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종인 전 미래통합당 선대위원장과 함께 일을 해본 적이 있다. 이명박 정권 초기, 당시 김형오 국회의장이 의장 자문기구로 헌법연구모임(2008년∽2010년)을 만들었을 때였다. 1987년 체제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20여명의 위원들이 매주 머리를 맞댔는데 김 위원장이 사실상 좌장 역할을 했다. 권력구조 개편 같은 민감한 문제라도 다룰라 치면 대개는 그가 가닥을 잡아나갔다. 사안에 대한 충분한 이해를 바탕으로 쟁점의 골자를 추려내 토론에 부치고, 신속히 합의를 이끌어냈다. 말은 짧았고 결정은 빨랐다. 그 판단력과 과단성이 돋보였다.
올해 4‧15 총선, 그는 미래통합당의 선대위원장을 맡았으나 결과는 참패였다. 선거를 불과 한 달여 앞두고 영입돼 판세를 뒤엎기는 어려웠던 것일까. 그는 “준비가 안 된 당을 지원해달라고 해서 (국민께) 죄송하다”고 했다. 투표 전까지도 “뒤집을 수 있다”고 했지만, 설령 그 말이 선거용이었다고 해도 결과적으로 허언(虛言)이 됐다. 그러나 선거라는 게 반드시 한 개인 때문에 이기고, 지는 것은 아니어서 그가 심하게 자책할 일은 아니었다. 오히려 두 차례의 성공신화로부터 비로소 현실로 돌아왔다고 보는 게 합리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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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인은 한국정치에서 ‘과거’로부터 자유로운 거의 유일한 정치인처럼 보인다. 조부는 초대 대법원장을 지냈고, 부친은 일제 때 고등문관시험(사법과)에 합격한 호남 명문가의 후예다. 조부는 독립투사들을 무료 변론한 인권‧민족변호사로 유명하다. 독일 유학파로 경제전문가인 김종인은 서강대 교수를 지내다가 전두환 정권 때 민정당 창당발기인으로 정치에 입문한다. 이어 노태우 정권에서 보건사회부 장관, 청와대 경제수석, 국민은행 이사장을 지냈고, 뇌물죄로 당선무효 형을 받기도 했다. 민정당, 민자당, 새천년민주당, 더불어민주당에서 비례대표 의원만 5선을 했다. 더불어민주당 때는 이른바 ‘셀프 공천’ 시비에 시달린 적도 있다.
그의 행적만을 놓고 보면 시빗거리가 차고 넘친다. 그처럼 드러내놓고 여야를 오간 정치인도 많지 않다. 그런데도 ‘과거’의 칼날이 정면으로 그를 겨냥한 적은 없다. 요즘처럼 사람에 대한 평가가 가혹하기 이를 데 없는 분위기에서 어떻게 그게 가능할까. 아무래도 ‘경제민주화’로 대표되는 진보적 가치관의 전파자라는 인식이 작용한 탓으로 보인다. 그가 의료보험제도의 도입과 경제민주화 조항의 헌법 삽입(제119조 2항) 등, 진보적 가치의 확산에 앞장선 것은 사실이다. 여기에 좌우 양극단 틈에서 그가 ‘중도’로 인식된다는 점도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한국정치에서 ‘중도’란 기회주의자로 비쳐 좌우 양쪽으로부터 따돌림을 당하기 일쑤다. 그런 중도를 김종인은 좌우가 모두 필요로 하는 ‘김종인의 중도’로 바꾸었다. 보수의 색깔을 엷게 하려는 보수와, 진보의 과속을 경계하는 진보가 똑같이 그를 필요로 하도록 만든 것이다. 그 핵심은 그가 일관되게 주창해온 경제민주화에 있다 경제민주화를 고리로 좌우 양쪽을 이어 붙였으니 한국적 ‘제3의 길’이 따로 없었다. 그 통찰력을 가볍게 볼 건 아니다.
김종인이 한국정치에서 차지하는 독특한 위상을 검증 부재(不在) 탓으로 보는 시각도 물론 있다. “언론이 그의 이중적 행태나 국보위 참여 전력 등을 끈질기게 문제 삼으며 ‘철새행보’를 비판했다면 그가 지금껏 ‘구원투수’로 호평을 받았을지 의문”이라는 것이다(미디어오늘 2020년 4월 29일). 그러나 거꾸로 그랬기 때문에 그만 한 정치인이 살아남을 수 있었다는 지적도 있다. 결국 기준의 문제인데 특정 과거만이 인물평가의 유일한 잣대는 아니다.
