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경환의 베트남 ZOOM IN] (8) 프랑스는 글자를 식민 지배에 썼다

2020-03-23 0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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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경환 교수]


[베트남 ZOOM IN] 필자 안경환(安景煥) 전)조선대학교 교수 = 1955년 충북 충주시에서 태어났다. 충주고등학교를 졸업하고 한국외국어대학교에서 베트남어를 전공했으며, 베트남 국립호찌민인문사회과학대학교 대학원에서 어문학 석사·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저서로는 <생활 베트남어회화>, <행복한 한-베 다문화가정을 위한 길잡이>, 역서로는 호찌민의 <옥중일기(獄中日記)>, 응우옌주의 <쭈옌 끼에우>, 당투이쩜의 <지난밤 나는 평화를 꿈 꾸었네>, 보응우엔잡 장군의 회고록 <잊을 수 없는 나날들>, 베트남어 번역서로는 권정생의 <몽실 언니>, <한국전래동화>가 있고, <김동인 단편선>은 팜꽝빈과 공역하였다. 베트남 정부로부터 친선문화진흥공로 휘장, 평화우호 휘장을, 호찌민시로부터 휘호, 응에안 성으로부터 호찌민 휘호를 받았고, 베트남문학회로부터 외국인 최초의 문학상을 수상했다. 2014년 10월 12일에는 하노이 수복 60주년 기념으로 하노이시로부터 '수도 하노이 명예시민'으로 추대된 유일한 한국인이다. 2017년 11월 20일에는 국립호찌민인문사회과학대학교 개교 60주년 기념식에서 ‘자랑스러운 동문 60명’ 가운데 한 사람으로 선정되었으며, 2018년 12월 베트남 정부로부터 우호훈장을 받았다. 2014년부터 6년간 한국베트남학회 회장을 역임했다.[편집자 주]

∎베트남의 고유 문자 : 쯔놈(Chữ Nôm)
∎알렉산드흐 드 호데 주교가 만든 사전이 라틴 문자화의 효시



동남아에 위치한 베트남이 지리적으로 멀리 떨어진 서양의 라틴 문자를 사용한다는 것은 신기한 일이다. 베트남은 유럽과는 민족도, 피부색도, 문화도 전혀 다름에도 사용하는 문자의 조상이 같다. 어찌된 것일까? 베트남은 B.C 179년부터 A.D 938년까지 오랜 기간 동안 중국의 식민 지배를 받았기에 한자를 쓸 수밖에 없었다. 독립한 다음부터는 전국적으로 널리 보급되어 사용되지는 않았지만, ‘쯔놈’이란 문자가 베트남 문자로서의 역할을 일부 담당하였다. 그러다가 포르투갈 항해가인 바스코 다 가마(Vasco da Gama)가 1498년 인도항로를 개척하고부터 유럽 상인들과 천주교 사제들이 동양으로 진출하기 시작하였다. 특히, 16세기부터 신부들이 베트남으로 파견되기 시작하였다. 천주교 사제들 가운데는 포르투갈 출신이 가장 많았다. 이들이 라틴 문자, 포르투갈 문자, 희랍문자를 사용하여 초기 단계의 베트남어를 표기하여 사용하였다. 이러한 결과로 프랑스 아비뇽 태생의 알렉산드흐 드 호데(Alexandre de Rhodes : 1591~1660) 주교가 1651년 로마에서 <베트남어-포르투갈어-라틴어 사전>을 출판함으로써 현재 사용되고 있는 베트남 문자의 효시가 되었다. 알렉산드흐 드 호데 주교는 베트남에 라틴문자를 소개해 준 사람으로서 베트남 문자역사에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베트남 문자와 라틴 문자는 같고, 알파벳 이름이나 순서도 거의 같기 때문에 문자의 조상이 같다고 하는 것이다. 현재 사용되고 있는 베트남 문자는 모음이 12자, 자음이 17자로 모두 합하여 29개의 자모가 있다.

