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미의 사랑 흐르는 강물따라 천년을 달린다

2020-03-24 17: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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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0>낭만과 청춘의 간이역 능내역~팔당역 자전거길 · 황호택(서울시립대) 이광표(서원대) 교수 공동집필


팔당~능내 자전거길은 팔당호에서 시작해 한강을 끼고 강 건너로 하남의 검단산을 둘러보며 달린다. 이명박 정부 시절에 4대강을 개발하면서 중앙선 철도의 팔당~양수 구간이 옮겨가고 구 철도 노선을 이용해 조성됐다. 양평 두물머리에서 남한강 자전거길로 이어져 이천 이포보를 거쳐 충주 탄금대까지 닿는다. 주말에는 중앙선 전철에 자전거를 싣고 올 수 있지만 팔당역 능내역 앞에는 자전거 대여업소들이 많다.
현대식으로 새로 지어 번듯한 팔당역사에서 1㎞ 떨어진 선로 옆에 대한민국 근대문화유산 제295호로 지정된 옛 팔당역사가 있다. 특이하게 역사가 플랫폼 위에 서있다. 먼지 낀 유리창 안으로 대합실과 숙직실이 들여다보인다. 근대문화유산으로 지정해놓고 일반인의 출입을 통제한다. 
 

  사랑의 옹벽에는 청춘남녀들이 뜨거웠던 시절의 맹세를 남겨놓고 있다. [사진=경기문화재단]


팔당역에서 남양주시립박물관을 지나 얼마 안 가면 청춘 남녀들이 사랑의 맹세를 써내려간 옹벽이 시작한다. 원래 예봉산 자락의 토사가 철로로 흘러내리는 것을 막기 위해 만들어진 콘크리트 벽이다. 연인들의 서약 중에는 결실을 이룬 것도 있겠지만 옹벽의 글씨가 희미해지기도 전에 남남으로 갈라선 연인들도 많을 것이다. 삼국사기에 실려 있는 도미(都彌) 부부의 전설이 내려오는 곳에 청춘들이 찾아와 한국에서 가장 긴 사랑의 옹벽을 만들었다는 점이 흥미롭다.

도미부부 전설 깃든 곳에 사랑의 맹세 가득한 옹벽

도미는 백제 개루왕 시절의 사람이다. 도미의 부인은 백제에서 절세미인으로 이름 나 개루왕이 신하를 보내 유혹했다. 도미 부인은 하녀를 대신 보내 왕을 속이고 잠자리 시중을 들게 했다. 나중에 개루왕이 이를 알고나서 보복으로 억지 내기를 걸어 남편 도미의 눈을 빼어 강물에 던졌다. 그리고 도미 부인을 궁궐로 잡아들였다. 부인은 "몸을 깨끗이 하고 오겠다"고 속여 궁궐을 빠져나와 도망쳤으나 강물이 앞을 가로막았다. 뒤에서 개루왕의 군사들이 쫓아오는 황급한 처지에서 빈 배가 내려왔다. 배를 타고 강을 따라 내려가던 부인은 풀을 캐어먹던 남편을 만나 고구려 땅 산산(蒜山)에 가서 살았다.
산산이라는 지명이 어디인지 알수 없으나 도미라는 지명은 전국에서 유일하게 남양주시 조안면에만 남아 있다. 도미 부인을 놓고 백제 위례성과 가까운 서울 강동구와 하남, 남양주시가 각기 연고권을 주장한다. 남양주에는 도미협(渡迷峽) 도미진(津‧나루)이 있다. 한문표기가 다르지만 삼국사기의 표기 도미(都彌)도 음차(音借)한 것이다. 한강에서 팔당역에서 팔당댐까지의 구간이 도미협(峽)이다. 험하고 좁은 골짜기를 따라 강이 형성돼 물살이 빠르다.
 
