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역(防疫)은 과학이다. 정치도 아니고, 외교도 아니다. 방역과 정치, 방역과 외교는 분리돼야 한다.
중국 정부의 이런 반응은 강경화 외교부 장관이 이날 오후 도미타 고지(冨田浩司) 주한 일본대사를 외교부로 초치하여 ‘일본 정부가 우리 국민을 대상으로 입국 제한 강화 조치를 취한 데 대한 유감의 뜻’을 표하고, 부당한 조치의 조속한 철회를 촉구한 것과는 다른 모습이다. 조세영 외교부 제1차관은 이날 90일 이내 단기체류 일본인 입국 금지, 기존 비자 효력 정지, 14일 격리 등 상응 조치를 발표했다. 우리 정부는 중국에 대해서는 새로운 조치를 발표하지 않았다.
중국 외교부 대변인이 중국 출발 중국인과 외국인에 대한 일본 정부의 사실상 입국 금지와 격리조치 발표에 대해 “과학적이고 적절한 조치로 이해하겠다”는 입장을 밝히기 사흘 전 시진핑(習近平) 중국공산당 총서기 겸 국가주석은 방역에 대한 과학기술의 중요성을 강조한 중요 연설을 했다. 시진핑은 베이징(北京)시 일원의 ‘신관폐렴(新冠肺炎·신종 코로나바이러스 폐렴) 방역 기관들을 둘러보면서 “우리 중국이 역정(疫情)과의 전쟁에서 최종 승리를 거둔 관건은 과학기술에 의존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시진핑은 이 연설에서 “인류와 질병과의 교량(較量·힘겨룸)에서 가장 유력한 무기는 과학기술이며, 신관폐렴 방역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과학적 자세를 견지하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시진핑은 우한(武漢)에서 코로나19 바이러스에 의한 폐렴 환자가 지난해 12월 8일 최초 발견된 이후 무려 49일이 지난 1월 26일에야 당 정치국 상무위원회를 개최해서 대응조치에 뒤늦게 나서는 바람에 7일 현재 8만명이 넘는 확진자를 내는 재앙을 초래하긴 했다. 그러나, 1개월 남짓 벌여온 코로나19 바이러스와의 ‘총체적 인민전쟁’ 끝에 확진자 수 증가추세의 획기적 감소라는 승기를 잡은 뒤 과학기술의 중요성을 다시 강조한 것이다.
중국의 이번 코로나19 바이러스 방역 전쟁에서 우한 현장의 과학적 판단은 시진핑 당 총서기가 한 것이 아니라 중난산(鍾南山)이라는 중국공정원(工程院) 원사가 담당했다. 올해 84세의 중난산은 1960년 베이징(北京)대학 의학부 출신으로 평생 호흡기 질환을 연구해왔으며, 1979년 영국 에든버러 대학에 유학해서 의학을 공부했으나, 중국인에게 의학박사를 수여하지 않는다는 영국 대학의 원칙을 확인하고는 1981년 귀국했다. 중난산은 2003년 겨울 광둥(廣東)성에서 발생한 SARS(중증급성호흡기증후군)의 확산을 효과적으로 저지한 업적이 인정돼 2007년 에든버러 대학에서 명예 이학박사를 받았고, 2007년 10월부터 중국 국가호흡기질환실험실 주임을 맡아 호흡기 질환에 관한 연구를 계속해왔다.
중난산은 우한(武漢)에서 코로나19 바이러스 환자가 본격적으로 발생하기 시작한 1월 18일 밤에 현장으로 날아가, 1월 21일 우한 폐렴이 신종 코로나바이러스에 의해 발생한다는 사실과, 이 바이러스가 시작한 곳은 알 수 없으나 ‘런촨런(人傳人·사람과 사람 사이) 감염’으로 확산된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우한 현지에서 중난산이 올린 “사람 사이에 감염이 가능하다”는 보고에 따라 시진핑 당 총서기는 1월 26일 당의 최고 지휘부인 정치국 상무위원 7인 회의를 소집해서 코로나19 바이러스 폐렴에 대한 전면적인 방역에 본격적으로 나섰다. 리커창(李克强) 총리가 포함된 7인의 정치국 상무위원회는 “과학에 근거를 둔 질서 있는 방역에 나서고 첫째 환자, 둘째 전문가, 셋째 자원, 넷째 치료에 집중한다는 ‘4가지 집중’의 원칙을 확인한다”는 결정을 내렸다. 시진핑은 2월 11일에는 코로나19 바이러스 폐렴에 대한 방역을 ’총체적인 인민전쟁’으로 규정하고, 군과 정부에 대한 총동원령을 내렸다. 지난해 12월 8일 우한중심의원의 젊은 안과의사 리원량(李文亮)이 SARS 환자로 오인해서 우한 폐렴 환자 7명을 발견한 때로부터는 1개월이 더 지난 때 선포된 코로나19 바이러스에 대한 ‘인민전쟁’은 비록 늦게 시작됐지만, 선포 1개월 남짓 만에 확진자 수 증가추세의 획기적 감소라는 전과를 얻었다.
