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에서 11일(현지시간) 기준 코로나19 확진자는 330만명을 넘었다. 적어도 인구 100명당 한명꼴로 코로나 환자이다. 지난 5월 말 흑인 조지 플로이드 사망 이후 미 전역을 휩쓰는 인종차별 반대 시위, 트럼프의 외교정책 혼란상을 적나라하게 묘사한 존 볼턴 전 백악관 안보 보좌관의 회고록, 여기에 트럼프가 친구에게 돈을 줘 대리시험으로 명문 펜실베이니아대 와튼 스쿨에 편입했다는 조카딸의 폭로. 오는 11월 3일 미국 대선을 앞두고 각종 악재가 겹치면서 요즘 트럼프 대통령의 신세는 참담하다. 그가 장담했던 재선의 꿈은 가파른 지지율 하향곡선과 함께 멀어지고 있다. 추락하는 트럼프. 그래도 아직 믿는 구석은 있다. 공화당원의 지지율은 아직 90% 밑으로 내려가진 않았다. 주력 지지층 백인들의 표심이 흔들리고 있지만, 선거까지 4개월 가까이 남은 긴(?) 시간은 트럼프의 '뒤집기'가 불가능하다고 단정하긴 힘들다. 1980년 대선 당시 지미 카터 전 대통령에 두 자릿수에 뒤졌던 로널드 레이건 후보는 7월 들어 10% 이상 앞섰고 본선에도 승리한 예를 보면, 여론은 순식간에 변한다. 흥미로운 것은 향후 전개되는 대선전 성격이 트럼프 vs 반(反)트럼프, 즉 트럼프에 대한 레퍼렌덤(referendum.국민투표) 또는 인기투표(popularity vote)가 되면 그에게 절대적으로 불리하다고 공화당 캠프까지 인식하고 있다는 것이다.
'러스트벨트' 트럼프 지지층 이탈 가속
코로나19 사태와 대규모 인종차별 반대시위 등 불과 몇달 전만 해도 상상조차 못했던 국가 위기 사태에서 트럼프 대통령은 리더십에 큰 상처를 입었다. 가장 주목할 만한 변화는 핵심 지지층인 백인 유권자들의 표심이 지난 대선 때 접전을 벌이다 막판에 트럼프가 승리해 선거인단을 가져간 '러스트벨트' (미 북동부 쇠락한 중공업지대)에서 크게 흔들리고 있다는 사실이다. 최근 각종 여론조사를 보면 대졸 출신 백인 유권자 사이에선 조 바이든 민주당 후보가 트럼프를 크게 앞서고 있다. 조지 W 부시 전 대통령, 2012년 대선후보 밋 롬니, 짐 매티스 전 국방장관 등 공화당 거물인사들까지 줄줄이 등을 돌리기 시작했다는 소식도 전해진다. 취임 후 4년간 이룩한 경제치적(?)을 단숨에 삼킨 코로나바이러스. 이제 '2차확산'이 현실화되는 가운데, 그의 전직 참모들과 가족까지 트럼프의 뒤틀린 도덕성과 숨겨진 치부를 연이어 드러내고 있다. 미 언론은 이른바 '러시아 스캔들'로 실형이 선고된 비선 최측근 로저 스톤에게 10일 트럼프가 사실상 면죄부를 주자 권력을 남용하고 법치주의를 훼손한 대통령으로 집중포화를 퍼붓고 있다. 나라에 위기가 닥치면 국민이 하나가 되어 정부정책을 지지하고 정치 지도자의 지지율도 급등한다는 '국기결집효과(rally round the flag effect)는 지금 미국에선 전혀 목격할 수 없다.
일부 여론조사에서 두 자릿수까지 벌어지는 바이든과의 지지율 격차에 다급하고 초조해진 대통령. 그는 반전을 노려야만 했다. 코로나바이러스 확산 위험에도 불구하고 무리하게 재개한 지난달 20일의 첫 대선유세는 그야말로 흥행 대참패였다. 100만명 이상 모일 것이라던 오클라호마주 털사 유세장엔 고작 6200여명만 모였다. 유세장에서 백악관으로 돌아온 트럼프는 그야말로 지치고 외로운 모습이 역력했다. 목 아래로 길게 풀어헤쳐진 넥타이. 왼손엔 “Make America great again”이 새겨진 붉은색 모자를 붙잡고 쓸쓸한 표정으로 백악관 남쪽 잔디밭을 걸어가는 모습의 사진은 그가 처한 정치적 위기 상황을 매우 사실적으로 표출하고 있다. 영국의 가디언지는 트럼프를 미국 극작가 아서 밀러의 출세작 <세일즈 맨의 죽음>(1949)에 나오는 주인공 '윌리 로만'과 비교하기도 했다. 오로지 성공을 위해 앞만 보고 달려왔지만 어느 순간 자신의 존재가 초라해 보여 무기력증에 시달리다 스스로 생을 마감한 직장인 이야기다.
