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효백의 新경세유표 25] 새 국가(國歌) 제정 논쟁 75년사(1)

2020-04-14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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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12.15 '동아일보' 사상 최초 새 애국가 모집 사례금 3000원 공고

4·19 직후 애국가 교체론 비등…5·16 군사 쿠테타로 물거품 등

강효백 경희대 법무대학원 교수

∙ ”새로운 국가 제정 경연대회를 개최하자 -영국의 식민지 시절 군국주의 가사의 찬가는 사라져야 한다." <아일랜드 대표 일간지 2020년 3월 10일>

∙ "2019년 11월 21일, 니제르 대통령은 프랑스를 찬양하고 프랑스 식민통치에 감사하는 기존 국가를 퇴출하고 새로운 탈식민지 국가 제정을 결정했다고 공표했다."

∙ "백두산의 웅장한 정기를 타고 삼면 바다의 반도 나라로 대양을 내다보고서 멀리 나아가려는 기상과 동방의 새문명의 창조자로 이상을 강조하는 가사의 국가를 제정하자." <최현배 한글학회 회장(1964년 2월)>

∙ "국가란 나라의 주권, 독립과 존엄성을 대표하고 나라의 역사와 전통, 민족정신, 가치관, 목표, 심지어 그 나라의 국체와 정체를 반영하는 노랫말이다. 역사가 유구한 나라들도 시대변화에 따라 국가를 꾸준히 변화시켜가고 있다." <브로크하우스 백과사전>

∙ "다 떠나서 국가상징 ‘애국가’에 72년 헌정사상 단 한 번의 여론조사(1964년 새국가 제정 찬성 85%), 노랫말에 단 두차례 파편적 문제 제기뿐, 책이나 논문 하나 없는 건 주권국가로서 극히 미스테리한 엽기적 사건이다." < 강효백>

잊어버린 것 외엔 새로운 것은 없다. 해방 75년사에 새 국가를 제정해야 한다는 목소리는 전혀 없었을까? 아니다. 아주 드물게 간헐적으로 이어져 왔다. 1945년 해방공간부터 현재 제6공화정(1)* 2020년까지 75년간 국가 교체 논쟁사를 시대별로 약술해보고자 한다.

1. 해방공간 (1945.8~1948.8)

해방공간은 일제 잔재 음악을 청산하고 민족통일국가를 수립하려는 민족음악의 시대를 합의하고 있었다. 한국 근현대사 자주적인 민족국가 수립과 국민 모두 함께 부를 수 있는 국가의 제정이야말로 절실하게 요청하고 있는 과제였다.

동아일보사 1945년 12월 15일(토요일) 1면은 사상 최초로 새로운 애국가를 모집을 공고했다. 당선작 사례금이 무려 3000원, 현재가로 환산하면 약 2300만원이다. 이처럼 애국가를 공개모집하고 게다가 당선금까지 제시하는 건 동아일보사가 처음이자 마지막이다.
 

1945년 12월 15일 (토)1면 [사진=동아일보]


<당선작 사례금 3000원>

“해방된 우리영토 민중 그리하야 부흥될 우리의 새 국가를 사랑하는 새로운 애국가를 천하에 구한다. 시공을 통하여 자강한 우리의 전통과 격조를 새로운 이념으로 재인식하고 새로운 각도로 재음미하여 국가민족의 영원한 번영을 축복하는 새로운 국가를 마음껏 힘껏 부르고 싶다. 가슴속으로 뼛속으로 우러나오는 격정의 노래를 하루바삐 부르고 싶다. 그리하여 해방된 삼천리 강산과 해방된 삼천만 심금에 선율위에 무한 풍요를 누리게 하자”

<응모규정>
1. 동해물과 백두산이라는 애국가가 한말시대부터 있으나 이는 가사나 곡조가 새시대에 맞지 않는점이 있음으로 이 민족의 애국열에 접합치 않고 새로운 호흡으로 제작할 것.
1.문체와 격조는 임의로 하되 실내악이나 행진곡으로나 작곡하여 자유자재로 적용할 수 있도록 할 것.
1.애국가의 주제와 정신은 홍익인간에 맞게 씩씩하고도 순박하고 웅위하고도 평이하여 노소불문하고 누구나 어디서든지 부를 수 있을 것.
1.투고는 동아일보 편집국내로 우편으로 부치고 기한은 명년 1월 말일 까지 함.
1.당선작 1편에 사례금 3000원을 증정함.

