의 신화처럼 난생신화이다. 그러나 베트남은 신화라고 하지 않고 전설이라고 한다. 1955년부터 1987년까지 32년간이나 베트남 역사상 최장기간 수상을 역임한 팜반동(1906~2000)은, “역사의 가장 귀중한 뿌리는 민간 전설이다. 민간 전설에는 역사적인 사실의 핵심이 있다”고 했다. 베트남 사람들은 훙브엉 왕조의 존재를 믿기에, 푸토성, 비엣찌시, 퐁쩌우현에 있는 훙브엉 사당에 제례를 지내고, 향을 피우기 위해, 매년 음력 3월 10일이면 해발 175m의 응이어린(義靈)산으로 향한다. 음력 3월 10일은 국조(國祖) 훙브엉의 기일로 베트남의 공휴일이며 훙브엉 축제가 열린다. 훙사당 유적지에는 국조(國祖) 훙브엉의 묘가 있고, 훙브엉(雄王) 때 팠다는 샘이 있다.
100개의 알에서 100명의 아들 탄생
베트남의 전설에 따르면 베트남 민족 최초의 왕은 신농(神農)씨 4대 후손인 록뚝(祿續)으로, 베트남 최초의 나라인 씩꾸이국(赤鬼國)을 다스린 낀즈응브엉(逕陽王:B.C 2879~B.C 2792)이다. 씩꾸이국은 북으로 중국의 장강, 남으로 베트남 중부의 찌엠타인국(현 다낭 지역 중심), 서쪽으로 쓰촨성, 동쪽으로 바다에 이르는 광대한 영토를 가진 나라였다. 낀즈응브엉은 동해바다를 다스리는 용왕인 동딘꾸언(洞庭君)의 딸 턴롱(神龍)을 부인으로 삼아 숭람(崇纜)을 낳았다. 숭람이 후일 락롱꾸언(駱龍君)으로, 2대 훙히엔브엉(雄賢王)이다. 락롱꾸언이 지방을 순시하다가 랑쓰엉 동굴에 이르러, 다강의 제방에서 뽕잎을 따는 선녀 어우꺼를 만나 부부의 연을 맺고, 응이어린(義靈)산으로 데리고 왔다. 어우꺼가 3년 3개월을 임신하였다가 출산 때가 되자 신비한 징조가 나타났다. 5색 구름이 하늘을 뒤덮더니 어우꺼가 100개의 알을 낳았다. 3일 후에 알이 부화하였는데, 튼튼하고 준수하게 생긴 아들 100명이 나왔다. 나라를 다스리던 락롱꾸언은 장남을 퐁쩌우에 남기고, 50명의 아들은 어머니를 따라 산과 숲을 방어하게 하고, 49명의 아들은 자신과 함께 강과 바다를 다스리게 하였다. 자신은 물에 사는 종(種)이라서 요정인 어우꺼와는 오래도록 함께 살 수는 없다는 이유에서였다. 락롱꾸언은 바다로 돌아가기 전에 왕위를 장자에게 물려주니, 이가 3대 훙꾸옥브엉(雄國王)이다. 훙꾸옥브엉은 국호를 반랑(文郞)이라 했고, 18대까지 왕위를 이어갔는데, 왕을 모두 훙브엉(雄王)이라고 불렀다. 50명의 아들을 데리고 홍강을 거슬러 올라가다가 히엔르엉에 이르러 걸음을 멈추고 잠시 쉬게 되었다. 주위를 살펴보니 땅이 비옥하고, 살고 있는 사람도 드물어 어우꺼는 이곳에서 아들들과 살기로 하였다. 백성들에게 숲을 태워 벼를 심게 하고, 강가에는 사탕수수와 뽕나무를 심게 하였다. 그리고 샘을 파게하고, 길쌈을 하고, 꿀 뜨는 것을 가르쳐 주었다. 찹쌀을 빻아 가루를 사탕수수 즙과 섞어 떡을 만들어 먹게 하였다. 사람들이 농사를 짓고, 떡을 만들고, 베를 짜는 것을 익히자 이곳을 다스릴 아들 하나를 남겨두고, 나머지 아들들과 함께 홍강을 거슬러 산으로 계속 올라갔다. 어우꺼는 베트남의 국조모로, 응이어린(義靈)산에 어우꺼 사당이 있다.