 

정약용은 두미협(도미협)의 겨울철 고기잡이를 고향마을 12경의 하나로 꼽았다. [사진=경기문화재단]


다산이 고향마을의 12경(景)을 노래한 시(詩)에는 도미협의 고기잡이가 들어 있다. 마을 사람들이 겨울철 얼음에 큰 구멍을 뚫어 중간중간 막대기로 연결한 그물을 집어넣고 계속 작은 구멍을 뚫어 막대기를 끄집어 올려 얼음 속에 그물을 친다. 그리고 먼 곳에서부터 얼음을 두드려 토끼몰이를 하듯이 고기를 그물 있는 쪽으로 몰았다. 그물을 걷어올리면 팔뚝만 한 물고기들이 얼음 위로 튀어올랐다. 흰 눈에 흰 얼음, 흰 옷을 입은 사람들로 도미협이 온통 하얬다. 도미협에서 잡힌 고기 중에서 농어를 최고로 쳤다. 다산은 귀한 손님이 찾아오면 농어 요리를 내놓았다.
팔당댐은 경기도 남양주시 조안면과 하남시 배알미동을 잇는 댐이다. 배알미(拜謁尾)는 배를 타고 한양을 떠나 이곳에 이르러 배 위에서 임금을 향해 마지막으로 하직인사를 하는 곳이라는 뜻에서 생긴 지명이다. 팔당댐은 독일 기술로 공사를 시작한 지 8년 만인 1974년 준공됐다. 이때 다산유적지의 설계가 이뤄졌다.
원래 이곳의 이름은 '바댕이'였다. 바댕이를 음차(音借)한 것이 팔당(八堂)이다. 파당(玻塘)이라고 기록한 고서(古書)도 있다. 팔당댐의 건설로 수량이 풍부해지고 수도권 주민이 깨끗한 물을 먹을 수 있게 됐지만 다산의 고향인 마재와 팔당 일대가 조선시대의 모습과는 크게 달라졌다.
자전거가 봉안 터널에 들어서면 선글라스를 벗으라는 경고문이 눈에 들어온다. 밝은 곳에서 갑자기 어두운 곳에 들어서면 처음에는 아무 것도 보이지 않다가 차차 눈이 익어야 주위가 보이기 시작한다. 옛날에 중앙선 기차가 통과하던 터널이 자전거 터널로 바뀌었다. 

한강변을 따라 달리는 능내~팔당 자전거길에는 문화유적 자연유산들이 많다.[사진=김세구]

봉안 터널을 지나면 도미진이 나온다. 도미나루는 조선시대부터 실제 생활에서 쓰이던 지명이다. 팔당댐이 조성되면서 도미나루가 수몰돼 그 시절의 주막은 흔적조차 찾을 수 없다. 물안개와 가마우지, 철새 떼가 경관을 이루어 사진작가와 연인들이 많이 찾는다. 빼어난 경치를 탐낸 별장들도 몇채 서 있다.
능내~팔당 코스는 6㎞. 열심히 페달질을 하면 40분에 주파할 수 있다. 자전거 코스 주변의 역사 문화유적을 탐방하면서 라이딩을 하면 살아 있는 공부도 되고 부족한 운동량을 채울 수 있다. 자전거 코스 옆으로 봉안마을, 연꽃마을, 다산생가, 마재성지가 있어 쉬엄쉬엄 가기에 좋은 코스다. 도미나루에서 자전거 도로를 벗어나 봉안마을로 가는 샛길로 빠지면 근대사의 인물들을 만날 수 있다.
조선시대에 봉안(奉安)역은 동대문에서 울진까지 이어지는 평해로(平海路)의 가장 큰 역이었다. 북쪽으로는 함경도 연해주로 연결되었다. 안동김씨 세거지(世居地)인 상봉안 마을과 하봉안 마을이 있었으나 하봉안 마을은 팔당댐 준공과 함께 수몰됐다.

6km 코스 봉안마을 마재성지 연꽃마을 둘러봐

광해군 3년 별시문과에서 임숙영은 이이첨이 왕의 환심을 살 목적으로 존호를 올리려는 것을 비판하는 글을 썼다. 광해군이 분노해 그의 이름을 급제자 명단에서 지웠으나 이항복이 무마해 살아남았다. 그러다 폐모살제론(廢母殺弟論)이 벌어질 때 다시 파직되어 봉안에 내려와 은둔하다가 인조반정 후에 복직했다.
조선의 브리태니커라고 불리는 농서(農書) 임원경제지(林園經濟志)를 지은 서유구도 봉안마을에 살았다. 이곳에서 농사를 짓고 실험을 해 책에 반영했다. 연암 박지원의 손자 박규수는 서울 북촌 지금 헌법재판소 자리에 살았으나 봉안마을에 서유구가 살던 집을 사서 가끔 쉬면서 책을 읽는 별장으로 활용했다. 그는 중국에 두 차례 사신으로 다녀온 뒤 개화파 실학자가 되었다. 형조판서와 우의정을 지냈다.
 