동아일보사는 1946년 1월 2일자 1면에 1월 말을 기한으로 하는 새 애국가 모집공고를 냈다. 그러나 그후 당선작 발표자는커녕 새 애국가 제정에 관한 어떤 보도도 없었다. 75년 헌정사에 처음이자 마지막이다.

애국가에 비판을 처음 제기한 사람은 해방공간의 음악평론가 박영근이다. 그는 1946년에 가사와 곡을 함께 비판하였다.

"새 시대의 조선사람에게 하나님 타령의 무슨 소용이 있으며, 망국적 애조의 곡보가 무슨 상관이 있다는 말인가! 우리 인민의 참다운 애국의 부르짖음이 없는 곳에 무슨 애국가 있고 우리 인민의 참다운 애국의 행진이 없는 곳에 무슨 애국선율이 있을손가! 참으로 조선인민의 마음으로부터 우러나오는 애국의 정조, 애국의 선율 여기에 있어서만 새 시대의 애국가는 창조되어질 것이다." (2)*

안익태씨 곡도 역시 8·15 광복 이전 것이며, 그 멜로디와 리듬에 망명객을 위한 실내적 위무가치는 있을지 모르나 애국적인 감격이 표현되지 못한 작품이다. 시위 행렬 시에 애국부인들이 부르는 소리를 들으면 마치 전도부인들이 겨울밤에 부르고 다니는 처량한 소리 그것임을 들어 알 것이다. (3)*

2. 제1공화정 시대(1948.8~1960.4)

1948년 9월 9일, 대한민국 제헌국회는 제61차 본회의를 열고 다음과 같이 의결했다. 지금 국기와 국가를 새로 제정하는 것은 결국 통일에 지장을 주어 분단을 영구히 할 우려가 있으므로, 적당한 시기에 남북 전 민족의 의사로 제정하고자 하는 의미에서 논의를 통일될 때까지 보류하기로 결의했다. 이승만 정부는 새 국가 제정을 통일 후로 미뤘다. 위에서처럼 정부 수립 당시부터 국가를 새로 제정해야 된다는 일부 여론이 있었으나 남북통일 뒤로 미루자는 이 대통령의 뜻에 따라 중단시켰다.

3. 제2공화정 시대 (1960.4~1961.5)

새 국가 제정 움직임이 재개된 것은 4·19 직후였다.

아동문학가 윤석중은 “보우니 공활이니 하는 가사가 너무 어렵다”고 했다(경향신문 1960년 8월18일). 서양화가 김환기와 소설가 최정희는 “부르면 기뻐지는 희망찬 가사와 곡으로 바꿨으면 좋겠다”고 했다.

불문학자 김붕구는 “그렇잖아도 피곤한데 ‘동해물과 백두산이’로 시작되는 애국가를 들으면 그대로 주저앉아 까부라지고 싶은 기분”이라고 했다(동아일보 1960년 8월24일).

1960년 9월 제5대 민의원이 개원되자, 김영삼·박준규·김재순 등 민주당 신·구파 젊은 의원들은 전근대적인 유산을 털어야 한다고 동조했다. “애국가는 국가도 아니면서 가사 또한 좋지도 않다”고 평가절하하며 새로운 애국가를 제정한다는 의견을 공동 발표했다.