100명의 아들에 작명
알에서 3일 만에 부화하고 나온 100명의 아들은 하루 만에 장성하여 키가 3척 7촌에 이르렀고, 말도 하고 웃고 뛰어 다녔다. 하루 만에 용모가 준수하고 건장한 청년이 된 것이다. 락롱꾸언은 하늘이 나라를 지키도록 하려고 아들 100명을 준 것이라 생각하고, 아들들에게 각 지역을 하나씩 맡기려고 했다. 그러나 아들들에게는 이름이 아직 없었고, 같은 날 같은 시간에 태어나, 누가 형이고 아우인지를 구별할 수가 없었다. 그리하여 각 지역의 락장, 락후들을 불러 왕자들의 이름을 지어 올리도록 하였다. 신하들도 역시 누가 먼저 태어나고 나중에 태어났는지를 구별할 수가 없었다. 더구나 100개의 이름을 지어야 하는 일이었다. 그때 한 원로대신이 앞으로 나와 말하기를, “왕자님들은 하늘이 전하께 내리신 선물이오니, 전하께서는 제단을 세워 하늘에 고하고, 이름과 순위를 정할 현자를 보내달라고 요청하소서!” 하였다. 이에 제단을 쌓고 하늘에 고하여, 현자를 구한 왕은 현자의 힘을 빌려 100명의 왕자의 순서를 정하고 이름을 지어 주었다. 100명의 왕자는 기뻐하여 부왕의 장수를 빌고, 치국안민의 제를 올렸다. 그리고 현자를 배웅하기 위해서, 모시고 왔던 바익학(Bạch Hạc) 강가에 이르자, 현자의 얼굴에 후광이 비추고, 하늘에서 뇌성벽력이 치더니 홀연히 사라져버렸다. 이에, 왕은 사당을 세워 그 공을 기리게 하였다.
반랑(文郞)국의 도읍지-퐁쩌우
훙브엉(雄王)은 반랑(文郞)국의 도읍지를 정하기 위하여 여러 지역을 순행하였다. 풍광이 아름답고 땅이 평평하고 넓으며 개천이 많은 곳에 도착하였으나 크게 흡족하지는 않았다. 그래서 독수리를 시켜 날이 밝기 전까지 자갈과 흙을 물어다가 100개의 둔덕을 쌓으라고 시켰다. 독수리가 부지런히 쌓아 99개의 둔덕이 되었을 때, 잠자던 닭이 갑자기 울었다. 날이 샌 줄로 착각한 독수리는 작업을 중단하고 날아가 버렸다. 다시금 이곳저곳을 순행하던 왕이 도착한 곳은 3강이 합수하고, 좌우 양쪽은 딴비엔산(바비 산이라고도 함)과 땀다오 산이 지키고 있고, 근처에 언덕과 산이 있고, 개천이 휘돌아 돌아 마치 호랑이가 부복하고 용이 시중을 드는 지세였다. 산위에 올라보니 3면이 넓고, 사방에는 온갖 화초가 만발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이곳을 만대를 이을 나라의 도읍지로 정하였으니 지금의 퐁쩌우다. 퐁쩌우는 다강(Sông Đà), 로강(Sông Lô), 홍강(Sông Hồng)이 합쳐지는 바익학(Bạch Hạc) 삼수머리로부터 응이어린 산에 이르는 지역이다.
왕위를 물려받게 한 음식 - 바인쯩과 바인자이
베트남의 구정 음식으로 냉장 시설이 없어도 보관에 적합한 음식이 바인쯩(bánh chưng)과, 바인자이(bánh dày)다. 바인쯩은 일종의 찹쌀떡으로 사각형의 모양으로 음(-)인 지구를, 바인자이는 동그랗고 흰색으로 양(+)인 하늘을 상징한다. 두 음식은 음(陰)과 양(陽)을 대표하는 음식으로, 왕위를 물려받게 한 전설의 음식이다. 6대 훙브엉(雄王)은 구정을 맞아 신년 축하 연회를 베풀고, 내년 구정 때는 나라의 번성과 백성이 배부르고 왕의 천수무강을 기원하는 예물을 바치라고 했다, 가장 마음에 드는 음식을 바치는 왕자에게 왕위를 물려주겠노라고 선언했다. 왕자들 가운데 막내인 18번째 왕자 랑리에우(Lang Liêu)가 있었다. 어느 날 그의 꿈에 한 신이 나타나 이렇게 말하였다. “세상에서 쌀이 그 무엇보다 가장 귀중한 것이다. 하늘과 땅의 상징으로 쌀로 원형과 정사각형의 떡을 만들어라. 그리고 나뭇잎으로 싸서 그 안에 음식을 넣어라. 넣은 것은 우리를 태어나게 해주신 부모님을 의미하는 것이다”라고 말하였다. 랑리에우는 신의 계시대로 사각형의 바인쯩(bánh chưng)과 찐빵과 같은 동그란 형태의 바인자이(bánh dày)를 만들어 바쳤다. 부왕은 왕자들이 가져온 음식을 시식했으나 대부분의 음식에 별 다른 맛을 느끼지 못했으나, 랑리에우가 가져온 바인쯩을 먹고는 신기한 맛을 느꼈다. 왕은 랑리에우에게 이렇게 맛있는 음식을 만들게 된 경위를 자세히 물었다. 새로운 음식은 맛도 좋았을 뿐만 아니라 음식이 뜻하는 의미도 깊어 랑리에우에게 왕위를 물려주었다. 랑리에우가 바로 7대 왕 훙찌에우브엉으로 그때부터 베트남사람들은 구정이 되면 바인쯩과 바인자이를 만들어 먹게 되었다고 한다.
