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강이 바라다 보이는 남양주시 삼패동(三牌洞)에서 땅주인인 서울 사람이 놀리는 구릉에 주민 몇명이 텃밭을 가꾸었다. 2015년 여름 김정희 씨는 밭을 매다 석함(石函)과 목제마(木製馬) 조각을 발견해 남양주시청에 신고했다. 남양주시와 고려문화재단연구원이 1차 발굴조사를 한 결과 근접한 곳에서 석함 하나가 추가로 발견됐다. 석함에서 뚜껑을 갖춘 백자입호(白磁立壺), 칠기로 만든 명기(明器)와 벼루 등이 출토됐다.
2차 발굴조사에서 유골이 이장된 회곽묘 1기, 회지석(灰誌石), 회곽함 등이 출토되면서 이 무덤이 영조의 딸 화협옹주(和協翁主)와 남편 영성위(永城尉) 신광수(申光綬)의 합장묘 자리였던 것으로 확인됐다. 왕비가 낳은 딸은 공주이고 후궁의 딸은 옹주다. 후손들이 1970년대 진접읍 배양리로 이장하면서 땅 위에 있는 석양(石羊), 망주석, 향로석은 옮겨갔으나 주변에 묻힌 석함이나 회곽함 등은 발견하지 못하고 다시 흙을 덮었던 것이다.
삼패동 무덤 터에서는 화협옹주가 생전에 사용했던 화장 도구와 화장품 물질이 나와 조선왕실의 화장품과 화장문화를 연구할 수 있는 풍부한 자료를 제공했다. 2차 발굴 때 다른 주민이 밭에서 주운 묘지석(墓誌石)을 발굴단에 내놓았다. 딸의 죽음을 애도해 영조가 직접 글을 지은 지문(誌文)에는 왕희지체로 음각된 394 글자가 담겨 있었다.
영조의 7번째 딸인 화협옹주는 어머니 영빈 이씨(暎嬪李氏)를 닮아 미색이 뛰어났다. 궁녀 출신인 영빈 이씨는 영조의 총애를 받아 사도세자와 다섯 옹주를 낳았다. 화협옹주는 좌의정 우의정 영의정을 두루 역임한 신만(申晩)의 아들 신광수에게 시집 갔다. 신부는 열살, 신랑은 열두살이었다. 조정에서는 사도세자가 화협옹주보다 두 살 아래지만 종묘사직의 주인이 될 동궁(東宮)이니 사도세자를 먼저 결혼시키자는 의견이 많았다. 하지만 영조는 “결혼의 순서가 바뀌는 역혼(逆婚)은 세속에서도 꺼린다”며 화협옹주의 혼인 날을 먼저 받았다.
화협옹주가 병이 들어 죽기 이틀 전에 영조가 딸의 집에 거동하려 하자 채제공이 말렸으나 "군율을 시행하겠다"며 겁을 주고 남양주 딸네 집 행차를 강행했다. 영조가 옹주의 집에 가서 밤이 깊도록 돌아가지 않다가 동 틀 무렵에 비로소 어가를 돌렸다. 옹주의 나이 스물아홉이었고 후사도 없었다.
이틀 뒤 화협옹주가 새벽에 세상을 떴다는 소식이 궁궐에 전해졌다. 영조는 다시 남양주 딸네집에 들러 날이 저물어가는데도 어가를 돌리라는 명을 내리지 않았다. 채제공과 의약을 담당하던 내국(內局)에서 궁으로 돌아갈 것을 청하니 그때서야 가마를 움직이게 했다. 영조는 옹주를 애도하는 글을 지어 묘지석에 새겼다. 아버지의 애끓는 심경이 진솔하게 담겨 있다.
아들(사도세자)을 뒤주에 가두어 8일 만에 굶어죽게 만든 독한 왕이 출가해 병사한 딸에 대해서는 "아 슬프도다 슬프도다"라며 가슴을 쳤다. 영조는 왕위를 계승할 외아들에게 왜 그렇게 독하게 했을까.
사도세자는 광증이 발작하면 궁녀와 내시들을 함부로 죽이고 곧 후회했다. 심지어 자기가 낳은 자식까지도 칼로 쳐 연못에 던질 정도였다. 어머니 영빈이씨는 물론이고 장인과 부인 혜경궁 홍씨까지도 사도세자에 대한 희망을 접어버린 분위기였다. 사도세자에겐 행인지 불행인지 똘똘한 아들들이 있었다. 영조는 왕조를 지키기 위해 부정을 끊어버리고 세손(世孫·정조)에게 어보를 물려주기로 마음을 정했다. 화협옹주는 정조의 고모가 된다.