중국 내 코로나19 바이러스 폐렴 확산 현황은 국무원 통합방역본부(聯防聯控機制) 집계로 3월 6일 현재 누계확진자 8만815명, 현재 확진자 2만2140명, 누계 치유환자 5만5602명이며, 이날 하루 발생한 새로운 확진자 수는 전국 103명으로, 우한(武漢)이 있는 후베이(湖北)성 확진자 증가 74명, 후베이 이외 지역 29명이라는 놀라운 방역 결과를 올리고 있다. 확진자 숫자 세계 2위의 우리는 중앙방역대책본부 집계로 3월 7일 오후 4시 현재 확진자 7041명, 6일 확진자 증가 484명(대구·경북 455명), 7일 274명에 사망 44명으로, 확진자 증가에서 중국의 2.5~5배에 가까운 숫자를 나타내고 있다.
중국은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 수립 이후 1976년 마오쩌둥(毛澤東) 사망까지의 27년간은 이데올로기인 ‘홍(紅)’을 중시하던 시기였고, 1978년 덩샤오핑 집권 이후 현재까지는 과학기술을 강조하는 ‘전(專)’의 시대가 계속되고 있다. 마오는 집권 초기에는 선진 사회주의 공업국가였던 소련의 도움을 받아 자동차 제조를 포함한 중공업 건설하는 ‘전(專)’ 중시의 경향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1957년 말부터 1960년 초까지 “인민의 역량으로 19세기 패권국 영국과 20세기 패권국 미국의 공업생산량을 따라잡자”는 ‘초영간미(超英赶美)’를 내세운 대약진(大躍進)운동’을 벌여 사회주의 이데올로기를 중시하는 홍의 시대로 들어가면서 불과 3년 만에 중국경제는 무너지기 시작했다.
강철공장을 짓는 대신 전국의 마을마다 ‘토법고로(土法高爐·향토용광로)’를 설치해서 강철생산량의 급격한 증산을 시도했으나, 철광석도 역청탄도 확보되지 않은 상태에서 철강이 생산되기는커녕 수억 인구의 가정에서 쇠붙이가 모두 징발당하는 소동을 빚었을 뿐이다. 그 결과 공업생산량 증대는 물론 농업생산량도 바닥으로 떨어져 대약진 기간에 수를 알 수 없는 아사자가 발생했다. 2008년 중국 관영 신화통신 고급기자였던 양지성(楊繼繩)은 홍콩에서 출간한 책 ‘묘비(墓碑)’에서 대약진운동으로 인한 사망자 수를 3600만명으로 추산했고, 인민일보 등 관영매체들은 “360만명을 잘못 추산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대약진운동의 실패에 대한 책임을 지고 마오는 국가주석에서 물러났으나, 1966년부터는 정치적 곤경에서 벗어나기 위해 중고생과 대학생을 동원해서 정적을 살해하거나 구타하는 ‘문화대혁명’을 1976년 9월 사망할 때까지 10년간 진행했다. 문화대혁명 기간에는 공업과 농업 생산이 바닥에 떨어져 수많은 사망자와 아사자가 발생했다. 2010년 9월 영국 런던대학 프랭크 디코터(Dikotter) 교수는 중국 도시와 농촌 주민기록을 실사해서 추산한 문화대혁명기 사망자 숫자는 대약진 기간보다 900만명이 더 많은 4500만명으로 추산했다.
1978년 12월에 열린 중국공산당 중앙위원 전체회의에서 권력을 잡은 덩샤오핑(鄧小平)은 ‘실사구시(實事求是)’와 ’사상해방(思想解放)’을 당론으로 통과시켰다. “마오의 홍(紅) 위주 사상에서 해방되어 현실을 정책 판단의 근거로 삼자”는 구호였다. 덩샤오핑은 이후 각계를 시찰하면서 기회 있을 때마다 “과학기술이 제1의 생산력(科技是第一生産力)”이라고 강조하고, “사회주의도 시장경제를 실시할 수 있다”면서 경쟁을 통한 선택과 집중을 강조해서 이후 40년간 빠른 경제발전을 가능하게 만들었다.