그가 상왕(上王) 노릇을 하려든다는 인식도 있다. 최근 당 중진들을 겨냥해 “차기 대권주자로서의 시효는 끝났다”면서 “1970년대 생, 경제통”을 거론했을 때도 그런 얘기들이 나왔다. 비대위원장을 맡을 때마다 전권(全權)을 요구하는 것도 상왕의식과 무관치 않다고들 한다. 그러나 그는 “내손으로 정책과 제도를 만들고 책임도 내가 져야하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그는 노태우 정부 때 경제수석이 되자 수석으로서 할 수 있는 일과 없는 일을 서면으로 정리해 조건으로 내걸고 일을 했다고 한다(김종인 회고록 <영원한 권력은 없다> 2020년 3월).
김종인은 자신의 표현을 빌리면 ‘지상 발령 최다 정치인’이다. 자신만큼 정부 고위직의 유력 후보로 신문지상(하마평)에 오르내린 사람이 없다는 것이다. 총리, 부총리. 재무장관, 한국은행총재 등등. 그러나 실제 제의받은 것은 김대중 정권 때 재경부장관을 맡아달라는 요청 한 번뿐이었다고 한다. 이것마저도 “경제수석을 함께 교체해 달라”는 조건을 다는 바람에 성사되지 않았다. 그 무렵 정치부 초짜기자였던 필자가 귀가 아프게 들었던 말이 있다. “사람은 뛰어난데 독선적이어서 팀워크에 문제가 생긴다고 주위에서 반대한다”는 것.
김종인은 “국민 앞에 두 번 사과한다”고 했다. “하나는 박근혜 정부가 태어날 수 있도록 했던 일이고, 다른 하나는 문재인 정부가 태어날 수 있도록 했던 일이다. 모두 국민의 선택이었지만 그런 선택을 할 수밖에 없는 ‘조건’을 만들어준 책임이 크다”고 말한다. 박근혜의 집권에 도움을 주었으나 탄핵이라는 비극을 낳았고, 민주당을 살려놓았지만 일방 독주만 하는 정권이 돼버렸다는 얘기다. 특히 문 정권에 대한 실망이 크다. “촛불에도 불구하고 문 대통령은 41%의 지지 밖에 얻지 못했다. 박근혜가 당선됐을 때 얻은 득표율보다 낮았다. 하지만 마치 하늘에서 절대 권력이라도 부여받은 듯 일방독주 중이다.”(<영원한 권력은 없다>)
그렇다면 이제 그는 네 번째 도전 앞에 선 것일까. 아직 알 수 없다. 그를 비대위원장으로 정식 추대해 당 쇄신을 맡기느냐 여부는 8일 선출될 통합당의 차기 원내지도부 손에 달렸기 때문이다. 전망은 불투명하다. ‘김종인 비대위’ 밖에 활로가 없다는 쪽과 “우리 당 문제는 우리 손으로 해결하자”는 쪽이 맞서 있다. 결국 통합당 당원들이 결정할 일이나 아쉽게도 통합당은 ‘풀뿌리 정당’으로서의 기초가 허약하다. 결국 당 실력자들 간 타협과 합의에 의해 결정될 것으로 보인다. 어떻든 한 가지 점만 유념해줬으면 하는 마음이다.
‘김종인 비대위’ 문제는 이미 특정 정당의 차원을 넘어섰다. 180석이라는 거대 여당에 맞서서 한쪽으로 심하게 기울어진 한국정치의 운동장을 다시 평평하게 만들 수 있느냐는 문제와 직결되기 때문이다. 어떤 인물, 어떤 체제로 가야 최소한의 견제와 균형이 작동하는 ‘정치’를 계속 가질 수 있을까. 그리하여 당도 살고, 그 당에 기대는 국민과 국가도 사는 길은 없을까. 이런 본질적 물음에 대한 답을 모색하는 첫걸음으로 봐야한다는 얘기다.
통합당에 익숙하고 편안한 길은 이미 있다. 한 당직자의 푸념 섞인 실토다. “누가 당대표가 되건, 다선 중진 중 누구는 국회부의장, 몇은 상임위원장, 또 몇은 핵심 당직을 맡겠지요. 때로는 초선의원들로부터 공격도 받겠지만 새 국회 때면 늘 있는 일, 신경도 안 쓸 겁니다. 대여투쟁? 필요하다면 농성쯤이야 웃으며 하겠지요. 이제는 친박(親朴)도 가고, 친이(親李)+친유(親劉)시대라고 하니, 금방 적응할 겁니다. 자칫 ‘바른미래당 사태’처럼 당이 깨질 수도 있다지만 그렇다고 지역구가 없어집니까? 그냥 즐기며 잘살 겁니다, 4년은 짧다며….”
설마 그러기야 하겠는가. 한국사회의 주류가 바뀌었다고 하고, 보수의 궤멸과 진보의 영구 집권론이 나오는 판이다. 아무리 ‘웰빙 정당’이라고 해도 그렇게까지 막가지는 않을 거라고 믿고 싶다. 그런 실낱 같은 믿음의 끈이라도 이어가려면 통합당의 운전대를 누구에게 맡겨야 할까. 8일 통합당의 새 지도부 구성을 숨죽여 지켜보는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