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이는 위험한 캐릭터다. 인물의 잔혹성을 말하는 게 아니라, 많은 부분 비어있어 내면을 읽기 힘들고 자칫 평면적으로 보일 수 있어서다. 레이의 빈칸을 채우고 관객을 설득하는 건 배우 이정재(47)의 몫. 그는 레이를 완성하기 위해 여느 때보다 깊은 고민과 갈등을 겪어야 했다.
"레이는 전사가 거의 없어요. (연기적으로) 더 자유로울 수 있겠지만 100명이 봤을 때 100명 모두에게 똑같은 의미나 느낌을 전달할 수는 없을 거예요. 연기만으로는 레이가 어떤 사람이라고 설명하는 게 불가능하다고 생각했어요. 비주얼적인 부분에 신경을 쓴 것도 그런 이유였어요. 전사가 없어도 이미지만으로 '그럴싸하다'는 믿음을 줘야 하거든요."
최근 아주경제는 영화 '다만 악에서 구하소서'(감독 홍원찬) 주연 배우 이정재와 만나 인터뷰했다. 마지막 청부살인 미션 때문에 새로운 사건에 휘말리게 되는 인남과 그를 쫓는 무자비한 추격자 레이의 추격과 사투를 그린 작품이다.
"시나리오를 읽고 내가 해야 할 역할은 '인남을 압박하는 것'이라고 생각했어요. 어느 정도까지 해야 인남을 쫓는 레이를 보며 관객들이 스릴을 느낄까 고민한 거죠. 황정민이라는 거대한 배우를 어느 정도까지 압박해야 하는 건지…. 제게 필요한 부분이었죠."
다행히 이정재가 중요하게 여긴 부분들은 만족스럽게 표현됐다. 많은 스태프 덕이었다. 그는 "캐릭터를 표현하는 데 스태프들의 도움을 많이 받았다"며 결과적으로 작품에 잘 녹아든 것 같다고 말했다. "괜찮다"는 자평이다.
"레이를 표현하는데 비주얼적인 요소가 중요했거든요. 저 혼자 만든 게 아니라 미술, 의상, 촬영 등 많은 부분에서 도움을 받았어요."
그의 말대로 레이는 화려한 비주얼로 인물을 설명한다. 구구절절한 설명보다 간결하고 강렬한 인상으로 빈칸을 채운다.
"고민이 많으면 결과적으로 과해질 때가 있어요. 고민하는 사람은 여러 이유를 대면서 (캐릭터를) 꾸미고 싶지만, 관객들은 결과물로 접하니 과하다고 여길 수 있거든요. 그런 부분은 또 주의해야하기 때문에 고민이 됐어요. 어느 정도의 선이 재밌고 자연스러운 걸까."
하지만 이정재는 "레이라면 과한 것도 어울릴 것"이라고 결론을 냈다. 종잡을 수 없는 레이를 이미지적으로 표현하기 위해서였다. 통상 영화 의상은 의상팀이 맡지만 이번만큼은 개인 스타일리스트와 함께 작업한 것도 그런 이유에서였다.
"개인적으로 캐릭터의 외형적인 걸 (제작진에게) 주장하거나 요구하지 않아요. '이게 좋다' '이게 싫다'를 말하는 순간 캐릭터가 변화할 수 없거든요. 제가 좋아하는 (외적인 모습만) 나올 텐데. 다양한 모습을 보여드릴 수 없어요. 항상 스태프들에게 의존하곤 해요. 그들에게 이정재를 맡겨야 새롭게 태어나니까요. 하지만 이번에는 의상, 액세서리, 소도구 등 많은 부분이 까다로웠고 전부 새로운 걸 찾아와야 한다는 생각이 들어서 우리 스타일리스트가 함께하면 어떻겠냐고 조심스레 제안했어요. 의상 스태프들도 흔쾌히 동의해줬고 함께 하게 된 거죠. 조금 더 과감해질 수 있었던 것 같아요."
