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물학적으로 본 배신의 시대

2020-06-18 18: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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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미향은 뻐꾸기일까? 뱁새일까?

[최준석 작가, ‘나는 과학책으로 세상을 다시 배웠다’ 저자.


[최준석, 과학의 시선] 배신은 흔하되, 진부하지 않다. 배신을 소재로 한 드라마와 소설에 우리는 매료된다. 배신처럼 우리를 잡아끄는 건 없다. 그리고 그 스토리는 권선징악(勸善懲惡)이라는 프레임에서 진행되기를 기대한다. 배신자의 말로가 어떤지 보고 싶어 한다. 한국사회를 하나의 ‘배신’ 드라마가 뜨겁게 달구고 있다.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이용수 할머니가 윤미향 국회의원이 “위안부 할머니들을 이용해 사리사욕을 차렸다”라고 비판할 때 ‘배신‘이라는 단어를 사용했다. 한국사회 구성원 상당수는 이 배신극의 진실에 뜨거운 관심을 보이고 있다.

인간 사회를 포함한 자연에는 배신이 차고 넘친다. 배신과 사기, 이기적 행위는 진화를 이끌어내는 추동력이기도 하다. 사기에 맞서기 위해 지능이 탄생하고, 지능지수는 계속 향상되었다. 남의 둥지에 알을 몰래 집어넣어 알을 부화시키는 새가 있다. 뻐꾸기가 그런 ‘탁란(托卵)’ 사기꾼으로 유명하다. 뻐꾸기의 사기에 맞서기 위해 뱁새는 대응책을 개발한다. 자기가 낳은 알보다 둥지 속에 있는 알 숫자가 더 많으면 탁란이 들어왔다는 걸 알아내야 하니, 셈 능력을 개발했다는 얘기도 있다. 생물학자는 이를 ‘진화군비경쟁’이라고 한다. 배신이 만든 아름다운 자연 이야기는 <현혹과 기만>이라는 책에 잘 나와 있다.
배신의 이야기도 흥미롭지만, 배신 반대편에 있는 협력도 놀라운 주제다. 배신은 남을 등쳐서 자신의 생존 기회를 높일 수 있으니 기회만 되면 누구나 하려한다. 그런데 협력은 왜 진화했을까? 협력은 자신의 생존기회를 낮출 수 있다. 그러니 협력행동은 마다할 수 있다. 이 협력의 기원과 진화의 이유가 과학자에게는 어려운 문제였다. 그게 무슨 소리냐고. 그렇다면 협력의 극단적인 경우를 생각해보자. 극단적인 협력 행위 사례는 자기 목숨을 바쳐 남을 돕는 일이다. 대전 국립현충원에 묻힌 수많은 애국선열과 전몰용사들이 그런 극단행위자들이다.

진화생물학자의 문제 의식을 잘 드러내는 문장은 이런 거다. “죽은 영웅에게는 자식이 없다”(하버드대학 사회생물학자 에드워드 윌슨). 자기희생의 결과 그들이 자손을 적게 낳는다면, 영웅이 태어날 수 있도록 허용한 유전자는 점차 그 집단에서 사라질 것이다. 경제학자의 문제의식도 같다. <이타적 인간의 출현>이라는 베스트셀러를 쓴 최정규 경북대 교수 역시 “나를 희생해 남을 돕는 이타성은 (진화의 역사에서) 어떻게 살아남았을까”라는 질문을 던진다. 답은 찾기가 쉽지 않았다. 죽은 뒤에 영원한 이름을 얻기 위해서라는 인문학적 해석보다 무언가가 더 있어야 한다고 이들은 생각했다.

인간은 ‘동물의 왕국‘ 주민 중에서도 협력을 가장 극적으로까지 끌어올린 종이다. 21세기 문명이라는 게 그 정점이다. 한국인이 사는 도시, 그중에서도 가장 많은 이가 사는 서울을 보자. 다른 이의 협력이 없으면 도시문명은 돌아가질 않는다. 버스와 지하철 등 대중교통 운행, 전기와 수도 공급 등등. 그리고 자원봉사자들이 있다. 도시락 봉사하는 주부, 서울역 앞에서 노숙자나 형편이 어려운 사람에게 ’밥퍼‘를 하는 사람들이다. 자신의 자원을 남을 위해 기꺼이 내놓은 이타주의자는 수도 없이 많다. 극단적으로는 ’멸사봉공‘(滅私奉公)이라는 단어도 있다. 개인을 희생하고 공적인 대의에 봉사하자는 말이다.