반랑국에서 어우락국으로
훙 왕조는 낀즈엉브엉이 건국하고, 락롱꾸언과 어우꺼가 100명의 아들을 나누어 나라를 통치하여 17대까지 태평성대를 누렸다. 18대에 이르러 훙주에브엉(雄睿王)은 20명의 왕자와 6명의 공주를 생산하였으나, 무슨 까닭인지 띠엔중 공주와 응옥호아 공주만 남고 모두 차례로 세상을 떠났다. 왕은 뒤를 이을 후계자가 없어 밤낮으로 근심이 깊었다. 띠엔중 공주는 이미 고기잡이를 하는 가난한 사람에게 출가를 하였으나, 부왕의 부름에 응하지 않아 왕은 날이 갈수록 번민을 거듭하였다. 결국, 왕은 응옥호아 공주의 신랑인 응우옌뚜언에게 정사를 맡겼다. 그러자 이에 불만을 품은 왕의 조카로 아이라오 부(部)의 락장을 맡고 있던 툭판(蜀泮)이 군사를 일으켰다. 2개월간의 격렬한 교전 끝에 툭판이 물러갔으나, 툭판은 다른 집안에 왕권을 넘길 수 없었다. 툭판은 군사를 재정비하여 다시 퐁쩌우를 공격했으나 역시 대패하였다. 왕은 날이 갈수록 쇠약해져 왕위를 사위에게 양위하고자 하였으나, 사위는 왕위를 툭판에게 물려주도록 간청하였다. 자신은 왕족의 혈통이 아니고, 툭판은 왕족 혈통인데다가 언젠가 다시 거병하면 나라가 혼란에 빠지고, 백성들이 도탄에 빠지게 됨을 걱정하였기 때문이다. 이에, 왕은 툭판에게 왕위를 양위하고, 응옥호아 공주와 사위를 데리고 딴비엔산으로 들어가 버렸다. 툭판은 감격하여 나라를 굳건히 지키고 선왕들의 제례를 이어갈 것을 맹세하였다. 툭판이 바로 안즈엉브엉(安陽王)으로, 안즈엉브엉은 국호를 어우락으로 바꾸고, 꼬로아(현, 하노이의 동아인 지역)로 천도하였다. 이 때가 기원전 258년이었다.
베트남 민족의 건국은 고조선보다 546년이나 앞선다. B.C 2879~B.C 258년까지 2621년 동안 18명의 왕이 존재했으니 평균 제위기간이 145년 이상씩이다. 훙브엉 옥보(玉譜)에 의하면, 낀즈엉브엉은 271세까지 수를 누렸고, 250년간 제위를 했다. 왕비가 6명에 24명의 왕자, 12명의 공주에 이어 친손 외손 증손이 모두 592명에 달했다. 인간의 평균 수명으로 볼 때, 사실로 받아들이기 어려운 주장이나, 베트남 빈푸성 퐁쩌우현에는 민족 시조인 훙브엉(雄王)의 묘가 있고, 당시에 팠다고 전해지는 우물이 있다. 응이어린 산을 성역화하고, 매년 음력 3월 10일이면 훙왕의 제사를 지내고, 훙사당 축제를 개최한다. 최근에 새로운 연구결과에 따르면, 18명이 아니라 180명의 왕이 2655년간 다스렸다는 발표가 있어 주목을 받고 있다. 아무튼 베트남은 신화를 전설로, 전설을 역사적인 사실로 승화시켜, 베트남 민족 단결의 구심점으로 삼고 있음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천지를 떠돌아다닐지라도,
훙왕 시조님 기일 삼월열흘은 기억하세.
만방에 이 노래 영원히 전해질 때,
이 강산이 천년 왕국의 강토로 보전되리라.
오래 전부터 민간에 구전되어 오는 노래이다. 베트남의 음수사원(飮水思源) 정신이 훙브엉 전설을 역사에 올려, 자자손손 조국 강산을 지켜 나가자고 호소하고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