화협옹주의 관곽 옆에서 ‘유명조선화협옹주지묘인좌(有名朝鮮和協翁主之墓寅坐)라는 묘기(墓記)가 출토됐다. 묘기는 묘주가 누구인지를 표기한 명패다. 석회, 세사(細沙), 백토 등을 반죽해 반듯하게 만든 12장의 회지석에 한 글자씩 새겼다. 글씨는 명필로 이름을 날리던 옹주의 남편 신광수의 글씨로 짐작된다.
2차 발굴에서 나온 회곽함은 회로 제작한 후 돌뚜껑으로 봉합됐다. 회곽함에서 청화백자 및 분재자기, 얼레빗, 동경(銅鏡) 등이 출토됐다.
구리거울(동경)은 일본에서 제작된 것으로 집에 들어 있는 채로 발굴됐다. 봉황문 아래 쪽에는 ‘光長(미쓰나가)’라는 명문이 새겨져 있다. 미쓰나가 동경은 일본에도 상당히 많은 수량이 남아 있다. 자루 부분은 종이로 한번 감싸고 그 위에 대나무 끈을 21회 이상 촘촘히 감쌌다. 조선왕실에서는 17세기부터 왕실행사인 국혼 등에서 왜경(倭鏡)을 사용했다.
화장용기와 도구는 모두 12점이 출토됐다. 머리를 빗을 때 사용했던 빗, 눈썹을 그렸을 것으로 추정되는 먹도 발굴됐다. 당시 사대부 여성의 백과사전 격인 ‘규합총서(閨閤叢書)에는 열가지 눈썹 모양이 소개돼 있을 만큼 여유계층의 여인들은 눈썹화장에 신경을 썼다. 출토된 먹의 후면에는 '어제묵명(御製墨銘)'이라고 쓰여 있어 궁중에서 제작됐거나 궁중에 납품한 제품임을 알 수 있다. 백자 화장용기 12개 중 조선의 분원에서 제작된 것은 청화백자 칠보무늬 팔각호 하나뿐이었고 중국제 8개 일본제 3개였다. 영정조 시대에 외래문물에 대한 탄력적인 수용이 왕실부터 시작해 민간으로 보편화했음을 알 수 있다.
출토된 청화백자합과 분채사기잔에는 사용 당시의 화장 물질이 탄화된 상태로 남아 있었다. 열두개의 작은 도자기에는 하얀색 가루, 빨간색 가루, 투명한 액체와 알갱이가 가득 섞인 액체, 다섯개의 갈색 고체 등 모두 아홉 건의 화장품 내용물이 확인됐다. 하얀색 가루는 탄산납과 활석을 같은 비율로 섞어 피부를 하얗게 만들었던 파운데이션이다. 빨간색 가루는 입술이나 볼을 빨갛게 칠했던 연지다.
유일한 국산 청화백자 팔각호에 담긴 액체 속에는 머리, 가슴, 배, 다리가 분리된 수천마리의 개미가 들어 있었다. 황개미를 식초에 담가 녹인 액체는 도대체 무슨 용도로 쓰였을까. 개미 화장품은 유일하게 국내에서 제작된 청화백자 칠보무늬 팔각호에 담겨 있었다. 한의서인 본초강목(本草綱目)에는 피부병에 개미를 찧어 바르거나 다른 약에 섞어 바른다고 나와 있다. 조선시대에는 납 성분이 들어 있는 연분(鉛粉)이 주요 화장품으로 이용됐기 때문에 화장독이 생길 수 있었다. 국립고궁박물관 김효윤 학예사는 "식초에 담긴 개미산은 화협옹주의 얼굴 피부 치료제로 사용했을 가능성이 높다"고 추정했다. 고궁박물관 유물과학과 연구원들은 화장품 업계와 공동으로 조선왕실의 화장품을 복원하는 연구도 진행하고 있다.
남양주에는 화협옹주의 이복동생인 화길옹주가 살던 궁집이 있다. 남양주시에 화협, 화길 두 자매를 잇는 K-뷰티의 원조박물관을 세우면 국내외 여성들의 인기있는 관광코스가 될 것 같다.<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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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지원-남양주시(시장 조광한)
협찬-MDM 그룹(회장 문주현)
도움말-남양주시 시립박물관 김형섭 학예사
<참고문헌>
1.조선왕조실록
2.민족문화대백과사전
3.영성위 신광수 화협옹주 묘-남양주` 삼패동 고분 유적- 남양주시·(재)고려문화재연구원
4.18세기 조선왕실의 화장품과 화장문화, 2019년 10월 16일 국제학술대회, 국립고궁박물관
5.한국일보 2019년 12월 21일,미모의 '사도세자 누나'가 쓴 개미 화장품의 정체는, 김효윤 국립고궁박물관 학예연구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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