인간 공동체가 극단적으로 이타적인 행동을 최초로 기린 건 고대 그리스 아테네다. 이들은 전몰자를 추모하는 공간을 만들고 국장을 치렀다. 투키디데스는 역사책 <펠로폰네소스 전쟁사>에서 기원전 431년 당시 아테네의 국장과 국립묘지를 이렇게 전한다.

“같은 해 겨울 아테네인은 전통에 따라 이번 대전(펠로폰네소스 전쟁. 아테네와 스파르타가 싸웠다)의 최초 전몰자들을 위해 다음과 같은 식으로 국장을 치렀다. 먼저 천막을 치고 죽은 자의 뼈를 그곳에 3일간 안치했다. 친지들이 제물을 가져오며, 그런 뒤에 묘지로 행진을 한다. 부족 당 1대씩의 수레에 삼나무 관을 싣고, 그 안에 부족 사람의 뼈를 넣는다. 사체가 발견되지 않은 행방불명자를 위해서는 덮개가 씌워진 빈 영구차를 한 대 운반했다...그리고 시의 교외에서 가장 아름다운 곳에 있는 국립묘지에 뼈를 묻었다.”

이 문장을 읽고, 나는 감탄했다. 아테네인은 어떤 사람들이기에 이토록 놀라운 상상력의 도약을 할 수 있었을까? 공동체를 위해 죽은 사람들을 위한 국립묘지와 국장이라니. 기원전 5세기, 그리고 그 뒤로도 오랫동안 아테네 외에 그 어느 사회도 이런 놀라운 공적 협력을 찬양하는 문화를 만들어낸 바 없다. 중국사에서도, 한반도 역사에서도 그런 게 있었다는 얘기를 들어본 기억이 없다. 결국 오늘날 서울 동작동 국립현충원의 원형은 고대 아테네의 국립묘지인 것이다.

페리클레스는 아테네인들이 최초의 국립묘지 언덕에 모인 이유를 분명히 밝혀놓았다. “이분들은 공적으로 몸을 바치셨고, 개인적으로는 불멸하는 찬사와 특별한 무덤을 받으셨습니다. 그 무덤은 단지 그들이 누워 있는 곳일 뿐 아니라, 기회가 주어질 때마다 그들의 명성이 말과 행동을 통해 영원히 추모되는 곳입니다.” 그리고 국가보훈제도의 원형이 아닐까 하는 말을 덧붙인다. “이분들의 자녀는 성년이 될 때까지 도시(아테네)가 돌볼 것입니다.”

인간의 몸 자체가 협력의 산물이기도 하다. 사람 몸은 평균 30조 개 세포로 구성된다. 몸은 이 세포들의 생물학적 계약에 의해 탄생했다. 단세포가 모여 다세포 동물을 이룬 그 먼 옛날, 그 계약서는 만들어졌다. 몸이라는 공동체를 위해 그 구성원인 세포들은 협력한다는 게 계약서 내용이다. 심지어 공동체를 위해 필요하면 구성원인 세포는 자기 목숨을 내놓아야 한다는 ‘멸사봉공’의 문구가 들어 있다. 세포자살이 그것이다. 세포들은 자살명령신호를 받으면 죽고 만다. 암세포는 계약 위반자다. 몸 공동체의 배신자이고, 이기적인 행동을 하는 놈들이다. 자신의 이익을 위해 끝없이 제 이익만을 챙기다가 자신이 발 딛고 있는 공동체(몸)를 무너뜨리고 만다. 암세포의 배신은 모든 게 파괴된 뒤에야 끝난다.

진화생물학자가 생명체의 이타적인 행동의 동기를 이해하려 했을 때 먼저 짚어야할 게 있었다. 그 행동으로 이익을 보는 게 누구냐 하는 문제다. 수혜자가 개인인가, 집단인가 하는 게 논란이었다. 현재 학계는 그 둘다 아니고, ‘유전자’라는 데 의견을 모으고 있다. 유전자가 유전적 이득, 즉 유전자 사본을 많이 퍼뜨리는 이익을 얻기 위해 그런 행동을 한다는 것이다. 이걸 잘 설명하는 대중과학서가 <이기적 유전자>(리처드 도킨스 지음)이다.
영국 유전학자인 J. B. S. 홀데인은 이타적인 행동 이론으로 <친족 이타주의>(1959년)를 내놓았다. 나와 더 가까운 유전자를 공유하고 있는 존재일수록 그에게 내가 이타적인 행동을 할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이에 따라 부모, 형제, 자식이 위험에 처했을 때 이들을 구하기 위해서는 내 목숨을 내놓을 수도 있다. 유전자 입장에서는 내가 살아있으나, 내 몸속의 유전자가 들어있는 그들이 살아있으나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홀데인의 ‘친족 이타주의’는 그의 이런 말에 압축되어 있다. "두 명의 형제를 구하기 위해서는 강으로 뛰어들 것이다. 하지만 한 명은 안 된다. 여덟 명의 사촌을 구하기 위해서도 강으로 뛰어들 것이다. 하지만 일곱 명은 안 된다.“