∎54개 민족 모두가 사용하는 베트남 문자

베트남은 다민족 국가로 모두 54개 민족이 함께 어울려 살고 있다. 전체 인구의 약 88%를 점하고 있는 낀족 이외에 53개 소수 민족이 있다. 이들 소수 민족의 대부분은 산악지대나 고원지대에 흩어져 살고 있으며, 주로 수렵이나 화전을 일구며 생계를 이어가고 있다. 민족마다 고유의 전통문화와 언어가 있다. 베트남에는 모두 5개의 언어계통이 있고, 그 언어 계통에는 민족이나 지역에 따라 수십 종류의 언어가 존재한다. 따라서 표준어로서의 베트남어 교육이 매우 중요하다. 같은 나라의 국민이면서 말이 서로 통하지 않으면 사소한 일에도 민족들 사이에 갈등이 벌어지고, 한 국가의 구성원으로서 단합하기가 매우 어렵게 된다. 그래서 베트남 정부는 소수 민족을 대상으로 하는 베트남어 교육에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다. 산악지방에는 인구가 많지 않고, 거리가 멀기 때문에 아동들이 학교에 다니기가 불편하고 위험하다. 때문에 베트남 정부에서는 청년들을 선발하여 군복무를 대체하여 집집마다 방문하여 공부를 가르쳐 주는 방문 교사로 활용하고 있다. 이러한 노력 덕분에 비록 인적이 드문 산악지방에 살더라도 글자를 모르는 사람의 수는 다른 나라에 비해서 많지 않다. 베트남의 문맹률이 낮은 이유이다.

∎훙브엉 시대의 암각화

문자가 없었던 훙브엉 시대는 B.C 2879년부터 시작되었다. 베트남은 반만년의 역사를 자랑한다. 한민족의 최초 국가인 고조선이 B.C 2333년에 시작되었으니 한민족의 역사보다 546년이나 빠르다. 훙브엉이 다스렸던 홍방시대의 나라 이름은 반랑국이었다. 이 시기는 청동기와 철기시대로, 이때도 물론 소통언어는 있었지만, 언어를 표기할 도구인 문자는 없었다. 말이 있었다면 어떤 형태로든지 반드시 문자도 있었을 것이라는 가정을 해볼 수도 있겠지만, 암각화 외에는 고대 베트남 문자에 대한 흔적을 아직 찾지 못하고 있다.

∎한자를 사용했던 북속 시대

홍방시대의 나라인 반랑국은 B.C 257년에 어우락국에 망하고, 어우락국은 B.C 179년에 남비엣에 망하고, 남비엣은 한(漢)나라 무제에 의하여 멸망되었다. B.C 179년 어우락국이 망한 이후부터 A.D 938년 독립할 때까지 무려 12세기 동안이나 중국의 식민 지배를 받았다. 12세기 동안 계속하여 중국의 식민 지배를 받아 왔으니, 당연히 중국 문자를 쓸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20세기 초까지의 베트남 역사서는 모두 중국문자로 기록되어 있다.

∎쯔놈이 탄생했던 독립국가 시대
∎쯔놈은 민족 자주의식의 산물

‘쯔놈’이란 베트남이 A.D 938년 중국의 식민 지배를 벗어나 가까스로 독립을 달성한 이후 베트남 사람들이 점차로 자주의식을 강하게 갖게 되었고, 자신들의 고유 문자가 필요함을 자각하게 되면서 만들어낸 베트남 문자를 말한다. 베트남 사람들은 쯔놈을 ‘국어’로 부르기도 했는데, 쯔놈의 의미는 남쪽의 글이라는 뜻이다. 중국의 한자가 북쪽의 글이라면, 베트남은 중국의 남쪽이니까 남쪽의 글, 다시 말하면 ‘우리 글’이라는 뜻이다. 쯔놈이 언제부터 출현하였느냐 하는 문제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학설이 있다. 대부분의 학자들이 쯔놈은 북속시대인 8-9세기에 배태되었다가 자주독립 이후인 10-12세기에 성립되었으며, 13세기부터 발전되어 오다가 20세기 초까지 사용된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쯔놈 성립기는 리(李)씨 왕조로 1009년에 나라를 세운 리(李) 태조는 1010년에 탕롱(昇龍: 현 하노이의 옛 이름)으로 도읍지를 옮기고, 4대 인종 때인 1075년에는 과거제도를 실시하였다. 리(李)씨 왕조는 베트남의 정통성을 확립하기 시작한 최초의 왕조라고 할 수 있다.

∎쯔놈은 한자의 변형

쯔놈은 형태적으로 보면 일종의 한자의 변형이다. 따라서 옥편에서 찾을 수 없는 문자이고, 혹시 있다고 해도 다른 의미로 사용되었으며, 같은 의미로 사용된 것은 일부분에 지나지 않는다. 예를 들면, 북속시대에는 ‘불’이라는 의미의 베트남어 ‘LỬA[르어]’를 쓸 문자가 없어서 한자 ‘火’를 사용하여 표기하였고, 쯔놈 출현 이후에는 한자를 이용하여 ‘불(火)’이라는 의미에 베트남어 ‘LỬA[르어]’와 발음이 유사한 ‘려(呂)’를 결합하여 쯔놈 ‘焒(려)’를 만들어 쓰고, ‘르어’라고 읽는 것이다.

