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승완의 '기사'식당] 교과서 속 영희가 고백했다. "나 사실 축구 좋아해"

2020-05-09 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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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생 교재 속 흰색 의사 가운은 '남자', 흰색 앞치마는 '여자'였다

여성의 경제활동 참가율은 높아졌지만 '여성=앞치마' 공식은 여전

과거에 머무른 교육은 아이들의 성 역할 고정관념 견고하게 만들어

[편집자 주] 어서 오세요. 기사(記事)식당입니다. 얼굴 모르는 이들이 흘리는 땀 냄새와 사람 사는 구수한 냄새가 담긴 이야기를 전해드립니다.​

지난 1월 직장인 A씨의 퇴근길은 영 개운치 않았다. 지하철에서 들은 '말 한마디' 때문이다.

이날 A씨가 탄 지하철 5호선에는 초등학교 1학년으로 보이는 여자아이가 옆자리에 앉은 아빠에게 '오늘 할 일'을 조목조목 설명하고 있었다. 이를 지켜보던 한 70대 남성은 대견하다는 듯 이야기했다.
"아빠 비서네, 비서야!"

아이는 '비서'란 뜻을 모른다는 듯이 눈이 동그래졌고, 그 남성은 한 마디를 더 얹었다.

"비서는 옆에서 일 도와주는 '여자'야". 아이는 그제야 이해했다며 고개를 위아래로 끄덕였고, 이를 본 A씨는 고개를 양옆으로 저었다.

◆'여성=앞치마' 공식은 언제까지

여성의 사회진출은 과거보다 많이 늘어났지만, '성 역할 고정관념'은 늘어난 보폭을 맞추지 못하고 있다. 성 역할 고정관념은 사회적 역할에 남성과 여성을 구분하는 사고방식을 뜻한다.

지난 23일 여성가족부가 '지역관광 콘텐츠 특정성별영향평가'를 실시한 결과, 관광안내 책자에 남성은 주로 직업 활동과 경제부양자로 나타났다. 여성은 가사와 육아 돌봄 등 대부분 '집안일'을 하는 사람으로 그려졌다. 
 
 

남산골한옥마을 한국전통체험 홍보물. 남성은 '활'을 들고 있지만, 여성은 음식이 담긴 '쟁반'을 들고 있다. [사진=남산골한옥마을 한국전통체험 홍보물]


실제로 남산골한옥마을 한국전통체험 홍보물에서 남성은 '활'을 들고 있지만, 여성은 음식이 담긴 '쟁반'을 들고 있었다. 최근 금융·자동차 업계 등 금녀(禁女)의 영역으로 여겨지던 직종에서 일하는 여성이 많아졌지만, 여전히 '여성=앞치마'라는 공식이 유통되는 셈이다.

지난해 7월 통계청이 발표한 '2019년 통계로 보는 여성의 삶'을 보면 2018년 기준 여성 고용률은 50.9%로, 2000년 47.0%에서 약 3.9%포인트 올랐다. 반면 같은 기간 남성 고용률은 70.8%로 같았다. 지난 18년간 여성의 경제활동 참가율은 높아졌지만, 지자체와 공공기관이 만드는 콘텐츠에 등장하는 여성의 모습은 여전히 '고정관념'에 묶여 있었다.

◆조신한 철수, 씩씩한 영희는 없을까

수업이 이뤄지는 교실서도 아이들이 '성 역할 고정관념'을 답습할 수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초등성평등연구회는 지난 21일 공개한 'EBS 온라인개학 프로그램 모니터링 결과'를 통해 초등학교 1~2학년이 보는 수업 가운데 일부가 성 역할 고정관념을 반영하는 자료를 사용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초등성평등연구회가 지난 21일 공개한 'EBS 온라인개학 프로그램 모니터링 결과' [사진=초등성평등연구회]


연구회는 영상 자료화면에 나오는 여학생 캐릭터는 헤어핀을 착용하고, 치마를 입은 상태에서 다리를 오므리고 있지만, 남학생 캐릭터는 편하게 다리를 벌린 상태라고 설명했다. 이는 아이들이 그림을 통해 여자는 조신해야 한다는 점을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다는 비판이다.

초등학생 자녀를 둔 B씨는 "최근 맞벌이 부부가 많은데도 아이들은 교과서 속 삽화를 통해 집안일은 '여성의 몫'으로 인식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며 "교과서도 과거의 틀에서 벗어나 변화하는 사회적 구조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일 필요가 있다"고 했다.

◆흰색 가운 입은 남자, 흰색 앞치마 입은 여자

하지만 B씨의 염려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아이들이 공부하는 교재에 성 역할 고정관념은 쉽게 찾아볼 수 있었다. 특히 직업 영역은 남성과 여성 사이에 '단단한 벽'을 형성했다.