담쟁이 덩굴에 뒤덮인 봉안교회. 김용기 장로의 부친이 세웠다. [사진=네이버 블로그 가문비]


몽양 여운형과 가나안 농군학교를 설립한 김용기 장로도 봉안마을과 인연이 깊다. 담쟁이로 덮인 봉안교회는 1912년 김용기의 부친 김춘교가 세웠다. 김용기는 여운형이 양평군 신원리 고향마을에 설립한 근대교육기관 광동학교를 다녔다. 김용기는 나룻배를 타고 두물머리로 가서 신원리 학교까지 걸어갔다. 다산의 5대손 정규영은 광동학교 교장을 지냈고 1921년 다산의 일생과 학문의 개요를 정리한 '사암선생연보(俟菴先生年譜)'를 편찬한 사람이다. 근대사의 인물들이 봉안마을에서 얽히고설킨다.

샛길로 빠지면 봉안교회와 여운형 김용기 발자취

몽양은 1942년 김용기가 부품을 조립해 만들어준 광석라디오로 단파방송 '미국의 소리'를 듣고 일본의 패망이 다가왔음을 알았다. 그해 4월에는 일본 정부의 초청으로 도일했다가 미군 폭격기가 도쿄를 공습하는 것을 목격하고 돌아와 일본의 패전을 공언했다. 일본패망론이 입소문을 타면서 몽양은 치안유지법 위반 혐의로 체포돼 혹독한 고문을 받고 7개월 동안 옥살이를 했다. 요양원에서 치료를 받고나와 봉안마을에 은거하며 독립을 위한 비밀활동을 했다. 김용기와 여운형이 살던 집은 지금까지 그대로 보존돼 있다.
봉안마을(능내 2리)에는 연꽃 체험마을이 조성돼 있다. 다산 유적지까지 산책로로 연결된다..
 

 중앙선의 이설로 지금은 폐역이 된 능내역. 이 역을 이용했던 사람들의 빛 바랜 사진들이 걸려 있다. [사진=김세구]

2008년부터 문을 닫은 능내역에는 1950, 60년대 역을 이용했던 사람들의 사진들이 걸려 있다. 사진의 주인공들은 인생의 황혼길에 접어들었거나 불귀의 객이 됐을 것이다. 마재성지는 능내역에서 도보로 5분 거리에 있다.
다산의 고향 마재마을 앞에는 남자주(藍子洲)라는 하중도(河中島)가 있다. 그 섬을 둘러싼 강을 사라담이라고 불렀다. 사라담에 뜬 배 위에서 고개를 들면 운길산 수종사가 보인다. 겸재 정선의 진경산수화(眞景山水畵)가 이곳에서 유래된 것이 우연이 아님을 알 수 있다. 
 다산은 사라담의 달구경도 고향 마을 12경의 하나로 꼽았다. 1925년 을축년 대홍수로 지형이 바뀌고 팔당댐이 건설되면서 남자주의 상당 부분이 물속으로 들어갔다. 강둑 안에 있는 논들도 모두 수몰됐다. 자전거는 강바람을 맞으며 두물머리로 달려가고 한강은 그때나 지금이나 서울 쪽을 향해 유유히 흘러가고 있다.<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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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지원-남양주시(시장 조광한)
협찬-MDM그룹(회장 문주현)
도움말-남양주시립박물관 김형섭 학예사


<참고문헌>
1.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2.정약용 길을 떠나다 1, 권혁진 , 도서출판 산책
3.다산이 그리워한 마을 마재, 경기문화재단 경기문화재연구원, 경기마을 기록사업3 남양주 능내 마재마을지
4.다산의 한평생, 정규영 지음 송재소 역주, 창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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