유전자를 공유하지 않은 남은 왜 도울까? 생면부지인 사람에게 크고 작은 도움을 주는 많은 이야기를 알고 있다. 기찻길에 떨어진 낯선 사람, 심지어는 외국 사람을 구하려다 자신의 목숨을 잃은 경우도 우리는 기억한다. 협력과 배신의 이 같은 행동을 이해하기 위해 과학자는 여러 가지 시도를 했다. ‘죄수의 딜레마 게임’이 가장 유명한 도구다. 생물학자, 경제학자, 사회학자는 죄수의 딜레마 게임을 수십년째 돌리고 있다. 그리고 아직도 이 게임에서는 알아낼 게 많다고 한다. 가령, 이타적인 사람은 이타적인 사람과 잘 어울린다는 ’유유상종‘의 원칙을 이 게임에서 다시 확인했다.

하버드대학의 마틴 노왁 교수 연구는 배신과 협력의 드라마를 좀 더 드러낸다. 노왁은 수리생물학자이다. 생물학을 이해하는 데 수학이라는 도구를 사용한다. 그는 컴퓨터 모델을 만들어 협력적 행위자와 배신하는 행위자가 상호작용을 했을 때 그 가상의 공동체 안에서는 누가 흥하는가를 실험했다. 협력적 행위자가 많이 존재하게 되는지, 배신자로 가득 찬 사회가 되는지를 알아보는 모델 실험이었다. 여기에서 변수는 게임 규칙이다. ‘협력자에게는 협력한다, 배신자에게는 배신으로 갚아준다‘ ’한번 배신은 용서한다. 그러나 또 한 번 배신하면 그때는 배신으로 갚아준다‘ 등 인간 세상에서 가능한 여러 가지의 상호작용 규칙을 각기 적용했다. 어떻게 되었을까? 남을 기꺼이 도와주려고 하는 ’천국‘과 같은 세상이 출현했을까? 마틴 노왁 교수는 그런 세상이 오는 걸 어느 순간 보았다. 빙고! 이건 어떤 경우의 수인가? 게임 규칙이 뭐였더라 하고 살펴봤다.

그런데 ’이타주의자 천국‘은 오래 가지 못했다. 남들의 선의를 악용하는 사기꾼이 나타나, 다른 사람을 등쳤다. 그리고 이어 배신자들이 날뛰는 ‘배신자’ 시대가 열렸다. 한 개체가 다른 개체를 이용해 먹으려고만 하는 지옥과 같은 가상 공동체였다. 희망이 완전히 사라진 건 아니었다. 게임의 횟수가 늘어나면서 협력하는 개체가 나타났다. 그리고 그 수는 늘어났다. 세상은 돌고 돌고 있었다. 배신자와 협력자 시대는 왔다가 가곤했다.

한국은 한반도 역사에서 가장 성공적인 사례다. 20세기 후반부터 21세기 초반보다 더 한반도의 위상을 세계 속에서 우뚝 서게 한 일이 없다. 한국 사회는 구성원들이 만들어낸 놀라운 협력의 시대다. 그러나 협력은 취약하다. ‘배신’에 의해 언제든지 타락할 수 있다. 하버드대학의 마틴 노왁 교수의 컴퓨터 가상 공동체 안에서 우리는 그걸 보았다. 그렇기에 우리는 배신자의 출현을 눈 부릅뜨고 감시해야 한다. 빨간 불이 켜졌을 때 그가 배신자인지 아닌지를 잘 가려내야 한다. 컴퓨터 가상공동체에서도 배신자는 ‘응징’ 받았고, 그런 뒤에 협력의 문화는 다시 출현했다. 처벌하지 않으면 새로운 협력의 시대가 열리지 않았다. 정의기억연대 출신 윤미향 의원의 ’배신‘ 논란 건도 그러하다.
 
 

마포 쉼터 나서는 윤미향 (서울=연합뉴스) 임화영 기자 = 더불어민주당 윤미향 의원이 7일 오후 서울 마포구 연남동 '평화의 우리집'에서 나오고 있다. 정의기억연대(정의연)의 기부금 사용 의혹 등을 수사하고 있는 검찰이 최근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 쉼터인 '평화의 우리집'에 대해 압수수색을 진행한 가운데 이곳 소장이 자신의 집에서 숨진 채 발견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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