지난 25일 강남의 한 대형서점 '유아·어린이 코너'에 들어서자 어린이 취미·교양도서가 제일 먼저 아이들을 맞이했다. 아이들의 손길이 가장 많이 닿는 곳에는 분홍색 배경에 알록달록한 글씨로 '러블리걸'이라고 적힌 책이 놓여 있었다. 책 표지 속 여자 아이들은 화려한 액세서리를 머리에 꽂고, 진한 색조 화장을 하는 모습이었다. 바로 아래에는 '예뻐지자' '매력 뿜뿜'이라는 글씨가 적혀 있었다. 책 뒷면에는 "너희들에게 꼭 필요한 꿀팁"이라며 책을 설명하고 있었다.
 

강남의 한 대형서점 '유아·어린이 코너'. 아이들의 손이 가장 많이 닿는 곳에는 분홍색 배경에 알록달록한 글씨로 '러블리걸'이라고 적힌 책이 놓여 있었다. [사진=홍승완 기자]


반면 이 책 바로 아래에는 초록색 배경에 '야구'라고 적힌 책이 놓여 있었다. 책 표지에는 방망이를 들고 타자 포즈를 취하고 있는 남자아이와 공을 던지는 또 다른 남자아이가 앞면을 채우고 있었다. 여자는 외모에 신경을 쓰고, 남자는 씩씩한 모습을 강조하고 있어 '성 역할 고정관념'을 심어줄 수 있는 지점이다.

고정관념은 만화뿐만 아니라 교재에도 반복됐다. A출판사가 펴낸 7세 유아 '한글 교육' 교재에서 남성은 흰색 가운을 입은 의사로, 여성은 분홍색 근무복을 입은 간호사로 그려졌다.
 

A출판사의 7세 유아 '한글 교육' 교재. 남성은 흰색 가운을 입은 의사로, 여성은 분홍색 근무복을 입은 간호사로 묘사하고 있다. [사진=홍승완 기자]


다른 출판사들도 같은 문제를 되풀이하고 있었다. B출판사의 초등학교 저학년 '맞춤법' 교재에도 의사는 흰색 가운을 입은 짧은 머리의 남성이었다. 직업에 대한 성 역할 고정관념은 병원 밖을 나와서도 존재했다. C출판사의 5학년 국어 학습서에는 경찰 3명이 등장하지만, 여성은 한 명도 없었다.

 

C출판사의 5학년 국어 학습서. 이 그림에는 경찰 3명이 등장하지만, 여성은 한 명도 없다. [사진=홍승완 기자]


'여성=앞치마'라는 방정식도 교과서에 그대로 통용됐다. 같은 교과서에 출제된 국어 문제에서 '엄마'는 흰색 앞치마를 입고 청소기를 돌리고 있었으며, 아이의 생일상을 차려준 사람 역시 앞치마를 입은 여성이었다.

이러한 삽화는 아이들의 신념과 정체성이 형성되는 과정에서 성별 고정관념을 낳을 위험이 있다.

한국초등도덕교육학회가 지난 2018년 발간한 '도덕 교과서의 인권 친화성 분석 및 개선 방안 연구'에 따르면 교과서 속 그림이 현실과 밀접한 모습을 반영했을지라도, 고정된 성에 대한 표현은 교과서를 통해 학습하는 학생들에게 직·간접적으로 성역할 고정관념을 심어줄 수 있다고 경계했다.

장하나 정치하는엄마들 활동가는 "교과서는 검수 과정을 거치면서 성차별적 표현이 개선되고 있지만, 민간 출판사가 제작하는 교재에는 여전히 미흡한 성평등 의식이 드러나고 있다"고 했다.

그러면서 "교재를 통해 아이들을 가르치는 교사들의 성인지 감수성을 높이는 것도 시급한 문제"라며 "성평등 교육이 부족한 교사들이 아이들의 성역할 고정관념을 부추길 수 있다"고 지적했다.

지난 27일 한 포털 사이트 메인에 손가락 절단 사고 현장에서 예비 간호사가 기지를 발휘했다는 기사가 올라왔다. 해당 기사를 클릭하자 여학생 대신 간호복을 깔끔하게 입은 남학생의 사진이 기사 본문에 올라와 있었다. 과거 금남(禁男)의 직업으로 여겨졌던 간호 분야에서 당당히 활약할 예비 간호사 '남학생'이었다.

하지만 이 기사에 한 누리꾼은 '여자가 아니고 남자였나?'란 댓글이 달렸다. 성 평등 교육이 필요한 이유는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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