중국 국가이민국 집계에 따르면, 우한(武漢)을 중심으로 한 코로나19 확진자가 발생하는 과정에서 2월 14일 이전까지 세계 130개 국가가 중국과의 국경을 폐쇄하거나 항공, 선박 노선을 차단했다. 이 가운데에는 중국과 국경을 맞대고 있는 북한, 몽골, 러시아, 카자흐스탄을 포함한 중앙아시아 국가들이 대부분 포함됐다. 이에 대해 중국 외교부가 해당 국가에 항의하거나 베이징 주재 외국 대사를 외교부로 부른 일도 없었고, 외국 대사들을 한자리에 모아 불만을 표시한 일도 없었다. 이른바 중국의 ‘주변국’ 중 하나인 몽골은 미국이 중국인 입국을 금지시킨 2월 2일보다도 하루 빠른 2월 1일 “중국 공민과 중국을 경유한 외국인들의 몽골 국경 진입을 금지”시키는 조치를 내렸다.
칼트마 바툴가 몽골 대통령은 2월 27일 코로나19가 중국에 확산된 이후 최초로 베이징을 방문해서 시진핑 국가주석과 회담한 외국 원수가 됐다. 이 회담에서 시진핑 주석은 “바툴가 대통령의 이번 방문으로 중국은 몽골 인민들의 보귀한 지지와 도움을 받았다”면서 “앞으로 중국과 몽골 양국은 동주공제(同舟共濟)의 정신으로 협력해 나가자”고 말했다. 이에 대해 바툴가 대통령은 “중국의 영원한 이웃으로서 따뜻한 지지를 보낸다”고 말하면서, 중국인들이 기력을 회복하라는 의미로 양 3만 마리를 기증한다는 증서를 전달했다.
중국이 방역과 외교를 분리해서 판단하는 실례를 제공한 것과는 달리 문재인 대통령은 “중국으로부터 유입되는 감염원을 원천 차단해야 한다”는 대한의사협회의 거듭되는 건의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중국으로부터의 감염원 차단을 하지 않아 중국에 이어 세계 2위로 많은 코로나19 바이러스 확진자 숫자 때문에 7일 현재 세계 103개국으로부터 한국인 입국 금지 또는 제한 조치를 당하는 처지가 됐다. 그 이유를 되짚어 보면, 새로 부임한 싱하이밍(邢海明) 주한중국대사가 지난달 4일 기자회견을 갖고 “한국 정부는 WHO가 코로나 바이러스로 국경 간 이동을 통제하는 것을 권하지 않는다고 밝힌 기준에 따라 중국인의 입국을 금지하지 말아달라”고 밝혔기 때문인 것으로 추정해볼 수 있다. 더구나 '상반기 중 시진핑 주석의 방한' 문제가 4·15총선에서의 여당 성적과 맞물려 있어서 중국인 입국 금지를 받아들이지 않는 것으로 진단되고 있다. 아베 신조(安倍晋三) 총리가 이끄는 일본 정부 역시 4월 시진핑 방한과 도쿄(東京) 여름 올림픽의 성공적 개최에 중국의 역할이 꼭 필요하다는 정치적 판단에 따라 “중국으로부터의 감염원 차단”이라는 과학적 판단을 내리지 않았다.
일본 정부가 지난 6일에야 뒤늦게 한국과 중국으로부터의 감염원 차단을 위한 조치를 내린 것은 중·일 외교당국 간에 시진핑 주석의 일본 방문에 대한 협의 결과가 ‘일단 연기’로 결론났기 때문에 전격적으로 취해진 것으로 보인다. 자오리젠 중국 외교부 대변인은 지난 5일 정례브리핑에서 “현재 중·일 양국은 코로나 바이러스 방역에 전력을 기울이고 있고, 시진핑 주석의 일본 공식 방문은 최적의 시기와 환경, 분위기에서 이뤄져야 원만한 성공을 거둘 수 있다”면서 “중·일 쌍방은 방문 시기에 관해 밀접한 소통을 유지하고 있다”고 밝힘으로써 방문 연기를 공식화했다.
시진핑 주석의 일본 방문이 연기됐다면 한국 방문도 성사되기 어려워진 것으로 보는 것이 합리적이다. 그러나 강경화 외교부 장관은 지난 5일까지도 시진핑의 상반기 방문이 유효하다는 입장을 바꾸지 않고 있다. 일본은 뒤늦게나마 4일 중국과 한국으로부터의 감염원 차단이라는 조치를 취했으나, 강경화 외교부 장관은 일본 정부의 조치를 비난하면서 상응 조치를 취하고 나섰다. 시진핑 주석의 4월 일본 방문 연기로 이미 ‘상반기 방한’이 어려워진 것으로 충분히 판단할 수 있는 상황인데도 ‘각주구검(刻舟求劍)’식 대응방식을 고집하고 있는 문 대통령과 강경화 장관은 과연 뱃전에 표시해놓은 칼자국을 보고 흘러간 강물 속에서 칼을 건져낼 수 있을까.