"아마 모든 배우는 첫 장면과 마지막 장면을 찍을 때 부담을 느낄 거예요. 첫 등장부터 관객들이 이입해야 하니까요. 저도 첫 장면을 중요하게 생각하고요. 사실 레이의 첫 등장은 장례식장이 아니라 클럽이었어요. 클럽 신을 다 찍고 장례식 신을 찍었는데, 스태프들이 '이걸 첫 등장으로 써야 한다'는 거예요. 장례식 신이 잘 나왔던 모양이에요. 저는 '아니 내가 몇 신이나 나온다고…그마저도 빼냐'며 펄쩍 뛰었지만요. 전체적인 흐름을 위해서 결국 수긍하게 됐죠."
매 장면 레이의 잔혹함과 위압감을 느낄 수 있지만, 필자가 가장 섬뜩하게 느꼈던 건 인남을 찾기 위해 그와 관련된 남자(박명훈 분)를 고문하는 모습이었다. 명품 선글라스와 멋들어진 블루 슈트를 차려입은 레이는 커피를 마시며 대수롭지 않게 고문을 준비한다. "백정의 아들"이라며 어린 시절을 고백하는 장면은 유일하게 레이의 서사가 드러나는 부분이기도 하다. 연기자 입장에서도 중요하게 여겼을 법한 장면.
"세세한 부분을 많이 신경 썼어요. 일본 공항에 도착하자마자 '레이가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들고 다니면 좋겠다'고 (제작진에게) 말했어요. 빨대가 꽂힌 음료를 마치면서 들어오는 모습을 떠올렸거든요. 얼음도 가득 들어서 '잘그락잘그락' 소리도 났으면 좋겠다고 했고요. 그 작은 소리마저도 연기 중 하나라고 생각했거든요."
가만히 있을 때도 레이가 잔인해 보였으면 좋겠다고 생각한 그는 인물의 세세한 부분들을 설계하고 캐릭터를 꾸려갔다. 그 디테일이 모여 인물의 아우라를 완성한 셈. 이정재는 "시나리오에 없는 설정을 생각하다 보면 그 인물에 가까워지는 것 같다"고 했다.
"사람을 죽이러 와놓고는 자기가 먹고 싶은 걸 막 먹고 있으니. 더 잔인해 보이지 않나요? 태평한 모습이지만 입으로는 '짐승의 배를 가르고 어쩌고' 하면서 죽일 거라고 하고. 커피를 마시는 설정은 한 번만 쓰기 아까워서 나중에 총포상에서도 더 썼어요. 사소한 거라도 살릴 수 있으면 다 살리려고 했죠."
캐스팅 확정 소식만으로도 화제였다. 영화 '신세계'로 엄청난 팬덤을 모았던 배우 이정재와 황정민이 다시 만난다니. 영화 팬들의 눈이 번쩍 뜨일만한 소식이었다. 배우들도 마찬가지였다. 7년 만에 재회한 이정재와 황정민은 연기 합을 맞추며 만족감을 채웠다.
"개인적으로 (황)정민 형을 굉장히 좋아해요. 보통 저와 다른 사람을 좋아하게 되는데 정민 형이 딱 그래요. 아주 다르고 그래서 동경하죠. 다시 만나 호흡을 맞추면서 '정말 잘 맞는다'고 했어요. 어떤 장면을 찍고 아쉬운 마음이 들 때가 있잖아요. '그 부분이 어색했던 거 같은데' 싶으면 어김없이 정민 형이 '그 장면 다시 찍고 싶지 않니?' 그래요. 그런 눈이나 마음이 비슷했어요. 함께 할 때 즐겁기도 하고요."
인터뷰를 마무리하며 최근 공개된 연출작 '헌트'에 관한 이야기도 나왔다. 안기부 에이스 요원 박평호와 김정도가 남파 간첩 총책임자를 쫓으며 거대한 진실과 마주하게 되는 첩보 액션 드라마로 이정재가 연출과 주연을 맡는다. '돈' '공작' '아수라' '신세계' 등 굵직한 작품을 선보였던 사나이 픽처스가 제작을 맡았다.
"7~8년 전부터 시나리오 개발에 참여해왔어요. 아이디어도 내고요. 공개가 안 되어 그렇지 여러 과정이 있었고 그 끝에 연출을 결심하게 된 거예요. 시나리오도 꾸준히 썼고요. 그중 한 작품의 가능성을 보고 (제작을) 결심하신 거 같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