그해 11월 4~5일 개최된 예산 심의 당시 문교위원인 유청(민주당)의원은 문교부장관에게 국기와 국가등을 고칠 의향이 있는지 질의하자 문교부 장관은 국무회의에서 논의하겠다고 답변했다.(경향신문 1960년 11월 6일). 그러나 이듬해 박정희의 5·16 군사 쿠테타로 비등했던 국가 교체론은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4. 박정희 군정· 제3공화정 시대 (1961.5~1972.10)

지금으로부터 56년 전 대한민국 국가상징에 대해 국민들의 의사를 물은 적이 있었다. 딱 한번. 1964년 2월 11일 경향신문사에서 국기·국가·국화에 대한 국민들의 의견과 수정의사에 관해 설문조사를 하였다. 이 중 국가 관련 설문내용은 다음과 같다.

① 지금 우리가 부르고 있는 애국가는 국가라고 생각하십니까?
② 달리 국가가 만들어진다고 하면 그 가사며 곡조는 어떻게 강조되기를
원하십니까?

먼저 「애국가」가 국가인가라는 질문에 대해 응답자의 52%가 국가가 아니라고 답변하였다. 국가라고 답한 이는 26%였다. 그리고 국가를 새로 제정하는 의견은 83%, 그대로 부르자는 견해는 15%, 나머지 2%의 사람들은 ‘통일이 될 때까지’라고 조건을 달았다. 결국 국가를 새로이 제정하자는 의견이 85%로 지배적 의견이었다.

국가를 새로 제정하자고 주장하는 이들은 곡조보다 가사에 대해 많은 관심을 보였다.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이란 구절은 비판이 대단했다. 연세대 사학과 홍이섭 교수는 ‘극한적인 표현’이라고 질색했다. 음악 평론가 박용구는 “헌법 제1장 1조의 ‘민주 공화국’, 제2조의 ‘주권은 국민에게’, 제5조의 ‘자유·평등·창의’가 가사에 포함되도록 하자”는 주장을 내세웠다. 이화여대 불문학과 교수 이진구는 “삼천리, 금수강산, 삼천만, 반만년 따위의 어휘만은 들어가지 않도록 하자”고 주장했다.

그렇다면 새로 국가를 제정할 경우, 가사내용은 어떻게 했으면 좋겠는가라는 설문에 대해 응답자 대부분은 ‘진취적’이라고 답했으며, ‘장엄하고 활기에 넘친’ 가사를 기대하는 사람들도 상당수였다. ‘현대적인 느낌’을 담자는 주장은 10% 정도였다.

한글학자 최현배는 “백두산의 웅장한 정기를 타고 삼면 바다의 반도 나라로 대양을 내다보고서 멀리 나아가려는 기상과 동방의 새문명의 창조자로 이상을 강조하는 가사”를 제정하자고 말했다.

동양화가 천경자는 ‘대중적이면서도 예술적’인 국가를, 성악가 홍진표는 ‘오랫동안의 식민지 생활로 인한 비애감과 자탄이 없는 곡’을 국가로 하자는 견해를 밝혔다.

곡조에 대한 비판으로는 작곡가 나운영 씨는 지금의 애국가는 서양식 찬송가라고 말하면서 새로 제정할 국가의 곡조는 7·5조를 피하자고 주장했다. ‘한국적인 곡조’가 좋다는 것이었다.

현행 「애국가」를 국가로 제정해 그대로 부르자는 견해는 소수였다. 민속학자 최상수는 “지금 부르고 있는 것은 애국가이고 국가는 아니지만 실상은 국가나 조금도 다름이 없다. 국외에서 널리 불려지고 있지 않은가? 그러므로 지금의 애국가를 국가로 제정하면 될 것이다. 시비를 하는 이가 있으나 애국가는 역사성으로나 현실성으로 보아서 국가로 될 여러 가지 점을 구비하고 있다”고 했다.