베트남에서는 중국으로부터 독립 이후 쯔놈을 사용하였고, 쯔놈은 비록 보편적으로 널리 통용되지는 않았지만, 베트남 문자로서의 위상을 구축해가며 발전하였다. 1498년 바스코 다 가마가 인도항로를 발견하고부터 유럽 상인들이나 천주교 사제들이 전도를 위해 대거 동양으로 진출하기 시작하였다. 특히, 16세기부터 유럽을 중심으로 천주교 신부들이 베트남으로 파견되기 시작하였다. 17세기 들어서부터 가장 많은 사제들이 파견되었는데, 1645년부터 1788년까지 예수회 소속의 사제들이 17개국에서 145명이 베트남으로 파견되었다. 외국인 사제들을 국적별로 보면, 포르투갈 74명, 이탈리아 30명, 독일 10명, 일본 8명, 프랑스 5명, 스페인 4명, 중국, 마카오, 폴란드가 각 2명, 기타 스위스, 체고슬로바키아, 헝가리 등 여러 나라에서 각 1명씩 파견되어 천주교를 전하였다. 천주교 사제들이 오기 전부터 베트남에는 한자가 널리 통용되고 있었고, 동시에 쯔놈 문자도 사용되고 있었다. 천주교에 이어 기독교 전도가 이어지면서, 신부나 목사들은 설교나 강론을 위해 베트남어를 배우거나 자신들의 문자로 베트남어를 기록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천주교 사제들 가운데 가장 많은 수를 차지했던 포르투갈 출신 신부들은 여러 지역에서 라틴 문자, 포르투갈 문자, 희랍 문자를 사용하여 초기 단계의 베트남어를 표기하였다. 이러한 노력들 가운데 하나가 알렉산드흐 드 호데(Alexandre de Rhodes) 주교가 1651년 로마에서 세계 최초로 <베트남어-포르투갈어-라틴어 사전>을 출판한 것이다. 이 사전의 출현은 베트남어 역사에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다. 이 사전은 단어 설명은 물론, 성조 표시, 품사 분류까지 한 최초의 베트남 문법책이었고, 현재 사용되고 있는 베트남 문자의 효시로 간주되고 있다. 알렉산드흐 드 호데 주교는 1624년에 베트남에 첫발을 디뎠는데, 1645년 최종 추방당하기까지 5번씩이나 추방을 당했었고, 베트남인 사제들과 함께 10여 년 동안 베트남어를 공부하였다고 한다. 그 결과를 바탕으로, 1649년 6월에 로마로 돌아와, 1651년에 <베트남어-포르투갈어-라틴어 사전>을 출판하였던 것이다.

∎프랑스 식민정청에서 한자 사용 금지령
∎1919년 과거시험 폐지로 쯔놈과 한자 사용 사라져


19세기는 서구 열강들이 아시아 여러 나라를 침략하여 식민지화하려는 야욕으로 아시아에서 자국의 이익을 위한 식민지 쟁탈전을 벌인 시기였다. 응우옌(阮)왕조 2대 왕이었던 민망(明命)은 서양에 대해 매우 배타적이었다. 1825년에 천주교를 금지시키고, 1833년에는 8명의 선교사와 베트남 신자들을 처형하였다. 1836년 칙령에 따르면, 서양 선교사를 살해하는 것은 살인죄에 해당되지도 않았고, 선교사를 숨겨주는 자도 극형에 처할 수 있었다. 1847년에 3대 왕 티에우찌(紹治)는 모든 유럽인을 체포하여 사형에 처하도록 하였다. 이는 베트남 중부의 항구도시 다낭에 입항해 선교의 자유를 요구하던 프랑스 함대 2척이 베트남 해군선박에 발포하여 침몰시킨 사건이 발생했기 때문이었다. 제4대 왕 뜨득(嗣德)은 1848년과 1851년에 선교사들에 대한 박해를 더욱 강화하여 1860년까지 유럽인 선교사 25명, 베트남인 사제 300명, 그리고 평신도 약 2만여 명을 처형시켰다. 이에, 프랑스는 군함을 보내 다낭에 정박시키고 관련자 처벌을 요구했으나 베트남 조정으로부터 거절당하였다. 프랑스 해군은 다낭의 요새에 함포사격을 가하고 철수하였다. 이때가 1856년 8월이었다. 1858년 7월에는 약 3,000명의 병력을 실은 프랑스와 스페인 연합 함대 14척이 다낭에 함포사격을 가하고 안하이성과 똔하이성을 점령하였다. 이로부터 시작된 프랑스의 베트남 지배는 1954년 5월 7일 디엔비엔푸 전투에서 프랑스가 패하고, 군대를 철수할 때까지 이어졌다. 프랑스 식민정청은 1878년 4월 6일 법령을 제정하여, 1882년 1월 1일부터 모든 공문서는 물론 학교에서 라틴 문자로 된 베트남어만을 사용하도록 하였다. 프랑스 식민 정부에 의해 베트남어의 라틴 문자화가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이다. 그리고 1915년에는 북부, 1919년에는 중부 베트남에서 과거제도를 각각 폐지함으로써 베트남에서 한자와 쯔놈의 사용은 점차로 사라지게 되었다.