오클라호마주 털사 유세 참사 이후 트럼프 대통령은 여러 날 동안 분통을 터뜨리며 참모들에게 대책 마련을 압박했다는 후문이다. 하지만 공화당 선거 캠프로서는 현재의 불리한 추세를 역전시킬 만한 카드가 별로 없어 고민인 듯하다. 정치전문지 폴리티코에 따르면, 공화당 캠프도 트럼프의 '자기무덤 파기'를 더이상 두고볼 수만 없다는 인식이 커지는 모습이다. 2016년 대선 당시 트럼프의 정치 고문을 맡았던 샘 넌버그는, 향후 트럼프 대통령의 지지율이 35%까지 떨어진다면 "공화당 대선 후보로 계속 뛰는 것에 대해 심각하게 고민할 필요가 있다"고 지적하기도 했다. 미크 멀바니 전 백악관 비서실장 대행은 최근 폭스비즈니스와의 인터뷰에서 11월 대선이 트럼프 대통령에 대한 '레퍼렌덤'(국민투표)으로 흘러간다면 바이든 후보와의 경쟁에서 정말로 힘든 역풍을 각오해야 할 것이라고 우려했다. 트럼프 대통령이 바이든 후보와의 차이점을 부각시키며 정책 대결로 승부를 해야 희망이 보인다는 것이다.
최근 여론 조사를 보면 러스트벨트 3개주 등 6개 경합주에서 트럼프는 바이든에게 뒤지고 있다. 그런데다 1976년 지미 카터 대통령 이후 민주당 후보를 지지하지 않았던 대의원 34명의 대형주 택사스주도 엎치락 뒤치락 쉽지않은 모습이다. 트럼프의 강력한 지지기반인 백인 남성과, 중장년층 사이에서도 지지층 이탈이 심각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트럼프의 재선이 불가능하다고 단정하긴 아직 이르다. 코로나19와 인종차별시위가 지난 4개월 미국 대선의 지형을 마구 흔들고 트럼프가 수렁 속에 빠지는 것을 예측한 사람은 거의 없었다. 최근 외신에 인용된 공화당 선거운동원의 말마따나 앞으로 남은 4개월은 정치세계에서 2광년(光年.light year)쯤 되는 긴긴 시간이다. 지난 미국 대선 직전까지만 해도 대부분 여론조사는 힐러리 클린턴 민주당 후보의 우세를 점졌지만 트럼프는 6개 경합주에서 승리를 휩쓸며 대권을 차지했다. 경제적 성과를 자신의 최대 치적으로 내세우는 트럼프의 최대 원군은 3분기의 빠른 경기 회복세와 코로나19 백신 개발일 것이다. 또 선거유세 기간 동안 베일 속에 가려진 바이든 후보의 약점이 부각된다면 판세는 급변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남은건 반칙작전?
코로나19 확산을 막기 위한 봉쇄조치가 시작된 이후 바이든 후보는 3달 가까이 대부분의 시간을 자신의 델라웨어 자택의 '벙커'에 숨어지냈다. 트럼프의 지지율 하락을 지켜보며, 이번 대선을 트럼프에 대한 국민투표로 몰고가면 자신의 승리가 확실하다고 생각할 것이다. 하지만 많은 선거 전문가들은 바이든이 긴장을 풀면 큰코 다칠 수 있다고 경고한다. 트럼프의 '헛발질'로 바이든은 지지율이 올라갔지만 아직 갈길은 멀다. 트럼프가 싫어서 바이든을 지지할 뿐, 바이든의 진정한 지지자는 그리 많지 않다는 것이 현실이다. 바이든 후보는 트럼프가 여차하면 현직 대통령의 유리한 지위를 이용하여 허위정보를 대량 유포하거나 외국의 선거개입 요청 등 각종 반칙 작전으로 나올 가능성도 경계해야 한다. 예를 들면 트럼프 대통령이 우크라이나측에 바이든 전 부통령과 그의 아들 헌터의 비리 의혹을 조사하라고 압박했다는 이른바 '우크라이나 스캔들'과 관련, 바이든 부자에 대한 과장된 허위정보를 앞세워 검찰에 수사를 압박하는 등 막판 역공을 펼칠 가능성도 있다. 하버드 대학의 로렌스 트라이브 교수는 트럼프가 10월 중순께 아무런 근거도 없는 상태에서 FDA(미국 식품의약국)에 압력을 가해 코로나19의 백신 개발을 발표토록 만들 가능성까지 언급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특히 코로나19 확산으로 인한 민주당의 우편투표 확대 주장에 대해 자신의 재선에 가장 큰 위협이라면서 아주 민감하게 반응하고 있다. 중국이나 러시아 등 외국 정부의 선거 개입 공방으로 대선의 초점이 크게 흐려질 가능성도 있다. 볼턴의 회고록 <그일이 있었던 방>에서 트럼프의 외교적 기행은 낱낱이 폭로되었다. 중국에 무역 전쟁을 선포하며 으르렁대던 트럼프가 지난해 6월 비공개 정상회담에서 자신의 지지 기반인 농민들을 위해 중국이 미국 농산물 수입을 많이 해줄 것을 시진핑 주석에게 요구하는 등 국익을 우선해야 할 외교조차 자신의 재선을 위한 도구로 이용하는 모습은 충격적이다. 또 2016년 대선에서 승리한 자신을 끌어내리려 오바마 대통령이 '러시아 스캔들'을 조작했다는 '오바마게이트' 신조어를 만들어 공세를 취하고 있다. 트럼프 대통령이 바이든에 대한 역전카드로 김정은 위원장과의 북미 정상회담에 나설 것이라는 관측도 제기되고 있다. 11월 3일로 예정된 대선 일정이 조정될 것이라는 음모론까지도 제기되고 있다. 코로나바이러스 충격 속에 치러지는 이번 미국 대선은 역사상 가장 혼탁한 '진흙탕 싸움'이 될 것이 확실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