작곡가 박태현도 “현재의 애국가가 국가로 되어도 좋다’는 의견을 피력하였고, 여원사 주간 고정기, 소설가 김리석, 서울대 법대 교수 김기두 등도 같은 견해를 보였다. 다만, 서울대 문리대 교수 전광용과 서울대 사범대 교수 이응백은 ‘남북통일 때까지’ 「애국가」 제정문제를 미루자는 견해를 밝혔다.

국가 제정 방법으로는 공모가 지배적이었다. 고려대 교수 왕학수는 공모를 주장하며 그 가사는 문필가·시인·교육자·군인으로 구성된 심사위원회를 구성하여 모집하자고 주장했다.

5. 제4공화정 시대 (1972.10~1979.10)

1976년 이유선은 그의 책 『한국양악백년사』에서 위의 표절 문제를 거론하며 “대한민국은 완전한 민주독립국가이니만큼 하루 속히 국가를 새로 제정해야 할 것”이라고 썼다. 이에 안익태기념사업회 측은 반론자료와 함께 정부 각 부처에 진정서를 보냈다.

그러자 문화공보부는 1977년 정부의 공식 입장을 발표했다. 애국가는 애국가가 30년 동안 국가 역할을 한 점으로 볼 때 “명확한 근거 없이 표절 여부를 논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은 일”이며 새 애국가를 제정한다면 혼란을 가져올 염려가 있다 또한 새로운 애국가를 제정한다 하더라도 ‘과연민족으로 얼룩진 애국가’만큼 공감을 줄 수 있는가는 의문시되고 있다며 묵살해버렸다.

1977년 1월 26일 음악협회는 제16차 정기총회를 개최하고 국가 제정 문제를 논의했다 이날 토론회에서 서울교대 교수이자 작곡가 박찬석은 새로운 국가 제정의 필 요성을 역설하면서 여태까지 국가가 제정되지 않은 이유로 4가지를 꼽았다.

① 현재 잘 보급된 애국가가 있지 않는냐는 주장, ② 통일 이후에 국가를 만 들자는 논의, ③ 특정인이 국가를 작곡할 수 있느냐는 소아병적 태도, ④ 국 민과 당국이 예술 특히 음악에 무관심한 점 등을 거론했다.

그러면서 애국가는 국내에 잘 보급되어 있고 이미 대외적으로 알려져 있는 잇점은 있으나 가사가 국가로서 미흡하고 적성 국가인 불가리아 민요곡을 닮았다는 설이 일부에 나돌고 있는 사실이 불유쾌한 데다 서양적인 작곡이어서 차제에 우리스런 리듬 박자․음계․화성법에 입각한 우리 분위기가 있는 새 국가를 제정하는 것이 좋겠다고 밝혔다. (동아일보 1977년 1월 28일 애국가 논의에 종지부)

이러한 지적에 해 안익태기념사업회의 이세영은 「애국가」 곡조는 표절이 아니라 독창적이라고 반박했다. 이에  대해 작곡가 김상두는 국가 제정문제는 음악협회가 다룰 문 제가 아니라 전국민에게 물어보는 형식을 취해야 할 것이라는 의견을 제시하고, 작곡가 김형주는 음악협회 집행부에서 연구과정을 거쳐 정부에 건의하는 형식이 좋을 것이라는 견해를 밝혔다.

(계속)

◆◇◆◇◆◇◆◇◆◇주석

(1)*흔히들 ‘5공화국’ ‘7공화국’ 등 몇 공화국이라고 하는데 이는 일본이 프랑스 제4공화‘정’을 국체와 정체를 혼동하여 제4공화‘국’으로 오역한 것을 무뇌증으로 따라 한 반국가적 용어다. 제1공화국 대한민국이 언제 망해 제6공화국이 되었나? 지금은 대한민국 제6공화정 시대다.

(2)*(박영근, 악단시평, 『인민」 제1권 제2호, 인민사, 1946, 107쪽

(3)*박영근, 「악단의 제문제- 민족음악건설을 중심으로」, 예술신문, 1946.8.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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