베트남어의 특징

∎ 라틴 문자를 사용한다
∎ 단음절어이다
∎ 형태가 변하지 않는다
∎ 6개의 성조가 있다

베트남어에는 성조가 있어서 외국인들이 발음하기가 쉽지 않다. 베트남어의 특징은 첫째로, 한자 문화권인 베트남이 라틴 문자를 사용한다는 점이다. 둘째로, 베트남어는 단음절어라는 특징이 있다. 발음 하나하나, 음절 하나하나에 의미가 있다는 것이다. 예를 들면, 한국말에 ‘어머니’라는 단어는 3음절로 이루어져 있으나 베트남어로는 같은 의미로 음절 하나, mẹ[매] 하나면 충분하다. 셋째로, 베트남어는 형태가 변하지 않는다는 특징이 있다. 영어, 프랑스어, 한국어 모두 시제나 단수, 복수에 따라서 형태가 변한다. 예를 들어, ‘가다’라는 기본형이 ‘갔다’, ‘갔었다’, ‘가겠다’, ‘간다’ 등등으로 변화한다. 시간의 변화에 따라 단어의 꼴이 바뀌는 것이다. 그러나 베트남어에서는 기본형은 절대로 변하지 않는다. 베트남은 자신은 절대 변하지 않으면서 남을 통해서 자신을 바뀐 것으로 보이게 하는 재주가 있는 특별한 나라다.

베트남어의 특징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은 6개의 성조가 있다는 것이다. 성조가 있어 말을 할 때 발음의 굴절에 따라서 뜻이 달라진다. 성조는 음의 높낮이와 굴절을 의미한다. 예를 들면, 베트남어로 인사할 때, “씬 짜오(Xin chào!)” 하는데, “안녕하세요?”라는 뜻이다. 이때 짜오(chào)에는 모음 바로 위에, 아래로 내려서 발음하라는 표시가 있어서 내려 읽어야 한다. 발음을 잘못하여 “씬 짜오(Xin cháo!)”라고 짜오를 위로 올려 발음하면 다른 의미가 된다. “짜오(cháo)”는 모음 위에 올려 발음하라는 표시가 있기 때문에 올려서 발음하면 “죽”이라는 뜻이 된다. 그래서 외국 사람들이 베트남 사람들과 이야기할 때, 발음이 서툴러서 성사단계의 계약이 파기되거나 노사분규의 원인이 되기도 한다. 그러나 베트남어는 발음만 들으면 단어의 뜻을 이해할 수 있는 단어가 많다. 베트남어의 어원이나 한국말의 어원이 중국 한자어에서 유래된 것이 전체 어원 가운데 50%가 넘기 때문이다. 베트남어의 발음을 들어보면 사전을 찾지 않고도 뜻을 알 수 있다. 예를 들면, 한국은 베트남어로 ‘한꾸옥’, 미국은 ‘미꾸옥’, 기숙사는 ‘끼뚝싸’라고 한다. 다만 베트남어는 라틴 문자로, 한국말은 한글로 표기한다는 점이 다를 뿐이다.

베트남의 외국인투자 세계 1위인 한국은 생산성 향상과 언어문화 차이로 인한 노사분규 예방을 위하고, 현지인들과의 원활한 소통을 위해 투자업체 임직원들이 베트남어에 대한 소양을 갖추는 것은 선택이 아닌 필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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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알렉산드흐 드 호데(Alexandre de Rhodes:1591.3.15.-1660.11.5.) 주교: 프랑스 아비뇽 태생으로 로마에서 천문학과 수학을 공부하였으나, 천주교 사제가 되어 1619년 4월 일본으로 향하는 도중 일본에서의 천주교 박해가 극심해지자 향로를 마카오로 바꿨다. 1624년 12월 호이안에 도착하여 베트남어를 공부하였다. 1년 후 마카오로 돌아갔다가 1627년 3월에 북부베트남으로 다시 돌아왔으나, 1630년 5월 마카오로 추방당했다. 마카오에서 10년간 신학교수로 있으면서, 1640년에서 1645년까지 남부베트남을 4차례 왕래하였고, 베트남에서의 사제 활동은 순탄치 못해 20년 동안 5번이나 추방당했다. 1645년에 마지막으로 추방당해 마카오를 거쳐 1649년 6월에 로마로 돌아와, 1651년에 <베트남어-포르투갈어-라틴어 사전>을 출판하였다. 1655년부터 이란에서 전도활동을 하다가, 1660년에 69세의 일기로 선종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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